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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자문이 묻는 것을 보고만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자문은 엎드린 채로 발작을 하듯 어깨를 떨었다. 황제의 목소리는 결코 크거나 흥분한 듯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낮고 무거웠다. 그런데도 자문은 그의 목소리가 마치 벼락처럼 제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은 충격을 느꼈다. 더더욱 몸을 옹송그린 자문을 향해 황제가 물었다.
“저자가 들었다던 누군가가 물에 빠지는 소리를 너도 들었느냐.”
“아… 아니옵니다…. 소인은 그것까지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자문의 목소리는 거의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의 시선이 그런 자문을 지나쳐 다시 서천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고 있던 서천이 입을 열었다.
“폐하.”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여느냐!”
그와 동시에 오 태감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서천을 향해 소리쳤다. 일개 시위 따위가 감히 폐하의 허락도 없이 먼저 말을 꺼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한은 손을 들어 그런 오 태감을 막아섰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아라.”
이한은 결코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것이 만약 누군가의 잘못으로, 혹은 악의로 벌어진 일이라면 죄를 물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어느 황제는 아끼던 여인이 감기라도 걸려 앓으면 그를 모시는 모든 종들을 모조리 벌했다고 하였다. 이한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전에는 군주의 자격이 없다 여겼던 그 황제의 심경을 이해했다.
이한은 정말 필사적으로 참아내고 있었다. 정말로 죄를 지은 이가 있다면 그에게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풀릴 길이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니 누군가를 모함하여 죄를 피하는 이는 절대로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서천이 말을 이었다.
“그가 증명해 주었듯 소인은 연빈마마께서 물에 빠지는 일이 있기 전까지 자문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가장 의심스러운 이는 마지막까지 연민마마와 단둘이 함께 있었던 자가 아니겠습니까. 부디 소인의 억울함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때때로 서천은 연빈의 죽음을 상상하기도 했다. 하운의 복수를 꿈꾸던 날 또한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서천은 내도록 하운의 헛된 죽음이 억울했고, 하운의 목숨을 빌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연빈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허나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벌을 받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 서천에게는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서천은 살아서, 지금 침대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연빈, 연화운에게 반드시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하여 서천이 다시 한 번 아무 근거도 없이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는 소정에 대해 말을 꺼내려고 했을 때, 소정이 무릎으로 걸어 황제의 앞에 나섰다.
“무엇이냐.”
여전히 한겨울의 바람처럼 서늘한 음성으로 황제가 묻자 소정이 입을 열었다.
“폐하. 저자가 연빈마마를 죽이려 든 것이 분명하다는 증거가 있사옵니다.”
“…….”
“저자는… 연빈마마를 구하고 죽은 시위와 생전 가장 가깝게 지내던 자였습니다. 고아였던 죽은 시위의 시신을 챙긴 것도 저자였지요.”
생각지도 못했던 소정의 말에 침실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모조리 커졌다. 황제와 황후는 물론이고 서정궁의 궁인들까지 얼이 빠져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 바빴다. 허리를 똑바로 세워 바로 앉으며 이한이 말했다.
“그것이… 정말이냐?”
“예, 폐하. 소인도 얼마 전에야 우연히 알게 된 사실입니다. 게다가 저자는 원래 정안궁 소속이 아니었는데 연빈마마께서 쾌차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자처하여 정안궁으로 왔다고 하니… 이것이 감히 연빈마마께 해서는 안 될 일을 계획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마마께서 건강을 조금 회복하고 나시면 말씀드리려고 하였는데 그사이에 이런… 이런 짓을 할 줄은 정말로… 정말로 몰랐습니다…!”
제게 향하는 황제의 시선을 느끼며 서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소정이 범인이다. 서천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간 저에게 의뭉스럽게 굴었던 것도, 굳이 자신의 뒤를 캐고 다닌 것도 모두 지금의 순간을 위한 준비였으리라.
허면 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서천은 그것이 궁금했다. 서천은 이전까지 소정과 만난 적이 없으니 자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건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연빈을 죽이려 했고 혹시나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을 패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연빈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것일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사이 황제가 곁에 서 있던 오 태감을 한 번 바라보자 그가 서둘러 황제의 앞에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폐하. 소인이 기억하기로도 저자가… 죽은 시위의 시신을 수습하고 폐하께서 내리신 장례비를 받은 자가 맞사옵니다.”
오 태감의 말을 들은 이한이 의자의 손잡이를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힘껏 쥐었다. 모든 정황이 그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죽은 친우를 위해. 하루아침에 헛되이 비명횡사한 벗을 위해 복수를 하려 들었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명명백백하게 설명이 되었다.
이한은 너무나도 참담한 심정에 눈을 감았다. 아무리 천한 취급을 받는 천민 출신이라고 하여도 그들의 삶 역시 가치가 있다는 건 이한이 한결같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연빈을 구하다 죽은 시위의 삶은 이한에게도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저 시위의 입장에서 본다면 친우를 죽이고 살아난 사람이 그 후로 오히려 승승장구하며 이제의 황제의 총애까지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죽은 이와 저자가 정말로 각별한 사이였다면 어찌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며, 어찌 분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은 죄가 사라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억울하고 분해도 황제의 후궁을 해하려 한 죄는 가벼울 수가 없는 법.
화가 나고, 답답하고, 먹먹한 그 모든 마음을 꾹꾹 내리누르며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쉰 이한이 마침내 서천을 엄히 심문하라 명을 내리려 하는 순간.
“……폐하.”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아주 연약한 목소리 하나가 황제를 불렀다. 화운이었다.
“…운아!”
그러자 황제는 그곳이 어디인지도 잊고. 아니,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화운의 애칭을 부르며 황급히 몸을 일으켜 침대로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누구 하나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처럼 살기등등하게만 보였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순식간에 허물어져 애틋하고도 서글픈 표정이 된 황제가, 성이한이 화운의 곁에 걸터앉아 그의 뺨을 어르며 말했다.
“나다. 내가 여기에 있다. 정신이 드느냐.”
“폐하….”
“그래. 그래…. 운아. 괜찮다. 이제 내가 곁에서 너를 지켜줄 것이니 걱정 말아라.”
이한은 힘겹게 눈을 뜨려 애쓰는 화운의 눈가를 연신 쓸어주었다.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한 체온이 안타까웠다. 계속 참고 있던 화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연화운이 그대로 잘못될 수도 있었단 생각이 들자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고 뭐고 당장 관련된 모두에게 엄벌을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황제의 심정을 헤아리기라도 한 건지, 힘이 하나도 없는 손길로 이한의 팔을 천천히 붙든 화운이 아주 꺼질 듯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제 잘못입니다…….”
“……뭐?”
순간 이한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화운은 제 목소리를 조금 더 잘 듣기 위해 허리를 굽혀 다가온 이한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제가… 제가 실수로 빠진 것이니, 폐하… 다른 이들을 탓하지 말아 주세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이한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지금 자신의 앞에 꿇어앉은 채로 서로를 탓하고 있던 이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아도 수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여 이한은 아무래도 이 일은 그리 간단하게 말할 일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 했다.
“폐하….”
하지만 그때, 화운이 다시 황제를 불렀다. 시선을 돌려 화운을 바라본 이한의 표정이 일순 연약하게 허물어진다. 화운은 너무나도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 얼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절박함을 담은 채로, 화운이 마치 애원하듯 황제에게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 설령 저들의 실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폐하… 이것은 서정궁의 일이니 부디 제가… 제가 직접 처리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시옵소서…. 폐하…….”
그의 목소리를 바람 앞의 등불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순히 아파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같기도 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단지 자신이 죽을 뻔했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저들을 벌할까 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이한이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을 때,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자란이 조심스럽게 이한의 곁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폐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연빈의 상태입니다. 당장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시더라도 우선은 연빈을 먼저 달래 주시고, 다른 건 후에 처리해도 되지 않을는지요.”
자란의 목소리에 이한이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화운이 위험했다는 생각에 평소답지 않게 자꾸만 흥분하고 있었다. 이한은 가볍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애처로운 화운의 뺨과 입술을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쓸어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