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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라 고개를 돌린 건 서천이었다. 직접 모함을 당한 입장이었으니 서천 역시 소정을 의심하기는 하였으나 화운이 직접, 그것도 이렇게 확신에 가득 차 물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알고 있었다면 당장 끌어내 목을 쳐야 할 대죄였다. 그런데 소정이 자신을 죽이려 들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날 그를 비호하고 금족령만 내렸을 뿐 지금껏 멀쩡하게 내버려 두었다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서천의 혼란은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듯, 화운은 오로지 소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이미 알고 계셨군요, 마마.”
소정은 제 무릎 위에 구겨진 옷자락을 한번 느긋한 몸짓으로 정리하며 말했다. 이미 이 순간을 예상하고 있던 것 같은 태도였다. 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은 어둡고 네 움직임은 재빨랐으나 운이 좋게도 나를 민 자가 내관의 옷을 입고 있던 것을 볼 수가 있었지. 나머지는 짐작이었으나 역시 네가 맞았구나.”
“예, 마마. 그날 마마께서 그곳에서 명을 다하실 거라 생각해 제가 부주의하였군요.”
“그, 그 입을 조심하거라.”
서천이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알량한 시위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연화운을 신경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서천. 괜찮아.”
하지만 화운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평온한 목소리로 서천은 말렸다. 서천, 하고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가까이 지내온 친우를 부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따스했다. 심장이 콱 메이는 아픔에 서천은 숨을 들이켰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런 일은 벌어질 수가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끝없이 밀어내었던 생각들이 또다시 폭풍이 되어 머릿속을 헤집었다.
화운은 다시 소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대답해 주겠느냐. 나를 만난 적도 없다면서… 어째서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인지.”
“…마마. 여청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여청….”
“물론 기억하지 못하시겠지요. 기억을 잃으셨다 하셨으니까요. 그 아이는 지금도 구천을 떠돌며 서러워하고 있을 터인데 그런 아이가 있었던 것조차 잊으셨으니 마마께서는 밤이 아주 편안하셨겠습니다.”
화운은 소정이 말한 이름을 몇 번이나 혀끝에서 굴려 보았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지금의 화운의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린 소정이 말을 이었다.
“허면 제가 알려드리지요. 연빈마마. 여청은 정안궁에서 마마를 모시던 궁녀였습니다.”
“…….”
“그리고 그는 저와… 저와는…….”
문득 목이 메어와, 소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화운은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황궁의 여인은 곧 황제의 여인들이었다. 승은을 입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었다. 말단의 궁녀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황제가 원하면 언제든 침전에 들 수 있었으니 법도에 따르면 어떠한 사내도 알아서는 아니 되었다.
황궁의 내관들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사내가 아니었다. 그들이 후궁전에 머물며 후궁들을 모실 수 있는 건 사내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일이 곧 정해진 법도대로 흘러가지는 않듯이 황궁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궁녀의 대부분은 승은을 입기는커녕 용안도 한번 제대로 뵙지 못한 채 지내는 것이 다반사였고, 내관은 저와 평생을 함께할 가족조차도 만들 수 없는 외로움에 사무치는 밤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이토록 황량하고도 기나긴 황궁 생활 속에서 그들이 서로 마음이 통하여 서로를 의지하게 되는 건 어쩌면 법도보다 자연스러운 이치인지도 몰랐다.
하여 황궁에서는 암암리에 궁녀와 내관이 서로 눈이 맞는 일이 있었다. 규율로 따지자면 중죄였으나 대놓고 들키지만 않는다면 윗사람 또한 그들의 외로움을 안타까이 여겨 모르는 척 눈감아 주곤 했다.
소정과 그 여청이라는 궁녀 역시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던 사이였음을, 화운은 소정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절절함으로 쉬이 짐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연화운이었다면. 과거의 그였다면 그런 일을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화운이 막 했을 때, 숨을 크게 한번 내쉬어 북받쳐 오른 감정을 정리한 소정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그 아이에게 눈길을 주셨다는 이유로 저 밖에 그 아이를 묶어두고 온몸이 다 터져나가도록 매질을 하셨지요.”
“아….”
“폐하께서 친히 그 아이를 보지도 않았고, 아무런 관심도 없다 말씀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마마께서는 그 아이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화운이 눈을 질끈 감았다. 소정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과거의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짐작을 하긴 했지만 막상 그 이야기를 직접 듣고 있자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기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소정이 말했다.
“여청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신형사로 끌려갔고,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더러운 짚더미 위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마마, 그 아이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
“온몸이 성한 곳이 없어 차마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하더이다. 헌데 그조차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소식을 듣고 갔을 때는 시신마저 이미 내다버려 수습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차마 듣기가 힘들어 두 주먹을 꽉 쥔 건 서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서천은 하운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과 피에 젖어 차갑게 식은 채로 돌아왔던 하운의 마지막을. 만약 하운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해 그가 아무 곳에나 내다버려진 걸 뒤늦게 알았다면 서천 역시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늘이 있다면 벌을 내리실 거라 여겼습니다. 그리 많은 피를 손에 묻히셨으니 절대로 편안하게 살다 가실 수는 없을 거라고. 그러니 죽지 않고 버텨 연빈마마의 비참한 최후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후 그 애를 따라가 내가 본 것을 빠짐없이 일러 주리라 생각하며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사내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여 무시받기 일쑤인 소정을 여청은 늘 다정하고 애틋하게 대해 주었다. 낯을 많이 가리고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성정에 힘들어하는 소정에게 여청은 유일한 쉼터였고, 의지였으며, 목숨을 걸고서라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래서는 아니 되는 일이 아닙니까. 마마. 마마께서는 기억을 잃으셔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마마의 손에 죽어간 그 수많은 아이들을 잊으셔서는 아니 되지요. 어찌 마마께서 이리도 다정하고 자애로우신 분이 되실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감히 마마께서 어떻게!”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소정은 온몸의 피를 전부 다 게워내 연빈의 얼굴과 손에 바르고 싶었다. 그가 자신이 죽였던 모든 이들의 원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억하길 원했다.
“어떻게 마마께서 이리 새 사람이 되어 폐하의 총애를 얻고 승승장구하십니까. 마마, 정녕 하늘이 있다면 이래서는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나는… 나는…….”
“마마를 칭송하는 말들이 황궁 안을 채워가는 걸 들으며, 제가 매일 얼마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견뎠을지… 짐작이나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연빈마마.”
연빈이 얻을 수 가장 큰 고통은 오로지 황제 폐하만이 내릴 수가 있을 테니 소정은 그렇게라도 연빈이 벌을 받길 바랐다. 황제의 외면 속에서 철저하게 방치당하다가 모두의 증오와 미움만을 받는, 그런 후궁으로 비참하게 늙어가길 간절하게 원했다. 하지만 이제 연빈은 다른 사람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황제는 그를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 총애하니.
소정이 어찌 제 손으로 복수를 해내지 않을 수가 있었겠느냔 말이다.
정안궁의 수령태감이 된 후 소정이라고 마음의 번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정안궁 궁인들의 행복한 얼굴을 볼 때마다. 어느 말단 궁인에게도 말 한 마디 막 하는 법이 없는 연빈을 마주할 때마다. 제가 들었던 이야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기억을 모두 잃고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그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경험할 때마다 소정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밤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꿈에 찾아와 눈물을 쏟던 여청을 소정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소정은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젖은 뺨 위로 연신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여청의 원통함을 다 풀어주지 못한 죄인은 이제 변명할 말이 없었다.
“운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재밌습니다. 그런 마마를 구한 것이… 저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사람을 마마 때문에 잃은 시위, 서천이라는 것이.”
소정의 말에 서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겉으로 보기엔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서천은 그 누구보다 소정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서천 역시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연빈의 명성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정안궁으로 자처하여 오질 않았나. 직접 마주하였던 연빈에게서 느낀 미묘한 익숙함이 아니었다면, 서천 역시 이후에 어떤 선택을 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고자 하였던 말을 마친 것 같은 소정은 입가에 서글픈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연빈마마. 마마께서 이제는 달라졌다고 하시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비록 제가 무도한 죄인이나 부디 간청드리옵니다. 저는 어떻게 죽이셔도 좋으니, 어딘가에 버려진 여청의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게… 그 불쌍한… 불쌍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편안히 쉴 수 있게….”
말을 이어가는 중간 중간 서러운 울먹임이 툭, 툭, 터져 나왔다. 이윽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어 허리를 깊이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소정이 애원했다.
“연빈마마…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여청의 시신을 찾아 묻어주기라도 해주십시오…. 이렇게…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