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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48)화 (148/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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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을 두고 황궁에서는 폐하께서 처음으로 드러내시는 이 엄청난 총애가 내명부에 다른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었지만, 황후궁을 비롯해 다른 후궁전에서는 서정궁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쾌유를 바라는 선물을 보내 헛된 소문을 일축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정빈이 매일 서정궁으로 병문안을 가지 못해 발을 구르며 폐하께서는 언제 중천전으로 돌아가시냐 연일 묻고 있다는 아주 이상한 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오찬을 마치고 서정궁의 뜰을 잠시 걷다 들어온 이한이 습관처럼 화운의 침대에 걸터앉아 여전히 파리한 혈색의 화운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어찌나 서럽고 처량한지 태평성대를 이끌고 있는 일국의 황제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어제부터 화운은 이따금 정신을 차려 말을 하기도 하고, 먹고 씻고 조금씩 움직이는 등 확연한 차도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만 있는 그의 모습은 하염없이 이한의 애를 태웠다.

그럴 때면 이한은 가까스로 내리눌렀던 화가 샘솟는 것을 느꼈다. 화운이 스스로 제가 실수하여 연못에 빠졌다고 하니 우선은 내버려 두고 있지만 이한은 그 말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크게 실수를 하였거나, 아니면 정말 악의를 가지고 일을 벌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위해 일하는 모든 이들을 제 사람이라 여기는 연화운의 성품을 생각하면 화운이 범인을 감싸고 있다고 하여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폐하…?”

그때, 이한의 애타는 손길 때문인지 영영 눈을 뜨지 않을 것처럼 잠들어있던 화운이 눈을 떴다. 이한은 몸을 굽혀 다정하게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그래. 나다. 내가 여기에 있다.”

지난 며칠간 이한은 지금처럼 화운이 눈을 뜰 때마다 그의 곁에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그의 뺨을 어르며 언제나 화운의 목소리에 대답했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내가 여기에서 너를 지켜줄 것이라고. 다시는 네가 혼자 아프도록 놓아두지 않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듯 말이다.

“폐하…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간절한 이한의 마음은 도무지 가닿지가 않는 것인지. 간신히 정신을 차린 화운은 이한이 그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눈물을 쏟아내며 그런 말을 하여 이한의 마음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무엇이 이토록 죄스러운 것일까. 단지 지난날의 악행 때문이라고 하기엔 지나침이 있었다.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는 그가 아니던가. 이한 역시 이제는 그 일을 두고 너를 탓하지 않겠다고, 너를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라 여기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화운은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도 죄를 고할 정도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한이 그를 달래듯 속삭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죄송한 것이냐…. 너는 내게 세상을 주었다.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행복을 느끼도록 해주었어. 헌데 어찌 그런 말을 해. 응?”

이한은 연신 화운의 눈물을 닦아 주던 손을 거두고 이번에는 그의 눈가에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차가운 피부에 온기를 전해주듯, 이한의 뜨거운 입술이 젖은 눈가에 머물렀다가 뺨을 가볍게 스쳤다.

“제가 욕심을 내서는 아니 되었는데….”

“너는 나의 빈이고, 나의 유일한… 유일한 사람이야. 그러니 조금 더 욕심을 내어도 괜찮다. 황제인 내가 괜찮다고 하질 않느냐….”

“저 따위 것이 주제도 모르고… 천하디천한 제가 감히 폐하를….”

“…….”

“감히 폐하를 기만하고 능멸해서는 아니 되었는데….”

“…그게 무슨…?”

그때, 이한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생각지도 못하게 흘러나온 기만이나 능멸이라는 단어가 허물어진 마음에 칼날처럼 꽂혀왔다.

“폐하. 이런 저를 절대로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그 말을 끝으로 화운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이한은 여전히 그 상태로 멈춰 있었다. 무엇을 기만하고 능멸하였다는 말인가. 어째서 연화운은 이런 단어를 썼는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이니 그저 아픈 이가 잠시 한 헛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이한에게는 그 말들의 무게가 그토록 가볍지가 않았다.

눈물로 젖은 연화운의 뺨을 바라보는 이한의 눈동자에 그간 그와 겪어왔던 모든 일들이 실타래처럼 얽혀들기 시작했다. 그가 연못에 빠지고, 기억을 잃은 상태로 깨어나, 그 이후로 벌어졌던 그 모든 기적과도 같았던 일들. 그를 믿지 못하고 의심했던 자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숱한 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번뇌와 고통. 죄책감. 끝끝내 거부할 수 없던 해일 같은 그 모든 감정들.

“연화운….”

화운의 이름을 부르는 이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날들의 어느 순간에 연화운이 저를 기만할 일이 있었다는 말일까.

정말로 변한 것이라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거짓이 아니라면 화운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한은 저도 모르게 가지를 뻗어나가는 생각을 황급히 멈추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선은 화운이 몸을 추스르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다른 것은 그게 무엇이든, 차차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될 것이다.

이한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속절없이 요동치고 있었으나 그는 여전히 자신이 보았던 연화운의 그 눈동자를,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을 믿었으므로. 이한은 그날 밤이 다 가도록 오로지 그 하나에 매달려 자신을 다스리고 또 다스렸다.


“폐하, 일어나셨습니까.”

동이 틀 때가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였던 이한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리다가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 일어난 건지 이미 정갈하게 치장을 마친 화운이 침대 곁에 앉아 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벌써 일어났어. 이제 몸은 괜찮은 것이냐?”

이한은 다른 무엇보다 그것을 가장 먼저 물었다. 아니, 다른 문제들은 아예 생각도 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았다. 혼란스러운 생각 때문에 잠을 다 설쳤지만 지금 이 순간 이한에게 제일 중요한 건 화운의 몸 상태였다. 화운이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대답했다.

“예, 폐하. 폐하께서 돌봐주신 덕분에… 이제는 완전히 나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을 터인데… 좀 더 누워 있는 것이 좋겠다.”

“폐하.”

조금 몸이 나아졌다고 곧바로 무리를 하였다가 더 안 좋아지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이한이 화운을 다시 침대 위로 끌어오려 했으나 화운은 살짝 고개를 가로젓고는 조용히 황제를 불렀다. 단정한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거절할 수 없는 무거운 힘이 실려 있었다. 움직임을 멈춘 이한이 다시 쳐다보려니 화운이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제가… 폐하의 채비를 돕고 싶습니다.”

별다르게 특별한 말은 아니었다. 황제가 머문 곳의 후궁이 아침 조회에 나서는 황제의 채비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는 이한의 가슴 어느 한구석이 선득하게 내려앉은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떠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껄끄러움이 거기에 있었다. 확실히 무어라 꼬집어 말하기에는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 이질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알고 싶어 화운을 가만히 응시하며 이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득, 눈앞에 있는 화운이 멀게 느껴졌다. 연심은 응당 상대의 모든 것을 지극히 친밀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감정이거늘, 오늘 마주한 화운은 이상하게 아주 커다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만 보였다.

화운은 고요히 움직였다. 덧붙이는 말조차 없이 황제의 소세를 돕고 의관을 챙기는 모습에서 며칠 전 벌어진 소란의 흔적 같은 건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물에 빠진 일은 어떻게 된 것인지. 정말 그가 실수하여 빠진 것이 맞는지. 연루된 이들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 이한은 그것들을 모조리 묻고 싶었다. 아니. 아니다. 사실 정말로 궁금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이한은 지난밤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때에 연화운이 했던 말에 대해 알고 싶었다. 어찌 그리 나에게 죄스러워했는지. 어째서 나를 기만하고 능멸하였다고,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이한은 그의 어깨를 붙들고 캐묻고 싶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걸어온 길의 어느 곳에 정말로 그가 자신을 속였던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동시에 이한은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척을 하고 싶었다. 그저 그가 아팠기 때문에 악몽 속에 혼란스러워 사실과 다른 이상한 소리를 한 것이라 치부하고 이 일을 그냥 넘기고 싶었다. 화운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자신 역시 그 일이 없던 척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 겁이 났다. 이한이 진심이라 믿고 소중하게 손에 쥐었던 마음이 행여나 거짓일까 봐. 이제 와 연화운의 마음은 전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할까 봐. 그리하여 이날이 불현듯 자신의 마음이 버림받은 듯 홀로 남게 될까 봐. 이한은 화운의 손이 관을 올려주고 패옥을 마무리하여 달 때까지도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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