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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거추장스러운 옷자락이 물에 젖어 무거운 채로 온몸을 휘감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호흡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왔고 막히는 숨을 터트리기 위한 모든 노력들은 그대로 더 큰 고통이 되어 되돌아왔다. 계절을 실감할 수 없을 만큼 한기가 느껴졌다. 다만 그것이 물이 차갑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이 얼어붙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은 생각보다 강해서, 그는 연신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하지만 애초에 강하지 못했던 두 팔과 다리의 힘은 마른 몸 하나조차도 물 위로 밀어내지 못했다. 빛과 어둠조차 구분하기 힘든 혼돈이 죽음의 옷을 입은 채 휘몰아치고 있었다.
숨이 차고 정신이 아득해질수록 오히려 마음은 점점 더 평온해졌다. 과연 죽음이라는 건 정말로 모두에게 공평한 것일까. 어떤 삶을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방패로 삼아 숨고 나면 값싼 동정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지난날의 과오 같은 것은 전부 지워버린 채로, 오로지 지독한 죄책감으로 영영 누군가의 마음에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애매한 공포와 희열, 두려움과 기대감 사이에서 점점 정신을 잃어가고 있을 때.
빛으로부터 뻗어져 나온 손 하나가 그를 끌어당겼다.
“저, 저놈이다! 당장 저놈을 포박하라!”
화운을 붙들어 연못 밖으로 끌어당기다 잠시 멈춰 있던 서천의 귀에 고함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횃불을 들고 달려온 시위들이 서천을 둘러싸고, 그들 중 몇몇이 다가와 정신을 잃은 화운을 대신 물 밖으로 구해냈다.
“마마! 마마, 괜찮으십니까? 어서! 어서 태의를 불러라!”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소정의 목소리에 서정궁 여기저기서 불이 켜지며 처소 안에 있던 궁인들이 뛰어나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온 이들이 저마다 물에 젖은 채로 정신을 잃은 화운을 발견하곤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놓으시오! 나는 연빈마마를 구하고 있었을 뿐이오!”
그사이 소정의 명령을 따라 시위들이 서천을 포박하려 들자 그는 강하게 그 손길을 거부하며 소리쳤다. 허나 눈빛이 날카로워진 소정은 그런 서천을 향해 지지 않고 말했다.
“네가 연빈마마를 물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건만 발뺌을 하는 게냐! 뭐 하고 있어, 어서 묶어 꿇리지 않고!”
한밤중에 갑자기 벌어진 난동으로 모두가 정신이 없었다. 그들의 주인이 정신을 잃고 있는 데에다가 아진까지 부재한 상황에서 수령태감인 소정의 이야기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위들은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 곧장 서천을 포박하여 바닥에 꿇렸다. 소정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으나, 당장 중요한 건 화운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었다. 화운을 황급히 품에 안아 올린 소정이 곁으로 다가와 벌써 눈물을 쏟을 기세인 궁녀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황제폐하와 황후마마께 당장 이 일을 고하거라. 어서! 그리고 그 죄인은 따로 명이 있을 때까지 침전 앞에 무릎을 꿇려 놓도록.”
말을 마친 소정이 화운을 안고선 전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소정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던 서천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아닌 밤중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부산스럽게 불을 밝힌 서정궁의 침전에는 황제는 물론이고 황후까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한의 얼굴은 마치 그가 물에 빠졌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창백했다. 늦은 시간까지 정무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화운이 연못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한의 심정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한은 거의 비틀거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소식을 가지고 온 내관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기까지 하여 오 태감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물어봐도 상황을 살피지 못하고 곧장 달려와 아는 것이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인 내관을 두고 이한은 옅은 현기증을 느꼈다. 오래전, 연빈이 연못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날이 불현듯 떠올랐으나 느끼는 감정은 그때와 조금도 같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충격 속에서 이한은 거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혹시나 자신이 무언가를 놓쳤을까 봐. 처음 느껴 보는 제 감정에 도취되어 정작 중요한 화운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게 있을까 봐. 그래서 혹시라도. 혹시라도 화운이 스스로의 의지로 연못에 뛰어들었을까 봐 그것이 견딜 수 없이 두려웠다. 과한 짐작이라는 걸 알면서도 서정궁으로 오는 내내 황제는 손바닥에 다 패이도록 주먹을 쥐어가며 끝도 없이 크기를 키워가는 자신의 불안함과 싸우고 또 싸웠다.
은애의 감정이라는 것이 본래 이토록 수많은 두려움과 맞서야 하는 것임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다행히 위독한 상황은 아니라는 태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다리가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던 이한이 이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서정궁의 수령태감 소정을 향해 말했다.
“네 말은, 연빈을 연못으로 빠트린 이가 따로 있다고?”
소정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그자가 발버둥치는 연빈마마를 물속에 밀어 넣고 있는 것을 소인이 분명히 보았습니다. 마마를… 마마를 혼자 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전부 소인의 죄입니다. 폐하, 소인을 죽여 주십시오!”
분노를 꾹꾹 참아 내리누르며 울먹이는 소정의 목소리 뒤로 뒤늦게 사태를 알고 뛰쳐나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던 아진의 입에서도 옅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종인 주제에 스스로를 잘 관리하지 못해 마마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서. 그래서 마마께서 이런 곤욕을 치르신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소정과 아진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한이 문가를 지키고 있던 이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소정이 범인이라 지목하여 포박되어 있는 자를 데리고 오라는 뜻이었다.
“…….”
안으로 들어온 시위의 얼굴을 확인한 오 태감이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는 이미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한은 잠시 말없이 무릎 꿇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자꾸만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날뛰려 하는 제 감정을 다스리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머리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파랗게 질려 겨우 약한 숨만 내쉬고 있는 화운을 보니 서정궁에 있는 모든 이들을 처벌하고 싶은 욕구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연빈이 실수로 빠진 것이든, 아니면 정말로 누군가가 작정하고 민 것이든 상관없었다. 아니, 연빈이 스스로 투신을 한 것이라도 해도 마찬가지였다. 서정궁에 있는 이들은 그 무엇보다 저들의 주인을 지키고 보필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주인이 이토록 처참한 일을 당했다는 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잘못이었다. 지난번 화운이 연못에 빠졌을 때에는 조금도 하지 않았던 생각이다.
이한이 쉬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깊은 숨을 내쉬고만 있자 가만히 그런 이한을 살피던 황후, 자란이 먼저 입을 서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소 내관이 연빈을 연못에 빠트린 범인으로 너를 지목했다. 사실이냐.”
“아닙니다, 황후마마. 소인은 물에 빠지신 연빈마마를 발견하고 구하려 한 것이지 결코 마마를 빠트린 것이 아닙니다.”
자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대답하는 시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당장 목이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크게 당황하거나 겁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설령 정말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개 시위가, 그것도 천민 출신의 시위가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 곳에서 심문을 받는다면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울 텐데 지나치게 침착한 태도가 눈에 띄었다. 자란이 말을 이었다.
“허면 연빈이 물에 빠진 것은 어찌 알고 구하러 왔느냐.”
“소인은 동료 시위인 자문과 함께 순찰을 돌다가 연못가에 마마께서 홀로 서 계시는 것을 보고 지나쳤습니다.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고 왠지 느낌이 이상해 소인이 홀로 되돌아갔다가 연빈마마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자문이라는 자가 밖에 있느냐.”
서천의 대답을 들은 자란이 고개를 들어 묻자 머지않아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시위 하나가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소, 소인… 서정궁을 지키는 시위, 자… 자문이라고 하옵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네가 보고 들은 것을 빠짐없이 고하라.”
황후의 물음을 받은 자문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도 일이거니와 황제 폐하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는 건 처음이라 아무리 진정하려 애를 써도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황제는 마치 누군가를 잡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엄청난 기세로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문은 마치 거대한 호랑이 앞에 선 사슴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문은 덜덜 떨리는 두 팔로 간신히 바닥을 짚고 머리를 조아린 채로 대답했다.
“소인… 소인은 여기 있는 서천과… 서천과 함께 순찰을 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서천이 무슨 소리가 난 것 같다며 돌아갔고… 소인은… 소인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마마.”
“순찰을 돌 때 연빈을 보진 못하였느냐?”
“보, 보았습니다. 연빈마마께서는 아무도 없는… 없는 연못가에 홀로 서 계셨습니다.”
자문이 거기까지 대답했을 때였다.
“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