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화운이 거 보라는 표정을 한 채로 말을 이었다.
“허면 이제 돌아가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제야 이한이 알겠다는 표정을 하고는 눈썹을 늘어트리며 아주 무해한 표정을 하고선 말했다.
“아, 내가 여기에 있으면 또 너를 어찌 할까 봐 그러느냐?”
“아니, 그것이….”
“걱정 마라. 정말로 얌전히 잠만 자고 갈 것이니.”
여기까지 와서야 정말로 모든 것을 파악한 화운이 미간을 찌푸린 채 정색을 하고선 답지 않게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은 말도 안 됩니다, 폐하.”
“말이 안 된다니…?”
“제가 몸이 이러하여 폐하를 모시지 못하니 폐하께서는 응당 다른 분의 처소로 가셔야지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의 이한은 다시 한 번 눈만 꿈뻑거리며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왜?”
이한의 반응에 외려 당황한 화운은 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이제야 머릿속으로 화운이 왜 아까부터 자꾸만 저보고 돌아가라 하였는지 그 이유를 깨달은 이한이 다소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하려고 온 것이지 그냥 누군가와 밤을 보내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허나, 폐하.”
“네가 아니었다면 명하원으로 와 이렇게 매일같이 후궁의 처소를 찾는 일도 없었어. …내가 있는 것이 불편하여 그런 것이면 그냥 중천전으로 돌아가마.”
이한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현 황제가 그 위치에 비해 후궁이 턱없이 적고 그마저도 찾지 않는 밤이 많은 건 이미 모든 이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최근에 며칠 밤을 연달아 서정궁을 찾은 일을 두고 더더욱 온 황궁이 들썩였던 것이다. 지금의 황제가 한 후궁을 연달아 찾았던 일도 드물거니와 하루가 멀다 하고 찾는 일 또한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헌데 정작 그 엄청난 총애를 받고 있는 연화운은 오늘도 황제를 향해 다른 사람을 찾으시라 청을 하고 있으니 이한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허나 그 속을 다 알 수가 없는 화운은 묵묵히 제가 해야 할 말을 할 뿐이었다.
“…폐하께서 제게 과분하게 대해주심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과분하다, 라는 말이 이한의 귓가에 아프게 꽂혔다. 이한은 자신의 마음은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황제가 어느 후궁에게 평범하게 선물을 내려 주기라도 한 것처럼. 과분하다는 말은 저의 마음을 꼭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인 것만 같았다.
“허나 제가 감히 그것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군다면 어찌 당당하게 황후마마와 다른 비빈들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황제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절박함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외면한 채 은애의 감정을 입에 담았는지 조금도 몰라주는 사람처럼. 거기에 앉은 연화운은 그토록 야속한 말을 자꾸만 하고 있었다.
서운했다.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자신이 멋대로 굴어 그를 아프게 한 날이 있었다고 한들 고백을 하였는데도 화운은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주 작은 질투의 감정조차도 보여주질 않으니 이한은 조금 전 화운이 자신과 함께했던 밤이 기꺼웠다고 했던 말에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원래 이런 것인가.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기게 되면 원래 이토록 유치하고 별것도 아닌 일로 마음이 상하곤 하는 것일까. 후궁이 되어 투기를 일삼지 말아야 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법도임이 분명한데 이한은 자신이 마치 연화운은 그 모든 법도를 어기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마음이 쉬이 갈무리가 되지 않아 입술만 삐죽거리고 있는 황제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들고 화운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늘은 연주궁으로 가시지요.”
연주궁은 숙비인 비영의 처소였다. 이한은 팔을 가볍게 털었다.
“글쎄, 나는 싫다.”
연화운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오히려 하나 어긋날 것이 없었다. 다만 성이한이 그러기 싫다는 뜻이었다.
“병자는 폐하의 밤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누가 너를 병자라 하였느냐? 그리고, 누가 너를 어찌 한다고 했나? 그냥 잠만 자겠다는 것인데!”
“폐하.”
“너는 말로만 나를 폐하라 부르지 도무지 내 말을 듣질 않는구나!”
그러더니 이제 이한은 아주 철부지처럼 화운을 등지곤 돌아앉는 것이 아닌가. 일순 기가 막힌 표정이 되어 황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화운이 이내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삐죽 보이는 황제의 뚱한 볼이 문득 견딜 수 없이 귀엽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늘 하늘과 같아 어렵고 존경스럽기만 했던 황제의 이런 모습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내심 싫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스러웠고 어여뻤다. 그분의 다정한 미소조차 감히 바랄 수 없던 자신이 이제는 그분의 곁에서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습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좋으면서도 또한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왜 자신은 애초에 연화운이 아니었을까. 왜 남의 몸을 차지하고 나서야 황제와 이리도 가까워질 수가 있었을까. 어째서 자신은 그분을 속이고 또 속여야만 이리 귀한 마음을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한과 함께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그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화운은 점점 더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말이 없이 고요하게, 화운이 황제에게 다가서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눈앞에 보이는 황제의 등은 너무나도 크고 단단해 보여 화운은 이대로 그분의 품에 영영 몸을 숨긴 채 자신의 죄를 외면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폐하….”
“듣기 싫으니 너는 나를 부르지도 마라.”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조용히 흘러나온 화운의 목소리에 이한의 등이 움찔거렸다. 그가 내뱉는 말이 족족 마음에 들지 않아 툴툴대기는 하였으나 막상 화운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죄를 청하니 마음이 툭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화운은 말을 이었다.
“제가… 제가 주제도 모르고….”
“너는 무슨…!”
하지만 화운의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황제가 순식간에 몸을 돌려 화운을 다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화운이 이렇게까지 다시 자신을 낮추길 바라고 했던 말이 결코 아니었던지라 당황하여 돌아보았던 이한의 눈동자에 이번에도, 영락없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서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화운의 얼굴이 들어왔다.
또다. 또 이런 얼굴이다. 아주 깊고 깊은 우물에 잠겨 있는 것 같은 표정. 아무리 손을 뻗어도 영영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러한 아득함.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사로잡힌 이한이 서둘러 두 손을 들어 화운의 어깨를 쥐었다. 처음에는 이 얼굴이 제가 그를 믿지 않고 모욕하여 그런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멋대로 변덕을 부리며 밀어냈다가 다가가기를 반복하여 그런 줄 알았고, 그다음에는 확신을 주지 않는 저의 마음을 불안해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황제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연심을 고백하게 만들고 나서도 연화운은 여전히 이런 얼굴을 했다. 어째서. 왜. 무엇 때문에.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던 답을 도로 잃어버린 이한의 머릿속에 다시금 불안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손을 놓치면 이대로 그를 잃기라도 할 것 같은 생각에 조금 더 힘을 주어 화운의 어깨를 쥔 이한이 말했다.
“네 주제가 무어 어떻다고.”
“폐하?”
“대 안국의 사람이고, 황실의 후궁이며.”
“…….”
“황제인 나 성이한의 유일한…!”
유일한. 나의 유일한.
거기까지 말한 이한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비록 이미 한 차례 고백한 일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어떠한 단어들은, 어떠한 마음들은 제 입으로 꺼내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이한에게 죄악이었고, 부정함이었다. 하지만 말을 머뭇거리며 이한은 여전히 연화운을 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한에게 버림받을 것 같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서럽고도 처량한 그의 얼굴을.
“…너는 나의 유일한 정인이거늘.”
하여 이한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었다. 전해주고 싶었다. 황제로서 결코 가져선 안 될 수만 가지의 이유를 마음에 두르고도 끝끝내 외면하지 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던 그 마음이 얼마나 절절한 것인지 연화운이 알아주길 바랐다. 그래서, 그가 더 이상은 이토록 불안에 떠는 얼굴을 하지 않길 바랐다.
“너는 내게 하지 못할 말이 그 무엇도 없어.”
그때, 화운의 마음에는 거대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곧 화운의 마음이자 언어였다. 심장으로부터 피어난 어떠한 감정을, 화운은 말하고 싶었다. 황제 폐하께서 귀한 연모의 마음을 이토록 하찮은 자신에게 전해주셨듯, 화운은 보잘것없는 저의 마음이지만 그분께 솔직히 표현하고 싶었다.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화운 스스로도 몰랐던 처음의 순간부터. 자신 역시 어쩌면 그를. 황제 폐하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눈이 부시지 않은 적이 없던 눈앞의 이 사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