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43)화 (143/167)

143

“…….”

“…….”

하지만 결국 화운은 입을 열지 못했다. 목소리를 입 밖으로 밀어내는 마지막 용기를 내지 못했다. 화운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내심 기대하던 이한은 그대로 다시 입을 다물어버리는 화운을 보고 덩달아 입술에 힘을 주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화운을 다그쳐 도대체 무엇이 여전히 너를 이토록 서럽게 만드는 것이냐 따져 묻기라도 하고 싶었다.

“…피곤하진 않으냐.”

하지만 이한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으며 손으로 화운의 뺨을 감싸 고개를 들게 하곤 저의 눈빛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이한은 황제의 권력으로 그의 마음을 강제로 토해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보단 연화운이 스스로 원하여 제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화운이 진심으로 자신을 믿어서, 의지해서,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연모하게 되어서.

그래서 마음속 깊이 감추기만 하던 그 마음을 털어 내주길 이한은 바랐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화운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이한은 그대로 몸을 굽혀 화운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짧은 입맞춤에도 화운은 여전히 몸을 굳히며 긴장을 하였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몸이 좋지 않으니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겠지. 오늘은 이만 자리에 눕도록 하자.”

화운이 변한 뒤에도 그를 외면하고 밀어내었던 날들이 여러 날이었으니 온전히 그의 믿음을 얻는 것 역시 당연히 시일이 걸리는 일이겠거니. 언젠가 자신이 화운의 모든 마음을 안아줄 수 있길 바라며 이한은 불안하고 초조한 저의 마음을 다스렸다.


가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린 황후를 지나쳐, 황제는 바로 뒤에 있는 귀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기에 달리 놀라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무심하게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황제의 걸음을 보아야 했을 황후에게만큼은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어린 태자는 거기에 서서 황제의 총애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늘어진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있었다.

눈을 한번 깜빡이자 사방에 피바람이 불었다. 처절한 비명이 하늘을 가득 채웠고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 피가 강물처럼 땅 위를 흘렀다. 그리고 당당히 황좌에 오르길 바랐던 아들의 피무덤 위에 악귀처럼 앉은 귀비는 얼굴 가득 조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죄를 지은 것은 저이나,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전부 황제 폐하고 황후마마입니다.’

어차피 모든 것은 끝났다.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귀한 아들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었고 역모에 일가족이 전부 연루된 귀비의 집안은 아홉 번의 생을 거듭하여도 용서받을 수 없으리라. 하여 마지막 애원을 할 의지조차 사라진 귀비는 웃으며 말했다.

‘세상 귀한 것을 모두 너에게 주마, 하고 제게 속삭이시던 폐하의 음성이 제 마음에 역모의 씨앗을 심었고, 일국의 황후가 되어 한낱 후궁에게 주눅이 들어서도 사사건건 투기를 감추지 못하셨던 황후마마께서 그 씨앗에 싹이 나도록 하셨지요.’

어린 태자는 그곳에도 있었다. 어미의 눈물을 양분 삼아 자라난 태자는 겁을 먹은 채 그늘 속에 숨어 장성한 그 자신과, 역적이 된 형제의 무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비는 말을 이었다.

‘황후마마께서 저를 볼 때마다, 당신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저 년의 살을 가르고 피를 마시리란 눈빛을 숨길 줄을 모르시니.’

실성한 사람처럼 어깨를 떨며 히죽히죽 웃던 귀비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어린 태자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살벌하고 기괴한지, 태자는 겁이 나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두 발이 땅에 붙어버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태자 저하.’

어린 태자를 부르는 귀비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눈이 붉게 타오르는 악귀의 형태가 되어서도 귀비는 오로지 어린 태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 어찌 제가, 태자 저하를 살려 둘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윽고 귀곡성과도 같은 귀비의 울음소리가 하늘과 땅을 찢어발기듯 요동쳤고, 어린 태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헉……!”

이한은 거친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몸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숨은 버겁게 차올랐다. 이한은 한참 동안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하며 굳었던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런 악몽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

마음이 심란하여 몸을 뒤척이던 이한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기척을 느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한 쪽을 향해 모로 누운 연화운이 몸을 웅크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피식,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너무나도 즉각적이고 반사적인 반응이라 웃어놓고도 스스로 당황했을 정도였다. 이한의 악몽은 아주 오래된, 지독한 상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는 모든 일이 과거로 물러나고 나라는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며, 이한은 그 어느 때보다 칭송받는 성군으로 황제의 자리에 임하고 있으면서도 이 악몽이 찾아오는 날이면 종일 낮게 가라앉아 황궁 전체를 긴장하게 만들곤 하였다.

그런데. 그런 처절한 악몽을 꾸고 일어났는데. 이한으로 하여금 그 꿈을 꾸게 만든 것이 분명한 사내를 보고서도 웃음이 흘러나오다니.

이제 와 이 악몽을 다시 꾸기 시작한 이유는 연화운 때문임을 이한은 확신했다. 그를 은애한다 스스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황후도 아닌 후궁을 두고 나의 유일한 정인이라, 그렇게 고백을 하였기 때문에 이한의 내면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던 죄책감이 주문처럼 악몽을 불러일으킨 게 분명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네가 평생에 걸쳐 그토록 혐오하였던 바로 그 감정을 어째서 이렇게 받아들인 것이냐 탓을 하는 게다. 그걸 알면서도. 여전히 깊은 마음 한켠에서는 이 길을 가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막아서는 제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이한은 연화운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작게 몸을 말고 잠들어 있는 그를 사랑스럽다 여겼다. 팔베개를 해 주겠다고 해도 감히 폐하의 팔을 베고 잘 수는 없다 버텨 기어코 이한을 또 심술 나게 만들었던 지난밤의 화운이 떠올라, 그가 괘씸하면서도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나간 과거가 결코 이길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한은 거기에 누워 악몽을 곱씹으며 자신을 자책하는 대신 웅크린 화운을 몸을 조심스럽게 제게로 당겨 안았다. 쉽게 딸려오는 몸을 품에 안고 그의 목 아래로 은근슬쩍 팔을 밀어 넣었다. 중간에 화운이 잠시 몸을 뒤척이며 작은 신음을 흘려 이한을 긴장하게 만들었지만, 어제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깨어나진 않았다. 그렇게 뜻하는 대로 화운을 제 품에 둔 이한이 잠시 침대에 팔꿈치를 대고 상반신을 살짝 일으켜선 잠들어 있는 화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순한 얼굴이었나 싶었다. 본래 연화운은 화려한 인상이 아니었던가. 그는 분명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미인이기는 하였으나 차라리 표독스러운 느낌에 가까운 얼굴이었지 순한 것과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화운은 어떠한가. 여전히 빼어난 미모인 것은 마찬가지이나 지금의 화운은 더없이 선하여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청아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찐득하게 마음에 들러붙어 있던 오래된 상처와 찝찝한 죄책감들이 전부 물러나는 것만 같아서.

이한은 이내 고개를 가볍게 숙여 화운의 이마와 코끝과 입술 위에 차례대로 솜털 같은 입맞춤을 남겼다.

화운은 몰랐겠으나, 그는 피를 밟은 채로 덜덜 떨기만 하였던 어린 태자의 구원이었다.


“에취!”

“…아진 낭자. 혹시 감기에라도 걸렸소?”

벌써 네 번째인지 다섯 번째인지 모를 아진의 재채기를 들은 소정이 문득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되물으려 고개를 돌린 아진은 그러다가 문득 일어날 때부터 이상하게 몸이 무겁고 한기를 느꼈던 것을 떠올리곤 눈을 크게 뜨며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로막았다.

“그, 그런가?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긴 했는데 감기 때문이었나…?”

소정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주인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종이 아픈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아진이 울상이 되어 말을 이었다.

“어쩜 좋아. 오늘 아침 마마의 수발도 내가 다 들었고 곁에서 식사를 챙겨드리기까지 하였는데! 안 그래도 지금 몸이 안 좋으신 마마이신데 옮기기라도 했으면 어쩌지?”

“일단 진정하시고… 우선은 당장 가서 약부터 먹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시오. 마마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 혹시라도 직접 고한다고 마마께 가까이 갔다가 옮길 수도 있질 않겠소.”

“그래… 그래야겠다. 허면 마마께 대신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줘. 얼른 나아서 올 테니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알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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