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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44)화 (14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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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허락 없이 시녀가 멋대로 쉰다는 건 얼핏 말이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주인은 아픈 이에게 강제로 일을 시킬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고, 지금 아진에게 중요한 건 무엇보다 마마의 건강이었으므로 아진은 마마의 허락을 구하는 일을 소정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연히 마음이 놓이지는 않는 일이라 아진은 말을 덧붙였다.

“치장이나 소세를 돕는 일은 나 대신 서서를 불러다가 모시게 하고. 알겠지?”

“글쎄, 알아서 잘 할 터이니 걱정 말고 아진 낭자는 얼른 낫기나 하시오!”

마치 어디 멀리 떠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초조하게 굴기 시작한 아진의 등을 소정이 슬쩍 밀었다. 아진은 그런 소정을 잠시 바라보았다. 처음 정안궁으로 왔을 땐 서슬 퍼런 아진의 기세에 덜덜 떨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더니 이제는 제법 한 궁의 수령태감다운 태가 나는 것 같았다. 물론 아진의 눈에 차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어쨌든 괜히 가까이 있어 소정에게까지 감기를 옮기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아진은 할 수 없이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며칠에 불과하겠지만 마마를 뵙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울적했다.

“한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멍청하게 이게 무슨 꼴이야.”

홀로 약방으로 향하는 아진의 뒷모습이 처량했다. 이번 일을 반석으로 삼아 다음부터는 절대로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그런 다짐을 하는 아진이었다.


새벽의 어둠이 황궁을 가득 채운 시각, 도통 잠이 오지 않아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화운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이전의 몸에서는 숨을 쉬듯 익숙했지만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낯설어지고 있는 무술 기초식의 보법이다. 검은 들지도 않았건만 화운은 굳이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지 않아도 그 움직임이 어설픔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이 움직였다. 몸의 중심은 하나도 맞지 않았고 호흡도 무엇도 전부 다 엉망이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마치 그 자신이 하운임을 상기하려는 것처럼, 화운은 계속해서 서툰 보법을 밟고 또 밟았다.

“하아….”

하지만 필사적인 마음과는 상관없이 오래 지나지 않아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숨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움직임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는데도 화운의 몸은 금방 지쳐 버거워했다. 마치 항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네가 아무리 부정하고 되새기려 애를 써도 너는 영영 연화운의 몸으로 살아가야만 하고, 스스로도 그 몸에 익숙해지는 날이 올 거라고 반박이라도 해오는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숨을 고르던 화운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이토록 연약한 몸에 천천히 익숙해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삶이라는 것이 그런지도 모른다. 아무리 뼈아픈 상실도, 고통도, 슬픔과 고독함도 삶이라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화운이 지금 느끼는 죄책감도 결국에는 희미한 흔적처럼 남게 될 터.

언젠가 벌어질,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벌어지고 있는 그 일을 반겨야 하는지, 아니면 경계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알 길이 없어 화운은 멍하니 멈추어선 제 발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마마.”

생각이 깊어지려는 찰나, 등 뒤에서 소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가라앉은 표정을 갈무리한 화운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다 말할 수도 없는 비밀 때문에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화운은 괜히 따끔거리는 마음을 모른 척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소정. 이 시간에 자지 않고.”

“앞을 지나치다가 기척이 나서요.”

소정의 대답에 화운이 알 만하다는 얼굴을 한 채로 웃었다. 앞을 지나친 것이 아니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다가도 새벽이 되면 이유도 없이 앓는 일이 잦았던 화운이니 늦은 시각까지 침실 앞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언제나 아진의 몫이었다. 헌데 오늘은 감기에 걸려 일찍 쉬러 들어갔으니, 아진이 소정에게 이것저것 얼마나 많은 당부를 하였을지 화운은 이미 전부 본 것만 같았다.

화운은 그렇게 밤낮없이 자신을 걱정하며 섬세하게 살피던 아진이 이제야 아픈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라 생각했다. 감기에 걸린 건 속상한 일이지만 그 덕분에 아진이 자신에게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쉬게 된 걸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늘 화운의 손발처럼 능숙하게 움직이던 아진이 없으니 불편한 점이 아예 없을 순 없었다. 아무리 서서와 소정이 신경을 쓴다고 하여도 아진의 자리를 완벽히 채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화운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불편한 게 아니고 늘 저 때문에 무리하기만 했던 아진이 이참에라도 푹 쉬는 일이었다. 화운은 벌써 몇 번이나 소정을 통해 아진이 애쓰지 않도록 하라는 말을 전한 참이었다.

별다른 말이 없는 화운을 두고 소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마마. 마마께오선 어찌 주무시지 않고 일어나 계십니까.”

“아….”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마마?”

“아니, 뭐… 그냥….”

“생각이 많아 보이십니다.”

사실 소정은 덜 닫힌 문틈으로 화운을 보았다. 늦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홀로 침실 가운데에 서 있던 화운의 심사가 어찌나 복잡해 보이던지, 화운은 몰랐지만 소정은 한참 동안 말을 붙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화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정의 물음에 화운이 기운 없이 웃었다.

“뭐, 그냥….”

오늘은 황제가 오지 않는 날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정무를 보게 될 터라 그대로 중천전에서 밤을 보낼 것이니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잠자리에 들라는 전언이 있었다. 마음 같아선 아무리 늦더라도 서정궁으로 와 잠들고 싶은 이한이었으나 몸도 안 좋은 사람의 잠을 그렇게 방해할 수는 없었다. 화운은 이미 폐하께서 황후마마와 함께 석찬을 하신 뒤 중천전으로 돌아가셨다는 보고를 전해 들었다.

화운이 혹시나 지금 자신이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을 두고 폐하께서 오시지 않아 그러하다 소정이 오해를 하진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였을 때, 소정이 입을 열었다.

“마마. 허면 연못가에서 잠시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오늘은 낮 동안 내리 비가 내렸다. 날은 일찍 어두워졌고 꼭 그것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산책을 하기엔 지나치게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화운은 밤 산책을 즐기기도 했고, 비가 내린 후인지라 더위도 잠시 가신 참이었다. 화운은 비가 내리고 난 뒤의 청량한 공기를 좋아하였으니 산책하기 나쁜 때는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비 내음 가득한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나면 괜히 무거워지는 이 마음도 한결 나아질 수 있겠거니. 안 그래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던 화운은 소정의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소인이 얼른 겉옷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밤바람에 화운이 어깨를 한 번 움츠리는 것을 본 소정이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리 밤이라 해도 여름이라 괜찮겠거니 하였는데 낮에 비가 내린 탓인지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평소라면 괜찮으니 귀찮게 다녀올 필요 없다고 하였을 화운이지만 며칠 전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황제를 곤란하게 했던 일이 떠올랐다. 또다시 감기라도 덜컥 걸려버리면 폐하를 뵐 낯이 없었다.

게다가 아진은 자신에게 옮기지 않겠다고 저렇게 자처하여 자신을 격리하고 있는데 홀로 산책을 하다가 감기에 걸렸다고 하면 아진의 얼굴을 볼 면목 역시 없질 않겠는가.

화운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소정이 달리다시피 연못을 벗어났다. 늦은 밤, 홀로 연못에 남겨지자 평소라면 듣기 어려웠을 물소리와 풀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 같은 것들이 옅게 귓가를 맴돌았다. 번잡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남은 삶이 앞으로도 이토록 차분하고 고요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끝없는 죄책감에 화운은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남의 몸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버거웠던 화운이다. 헌데 이제는 그 몸으로 황제의 진심을 받게 되질 않았나. 그 사실에 가슴 벅차도록 행복해하다가도 금세 스스로를 채찍질하길 반복하였으니 누군들 마음이 부서지지 않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화운은 천천히 눈을 감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몸이 미미하게 떨릴 정도로 춥기는 하였으나 모처럼 마시는 열기 없는 깨끗한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너를 은애한다는 황제의 말에도 그저 듣는 것 외엔 어떠한 말도 되돌려줄 수 없던 서러움이 켜켜이 쌓인 마음을 애써 괜찮다 위로하며 감은 눈을 뜨려고 했을 때.

문득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손이 화운의 등을 세게 밀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화운의 몸이 연못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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