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56)화 (156/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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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저희 마마께서 어떠한 잘못을 하셨는지는 모르오나 마마께서는 오늘 아침부터 계속… 계속 몸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폐하. 마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저를 벌하시고 부디… 부디 저희 마마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저를 죽여 주시고 폐하를 생각하는 마마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폐하!”

“이, 이것이 그래도…! 뭐 하고 섰느냐, 당장 끌어내라!”

아진의 행동은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방자한 죄였다. 오 태감은 제가 알던 황제와는 전혀 다른 눈동자를 하고 있는 황제에게 아진이 더 오래 보이지 않도록 황급히 사람을 시켜 아진을 끌어냈다. 그의 주군이 이런 일로 사람의 목숨을 취하실 분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아무리 보아도 지금 황제의 상태는 정상적이지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불안했다. 오 태감 나름대로는 아진을 위한 최선을 다한 셈이다.

다행히 황제는 끌려 나가는 아진에게 더 시선을 두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의 움직임은 아주 느리고 불안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불안하고 초조한 오 태감이 서둘러 어가를 대령하라 외치는 한편 이한의 곁에 바짝 붙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커헉…!”

이한이 갑자기 고통스러운 숨을 쏟아내며 그대로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폐하!”

놀라 비명처럼 황제를 부르며 오 태감이 다급히 이한의 몸을 부축했다. 황제의 몸이, 언제 어느 자리에서도 결코 무너진 적이 없던 그 몸이 오 태감의 품 안에서 속절없이 떨렸다. 마치 피를 토하는 것처럼 이한은 연신 거친 기침을 하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태의를… 어서 태의를…!”

“되었다… 흡… 되었어….”

안색이 파랗게 질려 황급히 태의를 찾는 오 태감의 말을 막은 건 여전히 고통스러워 보이는 이한이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처럼 떨리는 다리를 연신 옮기며 말했다.

“그냥… 돌아가자, 어서….”

“하오나 폐하…!”

“괜찮으니까! …어서 가자.”

심장 위를 움켜쥔 채로 이한이 어가를 향해 멈추지 않고 걸었다. 오 태감은 그런 황제를 부축하며 내관에게 중천전으로 태의를 들게 하라 재빨리 이르곤 비틀거리는 황제를 계속 부축했다. 간신히 어가에 몸을 실은 황제는 서정궁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화운이 있는 곳을 한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마! 마마!”

얼굴이 파랗게 질린 아진이 침실로 뛰어 들어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화운을 감싸며 눈물을 쏟아냈다.

“마마, 괜찮으세요? 이게 갑자기 무슨….”

“폐하께서는… 돌아가셨느냐….”

“…예. 우선 일어나세요, 마마. 얼마나 꿇고 계셨던 거예요….”

품에 닿은 화운의 몸이 연신 떨리고 있어 마음이 미어졌다. 아진은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연신 닦아내며 화운의 몸을 부축했다. 부축하려고 했다.

“흑… 흐윽…!”

화운의 몸이 앞으로 숙여지며 그 입에서 서러운 울음이 쏟아져 나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감정이 쏟아지듯 화운이 허리를 굽혀 몸을 웅크린 채 오열했다.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당황하던 아진이 이내 화운의 어깨와 등을 끌어안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마마, 어찌 이리 우십니까.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무언가 오해를 하신 거죠? 괜찮아요. 폐하께서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나면 다시 마마의 이야기를 들으실 거고, 그럼… 그러면 분명 지금의 일도 보상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럼요.”

아진은 연신 같이 눈물을 쏟으면서도 행여나 제가 슬퍼하면 화운이 더 상심할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꿋꿋하게 말했다. 지금보다 더 최악이었던 상황도 이겨내신 마마가 아니신가. 이제 마마께서는 결코 폐하를 크게 거스르지 않을 분이시고, 폐하께서는 늘 관대하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니 이 일도 결국엔 잘 풀릴 거라 아진은 믿었다.

하지만 화운은 몸을 웅크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평소 같았으면 제 마음이 무너지더라도 아진의 위로에 고맙다고 말을 해주었을 화운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목소리가 온전히 들리지도 않았다. 수많은 칼날에 온몸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우스운 일이다. 애초에 가질 수 없던 것을 거짓으로 손에 쥐어놓고, 그것을 잃었다고 이토록 서러워하다니.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러한가. 제 아무리 거짓으로 시작을 하였다 하더라도 황제를 향한 마음만큼은 진심이 아니었나. 연화운이 되기 훨씬 전부터 그는 황제 폐하를 경외하였고, 그런 분과 가까워지며 저도 모르게 연모의 감정을 갖게 된 건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그 자신의 진실한 감정이었다. 손끝까지 전부 저며지는 것 같은 고통은 분명 지금 그 자신의 것이다.

“폐하… 흑… 폐하…….”

황제가 떠나고 난 뒤에야 화운은 그분의 이름을 자유롭게 부르며 울었다. 마음이 약한 분이시니 그 앞에서 화운이 이토록 서럽게 울었다면 분명 흔들리셨을 것이다. 너 역시 내게 진심을 주었던 것이구나, 그리 화운의 마음을 가늠해 주셨을 분이시다. 그래서 화운은 황제의 앞에서 이리 울 수가 없었다.

황제가 어떤 벌을 내릴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일은 밖으로 드러내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집안이 엮여 있는 사안이니 대놓고 화운을 내쫓거나 죽이지는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 화운은 차라리 죽는 것이 가장 나은 벌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사한가. 처음 황궁으로 들어올 때는 그저 폐하께서 계시는 황궁 안에 함께 머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였는데, 이제는 후궁의 처소에 들어앉아 어쩌면 다시는 황제 폐하의 용안을 뵙지 못할 거란 생각에, 그분께 앞으로 영영 경멸만을 받을 거란 생각에 이토록 슬퍼하고 있으니. 화운은 제 자신이 이렇게 분에 넘치는 욕심을 내는 사람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하운이 연화운이 되기 전 정안궁은 황궁에서 가장 화려한 냉궁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화운이 달라진 뒤로 그 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이제는 연화운, 그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곧 황제가 결코 찾지 않을 냉궁이 될 것이다.

“마마…! 마마!”

이윽고 화운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허물어졌다.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시야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건, 너를 연모하고 있다 하염없이 속삭여 주던 황제의 얼굴이었다.


연빈이 서정궁에 연금됐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황궁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날 서정궁에서 나오던 폐하의 얼굴이 야차와도 같았다느니, 다시는 연빈을 보지도 않을 것 같았다느니 하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전해졌다. 누구 하나 정확한 이유를 아는 이가 없으니 오히려 수만 가지의 짐작이 떠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신빙성을 얻은 소문은 연빈이 기억이 돌아와 본성까지도 되찾았다는 설과, 애초에 모든 게 다 기억을 잃은 척 꾸며낸 일이었던 것이 드디어 들통 난 게 아니겠냐는 설이었다.

물론 한 번이라도 연빈을 가까이에서 직접 마주한 적이 있는 이들은 그의 행동이 거짓일 리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긴 하였으나 그런 이들조차도 그렇다면 본래의 연빈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에는 달리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매일 밤 연빈만을 찾으시던 황제께서 왜 갑자기 그를 연금까지 하셨겠느냔 말이다.

“연빈이 자네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고.”

“예, 황후마마.”

누구도 서정궁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으니 황후라고 하여 달리 연빈을 만날 방도가 있을 리 없었다. 황후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황후궁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숙비, 비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비영이 말을 이었다.

“그때도 영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는데 아무리 물어도 괜찮다고만 하니….”

“자네가 보기엔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말이지?”

“예. 다 알고 주변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폐하께서 황후마마께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까.”

제가 날벼락을 맞기라도 한 듯 초조한 얼굴로 비영이 물었다.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를 듣는 건 고사하고 황제의 얼굴조차도 뵙지 못한 황후였다. 쉬이 짐작할 수 없는 이유를 가늠하는 황후, 자란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찻잔의 겉면을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자란이 이내 밖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밖에 있느냐.”

“예, 황후마마. 부르셨습니까.”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태감이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자 자란이 말했다.

“내무부의 정 총관을 들라 이르라.”

“예, 황후마마.”

태감이 자리를 뜨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비영이 다소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혹시나 이번 일로 내무부에서 멋대로 연빈을 과하게 괴롭히지는 않을까 미리 단속을 하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빠르게 술렁이는 황궁 내의 분위기에 비영 역시 걱정을 하던 터라 이렇게 진중하고 세심한 황후의 모습이 반가웠다. 이내 자란이 비영을 향해 말했다.

“우선은 내가 폐하를 뵙도록 해볼 테니 자네들도 어느 쪽으로든 경거망동하지 말고 기다려 보게.”

“예, 황후마마. 안 그래도 소식을 듣자마자 정빈이 당장에 폐하를 찾아뵙겠다고 하는 걸 뜯어말리고 오는 길입니다.”

다소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비영이 부러 가벼운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비영의 노력이 무색하지 않도록,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자란이 마찬가지로 조금 장난스러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께서 아끼시는 사내 하나를 위해 우리가 이러고 있다니 이것도 참 재밌는 일이군.”

“이를 말이겠습니까.”

삶이란 언제든 뜻대로 흘러가질 않는 법이었다. 과연 이날의 이 일이 얼마나 큰 파란을 몰고 올 것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함 마음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애써 가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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