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혹시라도. 혹시라도 그대로 이 사람을 잃으면 어쩌나. 무릎을 꿇고 황제의 신을 신겨주는 화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한은 심장이 옥죄어오는 고통을 느꼈다. 이토록 애틋한 사람을. 생애 처음으로 품에 안게 된, 절대로 다시없을 이런 사람을 섣부른 물음 하나에 잃어버리면 어찌하나. 상상만으로도 이토록 견디기 힘든 고통이 느껴지건만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불현듯, 사랑 하나 때문에 평생토록 불행하였던 어느 여인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이에게 더 미움받기라도 할까 불만 한번 말하지 못하고, 그의 총애를 받고 있던 여인에게 큰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주눅 들기만 하였던 그러한 여인이.
그도 지금의 자신처럼 불안하고 초조했을까. 그래서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피고름이 흘러도 그렇게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하였던 걸까.
“운아.”
어느덧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익숙해진 호칭으로, 이한이 그를 불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한을 마주하는 화운의 눈동자는 평소와 같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이한은 그것이 그의 슬픔인지, 아니면 그를 보는 자신의 슬픔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괜찮은 것이 맞느냐.”
“…….”
“정말로… 괜찮으냐.”
정말 묻고 싶은 말들은 가슴에 묻어두니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전부 그런 것뿐이었다.
너의 마음은, 내가 이미 받았다고 생각하였던 너의 진심은, 그 모든 것은 정말로, 정말로 괜찮은 것이냐.
하지 못한 말을 삼킨 이한의 입술이 애타게 달싹거렸다. 간밤 그토록 서럽게 울던 이가 지금은 이토록 담담하게 구니 오히려 마음이 더더욱 불안했다. 잠시 말없이 이한의 눈을 마주하던 화운이 이내 웃었다.
“괜찮을 것입니다, 폐하.”
이한의 눈에는 그 웃음이 꼭 울음처럼 보였다. 이한은 어쩌면 그 자신의 마음이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 전부 괜찮아질 것입니다.”
그 말 역시 이한의 귀에는 하나도 괜찮지 않은 것처럼 들렸으나 이전엔 미처 알지 못했던 두려움이 너무나도 많아서, 이한은 끝끝내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마마….”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는 것인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창밖을 바라보기만 하는 주인이 이상하게도 자꾸만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아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큰일을 겪었으니 화운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그의 모습이 자꾸만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아 이유도 없이 자꾸만 겁이 났다. 아진의 눈에 비친 화운은 꼭 안개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아진의 부름에 화운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주기까지 하였는데 그 얼굴까지도 꼭 무언가를 체념한 사람처럼 보여 아진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 그때, 화운이 말했다.
“아진.”
“예, 마마!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면…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아진은 부러 목소리를 높여 활달하게 대답했다. 고개를 가만히 저은 화운이 말을 이었다.
“아니. 그보다… 그냥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러니까… 내가 기억을 잃고 정말 혈혈단신이 된 것처럼 막막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진 네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저 나를 믿어주었고, 도와주었고, 지켜주었지.”
이어지는 화운의 말에도 아진은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지금 들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한 말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운은 계속 말했다.
“아진 네가 없었으면 정말로… 나는 정말로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거야.”
“마, 마마… 갑자기… 갑자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네?”
칭찬을 듣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 아진은 마치 화운의 말을 막듯 대답했다. 깨어난 뒤로 줄곧 가라앉아 계셨던 것도 그렇고, 지금 이렇게 갑작스러운 말씀을 하시는 것도 그렇고. 아진에게는 이것들이 전부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그의 주인은 지금 이 황궁에서 가장 큰 총애를 얻고 있는 후궁이시고, 앞으로는 그간의 고생을 전부 보상받을 꽃길만이 펼쳐질 게 분명한데. 비록 안 좋은 일을 겪기는 하였으나 어쨌든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기셨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냥… 말하고 싶었어. 네게는 몇 번을 고맙다고 말해도 부족하니까.”
“저야말로… 마마. 저야말로 마마께 구원을 받은 사람인 것을요. 제가 마마께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제가 해드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비록 지난날 연화운이 아진의 매일을 지옥으로 만든 장본인이긴 하였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주인은. 한번 기억을 잃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지금의 연화운은 분명히 아진의 은인이고 목숨을 바쳐 충성하고픈 사람이었다. 비록 고생한 날들에 비해 지금 같은 나날들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짧았으나 그 시간 동안 아진이 받았던 대우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귀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진의 말에 화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진은 화운이 어째서 고개를 가로젓는 것인지 그 연유를 묻고 싶었으나 그보다 조금 더 빨리 화운이 말했다.
“…아진. 가서 서천과 소정을 불러와 줄래?”
“지금이요…?”
“응. 그리고 주위를 모두 물려줘.”
“……혼자 계시는 건 안 돼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 저라도 남게 해주세요.”
아진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아진 역시 화운이 스스로 발을 잘못 디뎌 빠졌다고 한 것을 듣긴 했지만 서천이 누구의 친우인지 알게 되었고, 폐하께서 소정에게까지 금족령을 내리신 것을 보면 그 역시 완전히 믿을 만한 자는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마마께서 그런 이들을 홀로 마주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정말 괜찮으니까… 내가 말한 대로 해줘, 아진. 부탁할게.”
“마마….”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는 화운은 한 번 더 설득하고 싶어 하는 아진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이 꼭 너무나도 엄청난 결심을 한 사람의 그것처럼 결연해 보이기까지 해서, 결국 아진은 명을 받들어 알겠다 고개를 숙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화운은 제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서천과 소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둘 다 일어나라 하였을 테지만 화운은 그저 말없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로지 세 사람만 남은 내실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땅바닥만 보며 굳은 얼굴을 하였고 서천은, 서천은 고개를 들어 화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서천이 참고 있는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천은 화운을 향해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언제부터 알았는지,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그토록 익숙하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애틋하게 부른 건지. 너무나도 많은 의문에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연빈, 연화운은 그와는 비교도 안 되게 귀한 몸이었으니 서천은 감히 먼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어 물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화운이 말했다.
“서천.”
“…예, 마마.”
이름이 불리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심장이 날뛰었다. 저도 모르게 가빠지는 숨을 진정시키려는데, 화운이 말을 이었다.
“그날… 나를 구해 주어서 고맙구나.”
말이 끝나자마자 서천과 소정, 두 사람의 시선이 모두 화운에게 향했다. 화운은 아주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이해한 사람처럼 자애로운 얼굴이었다. 그때까지 단단하기만 하던 소정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격렬하게 흔들리다가 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소정은 다시 고개를 숙여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으나 서천은 떨리는 시선을 화운에게서 거두지 못했다. 화운의 말했다.
“나를 구하느라 애쓴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나를 해치지 않은 것을 내가 증명할 터이니 폐하께서도 다시 너를 탓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말거라.”
그제야 서천은 정작 자신은 그런 것들은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 폐하께서 연빈을 해친 죄목을 들어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건만 지난 며칠의 낮과 밤 동안 서천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목 끝까지 차오른 물음들을 어떻게 꺼내 놓아야 할지 몰라 서천이 입술만 떨고 있는 사이, 화운이 이번에는 소정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표정과 몸짓으로 앉아 있는 그는 화운이 무슨 말을 꺼낼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화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정.”
“예, 마마. 하문하시지요.”
“내가 기억을 잃기 전, 나를 만난 적이 있었느냐?”
소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가까이에서 마마를 직접 뵌 것은 정안궁 수령태감이 되어 인사를 드렸던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허면….”
아주 짧게 깊은 내쉬고, 화운이 말했다.
“허면 어째서 나를 죽이려 하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