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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52)화 (15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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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화운은 서천을 위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서천이 아는 순간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에 서천은 공범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일국의 황제를 기만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는 건 대역죄였다. 그런 짐을 서천에게 지워줄 수는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이후 다시 이야기하여도 좋다. 며칠 고민해 보겠느냐.”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터져 나오려는 울먹임을 참아내며 화운이 말을 이었다.

소정은 서천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말했으나 화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정에게는 여청이 삶에 다시없을 정인이었으나 서천에게 하운은 결코 그만한 의미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천은 내버려 두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를 자신을 구해준 것이리라. 그래서 화운은 서천이 제게 상을 받는 것도 크게 꺼리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소인은 따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참 만에 입을 연 서천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화운이 당황하여 눈을 조금 크게 뜨려니 서천이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묻고 싶은 것이라면…?”

“마마께서 정녕 소인에게 상을 내려주고 싶으시다면 부디 소인의 물음에 답을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서천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화운이 마른침을 삼켰다. 화운은 소매 안에서 주먹을 꽉 쥐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말해 보아라.”

“마마. 혹시… 혹시 하운이라는 이를 아십니까.”

순간 숨이 콱 막혀왔다. 자신의 죽음을 전해 들었던 그날 이후, 그 이름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세상에서 아예 사라진 것만 같았던 이름을 갑자기 듣게 되자 견딜 수 없이 서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화운은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서천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자신의 상태를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운… 하운이라면….”

“이전에, 연못에 빠진 연빈마마를 구하고 죽은 시위의 이름입니다.”

애써 담담하게 말을 꺼내면서도 서천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두 주먹을 쥐고 있었다.

하운의 죽음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모두 그저 연화운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악귀 같던 그 사람이 얼마나 다정하고 곱게 바뀌었는지를 얘기하기 바빴을 뿐이지 어느 누구 하나 그 이면에 더없이 선하고 고운 사람의 죽음이 있었음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제 와, 서천은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에 하운이 살아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만약에라도 다른 생을 빌어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 이름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음에 서글프지는 않았을까.

“그래. 들은 적이…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구나.”

“그저 들어보기만 하신 겁니까.”

“…….”

이어진 물음이 제법 날카로워 화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서천의 질문에 담긴 속뜻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천천히 몸을 움직인 서천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화운의 앞에 펼쳐 놓았다.

“아……!”

화운이 순간 탄성을 내뱉었다. 서천이 제 앞에 내놓은 것은, 오래전 하운이 서천의 손에 난 상처를 감싸기 위해 주었던 손수건이었다.

“이것을 어찌… 아니, 왜… 아니… 이게 뭐… 무엇인데….”

화운의 말이 어지럽게 엉켰다. 서천은 거기에 앉아서 화운의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예리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지난밤 서천은 아주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떠올릴 수 없는,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이었다. 자신을 볼 때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하며 동요했던 화운의 모습과, 서천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성품 그대로 믿기 어려울 만큼 단시간에 변한 연빈과, 물에 빠진 그를 끌어냈을 때 지나치게 자연스럽고 애틋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한데 엉켜 자꾸만 서천을 믿기 힘든 짐작을 하게끔 이끌었다.

“이 손수건을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처음, 처음 보는 것이다.”

“허면 저는 어떠십니까.”

서천은 화운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니, 그건 마치 화운 스스로가 막다른 골목으로 스스로 달려가는 꼴과 같았다. 몰랐다면 별것도 아닌 물음을 두고. 손수건이고 천한 시위 한 명 따위고 모른다고 하면 그만일 질문을 두고도 화운은 연신 숨을 헐떡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전에 저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의 이름은 어찌 아셨습니까.”

“나는… 그게 아니라….”

“연빈마마.”

연빈마마. 어느덧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화운을 바라보며 서천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그를 불렀다. 정작 부르고 싶은 이름 하나를 마음에 품고서. 제발 달리 대답해 주길 바라는 어느 마음을 꾹꾹 내리누르고선.

“하운을… 저를… 정녕 모르십니까.”

그것은 서천의 애원이었다. 다만 제가 미친 것이 아니라, 이토록 드넓은 세상에 어떠한 기적이 벌어진 것임을 바라는 절박함이었다. 서천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 바닥으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하운을 잃은 뒤 매일 밤 기도하였던,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소원이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다른 형태로 여기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간절함과 기대감의 애매한 경계에 서서 서천은 화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화운은 소리치고 싶었다. 오랫동안 홀로 참고 참았던, 감추고 또 감추며 속으로 내도록 그 자신을 채찍질하게 만들었던 비밀을 마침내 입 밖으로 토해내고 싶었다. 서천이 알고 있다. 자신이 연화운이 아닌 하운임을 서천은 짐작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운은 굳이 그것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황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비밀을 짐작하고 있는 이가 나타났다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나는……!”

하지만 화운은 마지막 말 한 마디를 끝끝내 내뱉지 못하고 자꾸만 말을 멈추었다. 말을 하려고 하면. 제 입으로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려 하면. 그러면 자꾸만 이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래도 너를 은애하고 있다고, 인정하기 쉽지 않았을 감정을 끝끝내 받아들여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심을 화운에게 내어준 그분의 상처받은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그래서 화운은 차마 여기에서 서천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자신의 입으로 이 모든 진실을 고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 처음은 반드시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화운은 생각했다.

정인이었으니까. 화운의 연심을 가진 유일한 분이었으니까. 비록 거짓으로 그분의 마음을 얻었다고 하여도 그분을 연모하는 자신의 마음만큼은 진심이니까. 그러니까 화운은 이 일을 마땅히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사람도 이한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덜덜 떨리는 턱을 타고 화운의 눈물 역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화운이 마침내 미안함을 가득 안은 채 서천에게 나는 하운이라는 자도, 너도 알지 못한다고 그리 말을 하려고 했을 때.

그때 먼저 입을 연 건 서천이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연빈마마. 대답하지 마십시오.”

“…….”

“제가 이미 해답을 찾았으니… 마마께서는 부디 억지로 답을 내주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때로는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전해지는 말들이 있었다. 비록 화운은 서천의 말을 그 무엇도 긍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머뭇거림에서, 눈물에서, 괴로워 토해내는 모든 숨에서, 서천은 이미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의복을 단정히 하고, 젖은 얼굴을 소매로 모조리 닦아 얼굴을 정돈했다. 그리고 서천은 아주 천천히, 눈앞의 사내에게 절을 올렸다.

“저는 연빈마마를 모시는 자로 마마를 목숨 바쳐 지켜야 하는 시위입니다.”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무엇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밤이 있었다. 하운, 그를 다시 살려낼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단지 자신이 미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의혹에도 불구하고 서천은 지금 이 순간 기쁨으로 벅차오르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마마….”

“…….”

“마마께서 원하실 때, 원하는 자리에, 원하는 사람으로.”

슬프고, 외롭고, 분하고 억울했으며, 혼란하기만 하였던 모든 날들을 지나 지금 여기에서 서천은 생각했다. 그는 이미 생을 건너 황제의 후궁이 되었고, 자신이 다시 하운의 이름 옆에 친우로 서는 일은 영영 불가하겠으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태 홀로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지고 왔을 게 뻔한 이에게 서천은 다만 작은 위안이라도 되고 싶다고.

살아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하였으니,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황제의 사내가 되었든 아니든, 서천은 여기에서 못 다한 친우로서의 몫을 다해야 했다.

“마마. 제가 바로 곁에 있어드릴 것이옵니다.”

서천의 이마가 천천히 바닥에 닿았다. 영영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이, 여름의 복판이 되어서야 서천에게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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