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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마. 그러니 걱정 말고 우선은 몸을 돌보아라. 네가 나아질 때까지 저들은 따로 기다리게 할 터이니.”
그제야 간신히 뜨고 있던 눈을 힘없이 감으며 화운이 입을 달싹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거의 들리지도 않는 그 목소리가 애달파, 이한은 기어코 아주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깨닫고 말았다. 이 세상에서, 오로지 이 연약한 사내 하나만이 이토록 자신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한은 마치 하늘의 예언을 받듯 강렬한 미래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도 줄 수 없는 아픔을 오로지 연화운, 이 한 사람만이 자신에게 줄 수가 있음을. 그리하여 대 안국의 황제 성이한은 앞으로도 영영, 눈앞의 이 자그마한 사내에게 몇 번이나 지고 또 질 수밖에 없음을 이한은 그 밤이 다 가도록 가슴에 사무치도록 깨달아야만 했다.
서천은 아무도 없는 작은 방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모함을 받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 더없이 불리한 천한 신분이었으며, 자칫 잘못하면 황제의 후궁을 살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우선 연빈이 실수로 연못에 빠졌다 밝힌 덕분에 당장의 위험은 넘겼지만 이후 연빈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과연 황제께서 이대로 연빈의 말만 듣고 이 사건을 넘기실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서천의 목숨은 여전히 바람 앞의 등불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서천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은 그런 게 아니었다. 연빈이 부를 때까지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한 공간에서 서천은 오로지 연빈, 연화운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물에 빠진 연빈을 구해내던 그 순간을.
‘서천…!’
서천이 그를 겨우 물 밖으로 끌어내던 순간, 서천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분명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목소리를 들은 서천이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소정이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연빈을 밖으로 끌어내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서천을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놀랄 이유는 충분했다. 항상 궁 안에 머물며 시중을 드는 이들도 아니고 일개 시위의 이름을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는 후궁은 온 황궁을 다 뒤져도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보통의 시위도 아닌, 천민 출신인 시위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건 분명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보다 서천의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 건 연빈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순간 제 귓가에 들려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너무나 익숙하게 들어본 적이 있는 음성인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듣고,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잃어버린 후에도 매일 밤 계속 곱씹어 그리워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바로 그 목소리. 다시 한 번만 들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연빈의 목소리는 분명 하운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서천!’
눈을 감자 지난 기억 속에서 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이름을 불러주던 친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잊을 리가 없다. 헷갈릴 수도 없었다. 하운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악독한 후궁의 것과는 절대로 혼동할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
서천의 두 손이 젖은 옷자락을 꽉 쥐었다. 하운이 죽은 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한 연화운. 하운이 그러했듯이 다정하고, 상냥하며, 온화하게 모든 사람을 대하여 이제는 황제는 물론이고 황후와 후궁들의 마음까지도 모조리 돌려낸 사람. 손을 다친 궁녀에게 자신의 손수건을 직접 건네어 주고, 천민 출신의 정안궁 시위 하나하나를 마치 제 사람처럼 챙기던.
하운이 죽은 뒤 내도록 서천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연화운의 모습이 서천의 감은 눈앞에 엉망으로 떠올랐다가 일그러지길 반복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묻고 싶어도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서천은 홀로 하염없이 연빈이 저의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곱씹고 또 곱씹을 뿐이었다.
죽음을 앞에 둔 한 궁녀의 저주와 같은 말이 한 사람의 마음에 그토록 뿌리 깊게 자리 잡을 줄을 과연 그 누가 알았을까. 예상할 수 있었을까. 정작 그 말을 내뱉은 이는 과연, 짐작을 하고 있었을까.
‘너는 폐하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이다.’
연못의 가장자리를 맴돌며 연화운은 습관처럼 그 말을 읊조리고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악에 받친 천한 것의 발악이라 듣고 넘겼던 말이었다. 곧 죽을 것이 입만 살아 짖어대는구나, 그리 생각했다.
미리 알았다면. 그 말이 정말 저주라도 되는 듯 이토록 마음에 깊이 머물러 낮과 밤을 어지럽게 만들 줄을 알았더라면. 그러면 그 고얀 것을 그렇게 쉽게 죽도록 놓아주지는 않았을 텐데.
‘너는 그렇게 이름 없는 후궁이 되어 죽어갈 것이니….’
그가 쏟아낸 말들이 하나하나 도무지 잊히지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마치 누군가 정말로 곁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렇다고 연화운이 그 목소리를 겁내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설령 정말 죽은 궁녀의 혼이 원귀가 되어 제 곁을 맴돈다 하더라도 연화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화운이 두려운 건 그깟 귀신 따위가 아니었다.
황제가 정안궁을 찾지 않은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이제는 세어 보는 것조차 무의미해졌다. 이전에는 아버지의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씩은 꼬박꼬박 들르던 황제였으나 이제는 그조차도 하지 않기로 하신 건지 죽겠다, 아프다, 몇 번이나 안정전으로 사람을 보내도 황제는 정안궁으로 걸음을 하기는커녕 답조차 돌려보내지 않았다.
연화운은 시리도록 맑은 연못의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떤 여인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미색은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표독스럽고도 초라해 보였다. 믿을 것이라곤 이 미모와 집안뿐인데, 황제는 연화운의 미모 따위는 돌을 보듯 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나 몰라라 하니 연화운의 손에는 죄다 떨어진 끈뿐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어찌 될까. 천년만년 세상을 지배할 것 같던 권력도 역사 속에 결코 지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지금이야 그 이름이면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연씨 집안이지만 그 또한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테니 이대로 집안이 기울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이 화려한 냉궁에 영영 갇혀 살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 그런 것들은 다 괜찮았다. 황제에게 미움받고, 멸시받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화운이 정말로 견딜 수 없는 건 황제에게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잊히는 것이다. 그저 악독한 후궁 하나가 있었지, 하고 스쳐 지나가는 이름 없는 후궁이 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끔찍한 형벌이 될 것임을, 연화운은 어린 궁녀의 피투성이 저주를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럴 수는 없지….’
연화운은 생각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죽을 수는 없었다. 황제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면. 그분의 유일한 정인이 정말로 될 수가 없는 거라면. 그러면 연화운은 황제의 기억이라도 가지고 싶었다. 그분의 죄책감이 되고, 마음의 회한이 되며, 기억과 심장의 어느 한곳에 남아 지워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것은 꼭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황제는 다정한 분이셨다. 연화운이 몇 번이나 그분을 속이고 또 속여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연화운이 아프다고 하면 정안궁으로 달려와 혹시라도 이번에는 정말 몸이 아파 고생하고 있는 건 아닌가 들여다봐 주셨던 그런 분이셨다.
그러니 자신의 무관심 속에 절망을 거듭하며 누군가가 죽는다면. 끝끝내 삶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면.
어쩌면 그분의 마음에 죽는 날까지 깊은 죄책감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평생토록 황제의 밤을 괴롭게 만들어 연화운, 그 이름 석 자를 영영 잊지 못하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날, 연화운은 연못을 거닐고 있었다. 그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한은 모두를 물린 채 손수 화운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화운은 열이 끓었다가,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길 반복하며 사람의 애간장을 전부 녹였다. 태의는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괜찮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사경을 헤매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애달프게 폐하, 폐하, 오로지 그 이름만 신음처럼 흘리는 화운의 모습을 빠짐없이 보아온 이한은 당장이라도 그가 다시 숨이 넘어가지는 않을까 불안하여 좀처럼 곁을 떠나지 못했다.
모르긴 몰라도 연빈을 치료하던 지난 며칠간은 태의에게도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황제는 달리 태의를 겁박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분이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을 지극한 인내로 참고 계시다는 걸 모를 만큼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화운의 열을 잡았을 때 태의는 생전 찾지도 않던 천지신명을 속으로 다 찾았을 지경이었다.
그사이 황제는 아예 서정궁에 머물고 있었다. 대신들과 꼭 필요한 회의를 할 때를 제외하곤 자고 먹고 일하는 모든 것을 서정궁에서 처리했다. 화운이 누워 있는 침전에 아예 쉽게 정무를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따로 마련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성이한의 통치 아래에서는 결단코 없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