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40)화 (14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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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허면 뒷일은 황후에게 부탁하겠소.”

“예, 폐하.”

이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제 아비와는 다른 사내이고, 다른 황제였으니 이한은 이제야 처음으로 찾은 유일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더 바르고 옳은 길로 나아가야 했다. 이한은 그렇게 새삼 자신을 경계하며 화운을 두고 황후궁을 나섰다.

물론, 상황이 이러하니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황제의 모습에 자란이 외려 남몰래 웃었던 건 비밀로 하겠다.


“송현 그 아이가 정말 귀엽지 않느냐.”

“마마, 웃음이 나오십니까. 저는 누가 폐하께 고하기라도 할까 겁이 나 아주 혼났습니다.”

“하하. 폐하께서는 송현의 말을 전해 들으셔도 크게 탓을 할 분이 아니시니 걱정 말아라.”

비영은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명주를 달랬다. ‘연빈이 몸이 약한 걸 뻔히 아시는 분이 어찌 사람이 그 지경이 되도록 하셨답니까?’ 하고 황제를 향해 분통을 터트리던 송현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당분간은 자다가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비영은 이따금 송현이 아주 오래오래 지금처럼, 철부지 여동생처럼 남기를 바라곤 했다. 언젠가 그 애가 다 큰 어른처럼 점잖게 굴면 적잖이 아쉬울 것이다.

그사이 부채를 들고 와 밖을 걸어오느라 열이 오른 비영에게 가볍게 부채질을 시작한 명주가 말했다.

“그나저나 연빈은 당분간 시침을 들지 못할 테니 해가 지거든 중천전으로 간식이라도 보내 마마의 마음을 보이시지요.”

“연빈이 아픈 틈을 타 무엇이라도 해보라는 뜻으로 들리는구나.”

“…마마. 폐하께서 마마를 찾으신 날도 벌써 한참이 지났습니다. 어찌 이리 느긋하십니까.”

초조함이 가득한 명주의 말을 들으면서도 비영은 별다른 반응이 없이 마침 궁인 하나가 놓고 간 차의 향을 가만히 음미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굳이 총애를 다투며 싸워야 할 연유가 없는데 느긋하지 못할 건 또 무어냐.”

“허나 마마. 마마께서는 후궁이심을 잊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하루라도 빨리 황손을 생산하셔야 앞으로도 마마께서 더 안전하실 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황후마마께서도 아직 황손을 보지 못하셨다. 내가 서두를 일이 아니다.”

순간 비영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으나 안타까운 마음에 그 얼굴을 미처 제대로 보지 못한 명주는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마마께서 더 빨리 회임을 하셔야지요. 마마, 황궁은 무섭고 냉정한 곳입니다. 지금이야 황후마마께서 어질게 마마를 대해주고 계시나 사람 일이란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알았으니 그만하거라.”

“혹여나 황후마마께서 후에 마음이 바뀌어 마마를 경계하고 밀어내려 하신다면 누가 있어 마마를 지켜드릴 수 있겠습니까. 마마께서 1황자를 생산하신다면 황후마마께서도 쉽게 마마를 업신여기지는 못하실 것….”

“어허, 네가 어찌 그 입을 불경하게 놀리느냐!”

명주의 말을 듣다 못한 비영이 들고 있던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찻물이 넘쳐 탁자 위를 적셨으나 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명주를 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명주가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하고 서둘러 비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서늘한 목소리로 비영이 말했다.

“네가 감히 무어라고 지엄하신 황후마마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내가 예의와 존경으로 황후마마를 모신다면 황후마마께서 이유도 없이 나를 내모실 리가 있겠느냐?”

“마마, 소인이 입을 잘못 놀렸사옵니다…!”

“내가 설령 평생 회임을 하지 못하고 폐하의 눈길조차 한번 받지 못한다고 하여도 이 황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 나를 지켜주실 분은 오로지 황후마마뿐이시다. 그러니 다시는 허튼소리를 입 밖에 꺼내지 말거라.”

“예, 마마.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명주를 내려다보던 비영이 이내 낮은 한숨을 내쉬곤 기운 빠진 목소리로 ‘일어나라.’ 하여 그를 일으켰다. 한결 누그러진 시선으로 명주를 보며 비영이 말을 이었다.

“나를 염려하는 네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하여도 황후마마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시니 너도 괜히 마음 졸이지 말거라.”

“예, 마마. 소인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가서 새 차를 내와야겠구나.”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다소 침울해진 얼굴로 찻잔을 들고 나가는 명주를 바라보다 비영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명주의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후궁의 처지는 짧게 보면 황제의 총애로 결정되지만 길게 본다면 당연히 후사의 여부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나 비영처럼 애매한 위치의 집안은 위아래 모두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황자를 두어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비영은 여전히 그날을 기억했다. 황궁으로 들어와 처음 황후를 마주하였던 그때를 말이다.

비영은 저를 후궁으로 입궁시킨 부모님의 뜻을 십분 이해했다. 그 또한 부모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후궁이 되는 것을 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궁하는 길이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가마 속에서 비영은 피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수많은 후궁들의 이야기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웬만한 위치에 오르기 전까지는 너무 튀어서도 안 된다. 그 누구도 믿지 말고, 언제나 주위를 경계하고 의심하여 자신에게 쏟아질 황후와 후궁들의 암투로부터 스스로를, 그리고 집안을 지켜야 한다. 비영은 내도록 덜덜 떨면서도 그런 다짐을 자신에게 주입하며 황궁으로 들어왔다.

그러니 첫날, 첫 대면. 자네와 내가 반목하고 서로를 괴롭히며 황실을 어지럽히는 그런 흔하디흔한 황후와 후궁 사이는 되지 말자고. 황제 폐하와 종묘사직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나와 자네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 불행한 여인들은 되지 말자고. 폐하의 총애와 상관없이 서로를 아끼고 도울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어 보자고.

그런 내명부를 위해 자네가, 나를 도와줄 수가 있겠느냐고.

그렇게 묻던 황후가, 그날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틀림없이 지키며 비영이 어떤 암투에도 휘말리지 않게 하였던 황후가 얼마나 큰 구원이 되었는지. 비영이 아닌 사람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때 어린 비영은 앞으로 거대한 나무로 뻗어 나가게 될 황후의 그늘 아래 기꺼이 허리를 굽히기로 마음먹었으니. 비영은 자애로운 황제 폐하와 담대한 황후마마의 곁에서 더 두려울 것이 없었다.


“화,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아진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황제 앞에 인사를 올렸다. 평소 황제가 걸음 하면 버선발로 맞이하다시피 하던 이가 생경한 얼굴을 하니 덩달아 당황한 이한이 멋쩍은 목소리로 ‘일어나라.’ 하고 대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는 태도로 몸을 일으키는 아진을 향해 이한이 물었다.

“연빈은 안에 있느냐.”

“예… 예, 폐하. 안에 계시옵니다. 헌데… 헌데 저희 마마는….”

“……?”

“폐하, 그러니까 저희 마마께오서는….”

아진의 이상한 태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치 황제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아진은 황제와 연빈의 사이가 좋아지고 난 후로는 좀처럼 이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랬던 이가 오늘은 왜 이리도 의문스럽게 행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이한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반걸음쯤 뒤에 있던 오 태감이 대번에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머뭇거리는 게냐!”

그러자 아진은 갑자기 황제의 앞에 냅다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이한이 뭐라 묻기도 전에 엎드리다시피 허리를 숙인 아진이 말했다.

“폐하, 태의가 이야기하길 저희 마마께오선 당분간 반드시 정양을 하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오니… 감히 폐하의 걸음을 막아선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 아…!”

연빈이 몸이 안 좋아 쓰러졌던 것은 이한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디 알았다 뿐인가. 연빈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한 걸음에 황후궁까지 달려가 직접 태의의 보고를 받기까지 했다. 그러니 아진이 자신의 앞에서 이러고 있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대답을 하던 이한이 이내 그 뜻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껏 기가 막힌 표정을 한 채로 황제가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뭘로 보고…!”

“……예?”

“설마하니 내가 아픈 연빈의 시침이라도 받으려 왔겠느냐.”

이번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아진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 태감은 한숨을 내쉬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써야 했고,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아진은 서둘러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 폐하! 소,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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