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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위에 올린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울어서는 안 된다. 허물어져서는 안 된다. 폐하께서는 다정한 분이시니 그분의 연민을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 화운은 그렇게 자신을 다그치고 있었다.
운아.
그분의 그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착각하고 싶었던 날이 많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을 모아다 입힌 것처럼 곱고 고운 음색으로 운아, 하고 불러주시면 그게 내 것인 것만 같았다. 비록 그분은 나를 모르지만. 나란 존재를 전혀 모르시지만. 그래도 마치 인정받은 것만 같아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그분이 보아주는 것만 같아서 설레고 가슴이 일렁거리던 날들이 있었다.
그것이 결코 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저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이 아니라, 간악하고 이기적인 자신에게 폐하께서 단지 속고 계실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다. 이대로 영원이 그분께 운아, 하고 불리며 살아가고 싶었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다.
자신이 내밀고 있는 모든 손길을 전부 거부하는 화운의 자그마한 몸을 한참 내려다보고 있던 이한이 이윽고 침대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려운 얼굴을 한 황제는 이 상황을 회피하려는 듯 불안하게 시선을 떨며 말했다.
“태의를 불러줄 테니 치료를 받거라.”
“폐하….”
“단단히… 단단히 몸이 상한 게지…. 그러니 이리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냐.”
“폐하, 그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다!”
급기야 이한이 소리를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다. 절로 숨이 가빠왔다. 도대체 얼마나 몸이 안 좋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혼이 바뀌었다니 그게…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폐하…!”
“행여나 태의 앞에선 그런 소리는 입도 뻥긋 말거라. 자칫 잘못했다가 황궁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너만 곤란할 것이야.”
그리 말하며 이한은 마치 도망치는 사람처럼 화운의 곁을 지나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천!”
그런 이한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비명처럼 이름을 외친 화운의 목소리였다. 몸을 움직여 걸음을 멈춘 이한의 뒷모습을 바라본 채로 무릎을 꿇은 화운이 말을 이었다.
“도명, 자문, 윤정, 화주, 명안.”
“…….”
“전부 저와 함께 관사를 쓰던 천민 출신의 시위 이름입니다. 당장 내관을 시켜 알아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 그만해라….”
“당장 이 자리에서 제가 시위로 들어오기 위해 치렀던 시험 문제를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 또한 기록이 남아 있을 테니 확인 가능할 것이옵니다.”
“그만 그 입을 다물라고 했다….”
“폐하. 제가 정말 연빈마마라면… 어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가 있겠……!”
절박하게 고하는 화운의 말은 끝을 맺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한 걸음에 화운의 앞으로 와 한 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은 이한이 화운의 어깨를 아프도록 움켜쥐고선 끌어당겨 시선을 맞춰왔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황제의 검은 두 눈동자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이대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화운은 생각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야.”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황제가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내 앞의 네가 전부 다 거짓이었다… 이 말이냐?”
말과 말 사이에 터지는 황제의 호흡에는 울음이 있었다.
“이 사실을…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동안 너는 거짓으로 나를… 전부 거짓으로 대했다 이 소리냔 말이다!”
이한의 손가락이 화운의 어깨를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세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화운은 아프지 않았다. 아픈 것을 몰랐다. 정말로 아픈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건 황제의 눈빛이었다.
“말해 보아라. 너는 그저 살기 위해서… 그래서 내 앞에서 그렇게… 그렇게……!”
어느 날, 자목련 꽃 아래에서 봄날의 바람처럼 웃던 연화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며 고하던 작은 등과, 폐하께서 홀로 모든 짐을 지고 가시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러운 염려를 보내던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빠짐없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그 모든 것이 다만… 네가 나를 기만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야, 너는?”
결국 이한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황제의 위엄 같은 건 지금 이 순간 떠오르지도 않았다. 마음이 천 갈래로 찢어지는 고통에 이한은 몸부림치고 있었다.
어려운 길을 수도 없이 돌고 돌아서. 제가 옳다고 믿었던 길을 전부 다 헤집고 부정하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나아갔다. 전부 눈앞의 이 사내 하나 때문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도저히 놓을 수가 없는 이 사람 때문에 이한은 제 어머니의 눈물도, 어린 시절의 제 아픔도 전부 다 뒤로하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니.
“내가… 내가 너에게 주었던 것은 허면 네게는…”
“읏…!”
이한이 너무 강한 힘으로 어깨를 쥐는 바람에 화운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둘 중 그 누구도 그 아픔에 신경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네게는 어떤 의미였지?”
황제의 눈가가 끊임없이 젖었다. 화운은 손을 뻗어 그 뺨을 감싸고 싶었다.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화운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 천한 몸과 이 악귀 같은 마음으로 황제 폐하를 어지럽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치자. 네가 정말 연화운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주마. 그래도… 그래도 그동안 우리가 나누었던 그 많은 일들은….”
협박이라도 하듯 강경했던 이한의 목소리가 어느새 점점 연약하게 허물어져 갔다.
“네가 내게 보여주었던… 그… 그 마음들은….”
이한은 겁에 질려 있었다. 제가 처음으로 손에 쥐었던, 마음에 담았던 세계가 온통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두려움이 이한의 숨을 틀어막고 심장을 쥐어짜냈다.
“그 마음들은 진심이었느냐…?”
화운의 황제 폐하는 이토록 여리고 다정한 분이라서.
저를 기만한 사내를 앞에 두고도 황제는 이미 건네준 마음 하나를 쉽게 거두지 못하여 살길을 열어주고 계신 것이다.
화운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눈물을 쏟아내지 않기 위해 입안의 살을 전부 다 씹으며 버텼다. 그의 황제가 이토록 자애로우신 분이여서 화운은 마지막까지 버텨야만 했다. 숨을 한 번 가늘게 내쉰 화운이 이내, 황제의 앞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감히 살기 위해 황제 폐하를 능멸한 소인을…….”
“…….”
“절대로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폐하.”
화운은 기꺼이 그 자신이 벌인 일의 죗값을 받아야 했다.
천천히, 화운의 어깨를 쥔 이한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모든 혼란한 감정으로 깊어졌던 황제의 눈동자는 마치 영혼의 빛이 떠난 것처럼 맥이 탁 풀려 흐릿해졌다. 수도 없이 토해내던 저의 진심에도 단 한 번 저 역시 폐하를 연모한다, 그런 말을 되돌려준 적이 없던 연화운의 모습이 연신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이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랑이, 사람을 이토록 아프게 할 수도 있는 것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서 멍한 얼굴로 화운을 내려다보던 이한이 이내 손을 들어 젖은 제 얼굴을 마구 문지르고는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밖에 있느냐.”
“예, 폐하. 여기 있습니다.”
문이 열리고 한달음에 오 태감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덩달아 문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아진이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제 주인의 모습을 보고 놀랐으나 그 앞에 선 황제의 심상치 않은 기운에 감히 달려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이한이 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연빈 연화운은… 내 명이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서정궁에서 나갈 수 없다.”
생각지도 못한 명에 오 태감이 놀라 대답을 하지 못했고 아진은 다리가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한은 말을 이었다.
“또한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서정궁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될 것이야. 알겠느냐.”
“…예. 예,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말을 하는 내내 이한은 화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차라리 화운이 제 발치에 엎드려 빌기를 바라고 있는 듯도 보였다. 그것이 아니었다고. 폐하께서 오해를 하신 거라고. 이한은 이제라도 그렇게 빌어주길 바랐다. 어쩌면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화운은 남의 일인 것처럼 담담하게 그냥 거기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폐… 폐하… 폐하!”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황제가 이내 몸을 돌려 서정궁을 나서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진이 무릎으로 황급히 기어 황제의 앞을 가로막고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황제 폐하의 앞을 막아서는 게냐!”
오 태감의 서슬 퍼런 외침에도 아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단지 폐하께서 제 주인을 서정궁에 연금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아진을 정녕 불안하게 한 건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주인의 태도였다. 마치 화운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황제 폐하의 태도였다. 아진은 절대로 이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