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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53)화 (153/167)

153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만…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인가?”

“물론입니다, 마마. 제게 달리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숙비, 비영은 불안한 표정으로 제 앞에 담담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화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하게 앉아 있는 연빈을 보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연빈이 찾아왔다. 반가움에 비영의 얼굴 가득 미소가 걸린 것도 잠시, 연빈, 연화운은 갑작스레 비영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여 비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본 바, 제가 지난날 매질을 하여 죽게 만든 어린 궁녀가 하나 있는데 아무 데나 버려졌을 시신을 찾아 늦게나마 수습하여 주고 싶으니 그 일을 도와주실 수 있겠냐는 말이었다. 이후의 일은 모두 소정이라는 내관에게 일러 놓았으니 그에게 일러 주시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화운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비영은 줄곧 그에게 보답할 만한 것이 없어 내심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화운이 직접 부탁을 해오니 비영의 입장에선 꺼리긴커녕 오히려 반겨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비영의 마음 한 구석을 찜찜하게 만드는 건 지금 제 앞에 앉아 있는 화운의 분위기였고, 또 부탁의 내용이었다. 게다가 소정이라면 화운이 연못에 빠진 일에 연관이 되어있던 내관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가 않아 비영이 찬찬히 입을 열었다.

“어렵지는 않은 일이지…. 하지만 이쯤은 자네 역시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정말로 이상한 건 그것이었다. 이 일은 지금의 화운이 충분히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굳이 숙비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부탁을 할 만한, 그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지금 눈앞의 연화운은 뭔가, 당장 어디론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기묘한 분위기를 하고 있어 비영은 이유도 모른 채 자꾸만 마음이 불안했다. 화운이 대답했다.

“당장은 전부 말씀드릴 수 없는 것이 있사옵니다. 물론 어려우시다면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괜히 마마를 곤란하게 만들어드렸습니다.”

“아니! 아닐세. 어렵긴 무얼 이 정도를 가지고… 자네의 부탁이라면 언제나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니 앞으로도 주저 말고 나를 찾아오시게.”

상황이 이상스러운 것을 제외하면 화운의 부탁은 비영이 딱히 어려워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비영의 대답에 화운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몸을 굽혔다.

“감사합니다, 숙비마마. 혹시나… 이건 정말 만에 하나를 가정하고 드리는 말씀이온데, 혹시나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

“그래도 오늘 이 부탁 하나만은 꼭 들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네… 정말로 별일이 없는 것이지?”

“물론입니다, 마마. 아무 일 없이 편안하니 염려치 마십시오.”

아무래도 이상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거듭된 비영의 물음에도 화운은 그저 차분한 태도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화운은 결코 이 자리에서 솔직한 대답을 내어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화운이 돌아가고 나면 황후마마를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비영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화운에게 차를 권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마마,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까부터 화운의 눈치를 보며 쉽게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하던 아진이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아진에게 머리카락을 맡긴 채 말없이 경대 앞에 앉아 있던 화운이 면경을 통해 아진과 눈을 마주쳐왔다. 그 순간, 수천 번도 더 보았을 그 눈동자가 이상하게 낯설어 아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자신을 응시하는 화운의 시선은 여전히 부드럽고 온화하였으나 아진은 그 눈빛에서 미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심장이 자꾸만 방망이질을 하듯 두근거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서늘하게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진.”

“마마, 요즘 저를 너무 불안하게 하고 계세요….”

화운이 뭐라 더 말을 꺼낼 기미가 보이자 결국 견디지 못한 아진이 먼저 두려운 마음을 토해내었다. 물에 빠졌다 일어난 후부터 분위기가 묘하게 어려웠던 화운은 소정과 서천을 독대한 일이 있고 나서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 같았다. 아니, 단지 그런 말로는 아진이 느낀 그 감각을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침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선을 내린 채 고요에 잠긴 제 주인의 얼굴을 보며 아진은 문득 그의 얼굴이 원래 이랬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익숙하게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사람이건만 이상하게 오늘의 화운은 낯설었고, 어색했다. 단순히 분위기가 달라졌느니 무어니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눈매가, 콧대가, 입술과 턱선, 그의 얼굴 전부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아진, 지금 바로 중천전으로 가 줄래?”

지금만 해도 그렇다. 평소라면 어찌 그런 생각을 하냐며 아진을 달래 주기부터 하였을 화운이 마치 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굴고 있질 않나. 아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화운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중천전… 이요?”

“응. 가서 오 공공에게 말을 전해줘. 내가 오늘… 폐하께서 와 주시길 기다리고 있겠다고.”

“마마….”

평소라면 폐하를 모시길 먼저 청하는 화운의 말에 반색을 하고 좋아했을 아진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불안하여 대답조차 쉽게 할 수가 없었다. 방금 보았던 화운의 눈빛이, 화운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슬프게만 느껴졌다.

“마마… 무슨… 무슨 일인지 소인에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진이 초조함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화운이 변한 뒤 그를 모시면서 오늘처럼 불안했던 적이 없었다. 폭풍을 코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장 엄청난 해일에 휘말릴 것 같은 긴장감 속에 오로지 홀로 고요한 화운을 보자니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이 더욱 증폭되었다. 혹시나 이 모든 불안함이, 재해처럼 찾아올 무언가가, 속을 알 수 없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제 주인으로부터 비롯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마마.”

“…….”

“하지 마세요…….”

그래서 아진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진은 그 말 한마디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아진이 화운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울먹였다.

“하지 마세요, 마마…. 지금 생각하시는 게 뭐든지 간에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네?”

아진은 차라리 제 주인이 저를 탓해 주길 바랐다. 갑자기 웬 뜬금없는 헛소리냐며 영문 모를 얼굴을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화운은 서글프면서도 후련한 얼굴로 아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대답했다.

“…아진. 어서 다녀오렴.”

아진은 정말이지 엉엉 소리 내어 울고만 싶었다.


이한은 서정궁의 뜰 한 가운데에 서서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곤 축축해진 손바닥을 용포자락에 슬쩍 문지른다. 서정궁으로 오는 내내 이한은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아진이 오 태감에게 연화운의 말을 전하고 갔다. 폐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다는 전언이었다. 그간 좀처럼 먼저 무언가 요청을 하는 법이 없던 연화운이 대놓고 황제의 걸음을 청하다니. 오 태감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이한은 그 청이 그만큼 화운이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아침나절 느꼈던 좋지 않은 감정들이 전부 날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한의 마음은 곧바로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었다. 오 태감이 말하길, 연빈마마의 말을 전하는 아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으며 어찌 그리 울상이냐 묻는 오 태감의 물음에 저희 마마께서 아무래도 어딘가 좋지 않으신 것 같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잠시 안도하였던 이한의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어대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 이한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러한 것인지 오늘따라 서정궁은 평소와 다른 적막이 흐르는 것 같았다. 돌계단을 밟는 자신의 발소리조차 거슬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이한은 화운의 침실 앞에 섰다. 어두운 표정으로 인사를 올리는 아진을 지나쳐 열린 문 앞으로 들어서자 연화운이 저를 보고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말간 얼굴이 더없이 따사롭게 웃었다. 그것이 행복해 보인다기보다 어딘지 모르게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 같아서 이한은 외려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화운이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뺨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며, 정갈하고 단정한 몸짓은 그 무엇도 다를 것이 없는 연화운의 모습이건만 무엇 때문에 이토록 어렵고 복잡한 감정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한은 느린 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일어나라.”

황제의 두 손이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화운의 어깨를 감싸 일으켰다. 순순히 일어선 화운은 그대로 고개를 들어 드물게 이한의 눈동자를 곧이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어여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을 흔들리게 만들어서, 이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숙여 그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아주 조금 떨어진 채로 속삭이듯 이한이 말했다.

“이제 아프지는 않느냐.”

그리곤 화운이 ‘예, 폐하.’ 하고 대답하는 사이 이번에는 입가에 또 입술을 내렸다. 입술과 입술이 스치듯 닿자 이번에는 화운이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이려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느새 화운의 뺨을 감싼 이한의 커다란 손이 고개를 숙이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운이 눈을 한번 깜빡이기도 전에 그대로 입술이 맞물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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