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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은 연빈을 죽여 여청의 혼을 달래고 싶었으나 그것은 이미 그른 일이 되어버렸다. 하여 소정은 이제 가망이 없어진 일인 줄을 알지만 정말 연빈이 변하였다면. 거짓이 아니라 정말로 변한 것이라면. 정안궁에서 보냈던 짧은 시간 동안에도 몇 번이나 소정을 고민하게 하였고 망설이게 만들기도 하였던 그 성품이 진실한 것이라면. 부디 가여운 여청의 영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닫아놓은 창문 틈으로 바람이 불었다. 그때까지도 조용히 소정의 말을 듣고 있던 화운의 뺨에도 눈물이 흘러 화운은 서둘러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지금 이 순간 소정 앞에서 자신이 우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물에 빠지고 난 뒤 정신을 잃고 차리기를 반복하며 화운은 많은 것을 보았다. 어느 때는 황제의 다정한 얼굴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기도 했고, 어느 때에는 연화운이 분하고 억울한 울음을 토해내며 피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빛을 두르고 서서 화운에게 네가 누구든 나는 너를 은애한다고 말을 하였다가도, 어둠의 한복판에 서서 어찌 네가 감히 나를 이리 속일 수가 있느냐고 화를 내며 돌아서기도 했다. 아진이 그게 무엇이든 함께해 드리겠다고 말했고, 서천이 정녕 네가 하운이냐고, 허면 어째서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것이냐 묻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신을 차려 눈을 떴을 때.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듯 상한 얼굴로 곁을 지키고 있던 황제의 잠든 얼굴을 보았을 때. 그때 화운은 깨달았다.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이 죄책감으로부터 자신은 영영 도망칠 수 없을 것이라고. 지난날 꾸었던 꿈처럼 이 모든 것을 응당 제게 허락된 것으로 여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연화운으로서의 행복을 취하고 사는 날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순간에 화운은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알면서도 외면했다. 모르는 척을 했다. 어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앞세워 도망치기 바빴다.
사실은 잃기 싫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분의 온기를 받는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머나먼 길을 돌고 돌아 겨우 얻은, 죽어도 다시 얻지 못할 이 기회를 버리는 것이 슬퍼서. 아쉬워서. 그래서 화운은 질긴 악몽과 싸우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안 될 일이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차라리 폐하께서 진심을 주지 않으셨다면. 차라리 이런 연모의 감정 같은 것 알지 못했다면. 그랬다면 조금 더 뻔뻔하게 머물 수도 있었겠으나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져야 할 황제 폐하의 진심을 품에 안고도 모르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버림받더라도. 지금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다만 그분을 연모하는 이유로 화운은 오로지 그분의 앞에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화운은 이제 헛되게 꾸었던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 사내는 자신이 다른 이의 목숨을 대신 차지하여 얻었던 힘을 마지막으로 조금이라도 바른 곳에 쓰일 수 있도록 하는 이일 것이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화운이 입을 열었다.
“비록 물에 빠진 것은 내 실수였으나.”
엎드린 소정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서천 역시 눈을 크게 뜬 채로 화운을 바라보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화운이 말했다.
“소정은 수령태감으로 주인을 보필해야 하는 임무를 다하지 못한 죄를 물어 정안궁에서 내보내도록 한다. 단,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간 최선을 다한 공을 보아 더 이상의 죄를 묻지는 아니하겠다.”
“마, 마마…!”
놀란 서천이 다급하게 화운을 불렀으나 화운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소정이 고개를 들자 화운은 소정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나는 그 아이가 기억나지 않아. 설령 기억한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그런다고 그가 되살아나는 것도 아닌 것을….”
“…….”
“다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당장 그 아이의 시신을 찾아 안식하게 할 수 있도록 명을 내리마. 찾는다면 할 수 있는 한 가장 귀하게 수습해줄 것이다.”
“흑… 흐윽…….”
결국 소정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춥디추운 겨울을 지나왔다. 여청의 혼이 그 긴긴 겨울 동안 차디찬 길을 떠돌았을 것을 생각하면 소정은 차라리 온몸이 다 찢어지는 것을 견디는 게 나을 만큼 끔찍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니 연빈에게. 이 모든 고통의 시작이었던 눈앞의 사람에게 이것을 감사해야 하는지 무언지. 소정의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대신 너는 살거라. 행여나 그 아이를 따라간다는 말을 앞세워 아마도 네가 잘 살아가길 바라고 있을 그 아이를 더 다치게 하지는 말아.”
화운은 그저 하운으로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헌데 만약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거나, 그 스스로 죽기를 결심했다면 영혼이 전부 산화하여 사라질 때까지도 슬퍼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하물며 정인이 아니었나. 화운은 여청 또한 분명 소정이 그리 허무하게 목숨을 버리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제는 바닥에 엎드린 채 소리 내어 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소정을 바라보며 화운은 애써 담담하게 말을 끝냈다.
“허면 내 말을 알아들은 것으로 알고… 이만 물러가거라.”
말을 마친 화운은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마음이 지치고 고단하였으나 그가 정리하여야 하는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폐하.”
오 태감의 부름에 이한은 번뜩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을 차렸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시선을 내리니 어새를 찍다 말고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이 보였다. 이한은 오전 내내 이런 상태였다.
아침에 보았던, 어딘지 모르게 낯설기만 하던 연화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손에 잡으면 안개처럼 사라질 것만 같던 모습이. 억만 리 너머의 어딘가에 떨어진 것처럼 멀어 보이기만 하던 그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천년 묵은 여우 요괴에게 홀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살면서 국정에 이토록 집중하지 못한 날이 없던 이한은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쓰고 또 썼지만 스스로 인식도 하지 못한 사이 다시 연화운으로 인한 불안함에 깊은 상념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잠시 쉬시는 건 어떠할는지요.”
보다 못한 오 태감이 황제를 향해 조심스럽게 권했다. 어떻게 보아도 지금의 황제는 온전히 정무에 몰두하기 어려워 보였다.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황제의 태도는 오 태감에게도 심히 낯설었다. 이럴 땐 산책이라도 권하여 주의를 환기하시도록 해야 하는지, 아니면 차라리 서정궁으로 모셔 마음에 꼬인 매듭을 풀고 오시게 하여야 하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이한이 오 태감의 첫 주군은 아니었으나 동시에 성이한이라는 황제는 오 태감에게도 처음이었다. 황궁이 모든 이들이 매순간 치열하게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듯 오 태감 역시 매번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황제에게 가장 좋은 길이 될 것인가를 어렵게 더듬어 배워나가는 중이었다.
이한은 들고 있는 어새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연화운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가까스로 인정했을 때, 이한은 그것이 모든 어려움의 끝이 될 줄 알았다. 그는 황제였으니까. 어느 누구도 감히 어심을 거부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한은 늘 외면하고 부정하였던 제 마음을 스스로 인정하기만 하면 연화운과 따스한 봄날들을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다 무언가. 이런 감정이 다 무어란 말인가. 연정이란 본디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하며, 두려운 감정들과 매순간 싸워야 하는 것이었나. 이한은 모든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어려웠다.
“뭐가 좋다는 것이냐.”
한참 얼굴을 묻고 있던 이한이 불쑥 말했다. 연약한 목소리였다. 그저 넋두리를 하고 싶은 것임을 짐작한 오 태감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한이 말을 이었다.
“사랑이 도대체 뭐가 좋다고들 그 난리였단 말이냐.”
“…….”
“별것도 아닌 걸로 마음이 번잡스럽기만 하고. 별게 다 신경 쓰이고, 불안하고, 일에는 집중도 못 하게 하니.”
그가 지은 사소한 표정 하나에도 마음이 허물어지고, 혼미한 정신으로 중얼거린 한 마디 말에도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픈 것을. 이러한 것을.
“역시 내 생각이 하나 틀린 게 없질 않았느냐.”
황제에게 사랑이란 불필요했다.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국사를 돌보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경험에 의한 판단이었다.
“…….”
오 태감의 침묵 속에, 황제의 한숨이 내려앉았다.
알면서도. 그걸 알면서도 벗어나기엔 이미 늦어버린 마음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토록 불만스레 투덜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연화운을 마주하고, 그의 선하고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싶은 마음뿐이어서.
사랑은 정말로 하나도, 하나도 좋지 않았다.
소정이 물러간 자리에, 이제 화운은 서천과 독대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 앉은 서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요동치는 복잡한 마음을 겨우겨우 내리누르며 화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덕에… 내가 목숨을 구했다. 무엇으로 보상해도 목숨을 빚진 것을 다 갚을 순 없겠으나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아라.”
애를 쓴 보람도 없이 목소리 끝이 자꾸만 떨렸다. 오랫동안 지쳐온 마음들이 자꾸만 튀어나오려 해 참아내는 것이 힘들었다.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 내가 하운이라고. 짧은 시간이었으나 너와 친우의 정을 나누기도 하였던 그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오로지 감추기에 급급하였던 사실을 털어놓은 채 목 놓아 울어버리고만 싶은 마음을 견디기가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