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39)화 (139/167)

139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연빈의 상태는 어떠하냐.”

비빈들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급한 손짓으로 모두를 일으킨 황제가 다급히 침대로 다가가며 물었다. 답지 않게 초조한 목소리였다. 황후궁 별실에 누워 진맥을 받고 있는 건 문후를 드리다 쓰러진 화운이었다. 황후는 서둘러 태의를 부르는 한편 중천전에도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따라 일찍 조회를 마치고 나오던 이한이 때마침 바로 그 소식을 듣고 황후궁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별실에는 황후뿐만이 아니라 숙비와 정빈까지도 함께였다. 화운이 모두와 함께 있는 중에 쓰러진 탓에 다들 걱정이 되어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앉아서 하문하시지요, 폐하.”

침대 앞에 앉을 의자가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 채로 침대 안쪽을 기웃거리던 이한에게 황후, 자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한은 그제야 자신 때문에 모두가 앉지 못하고 서 있는 것을 보곤 내키지 않는 움직임으로 의자에 앉았다.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이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근래에는 그래도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혼절을 한 것인지 불안하고 초조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찌 이리 몸이 약하단 말인가. 어째서 사람 속을 이렇게 괴롭게 하나. 슬픔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몸을 보양해야 한다며 오 태감이 날마다 가지고 들어오는 각종 음식과 약들이 떠올랐다. 급기야는 앞으로는 내게 가져올 때 꼭 하나씩 더 만들어 연화운에게도 보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때, 태의가 침대에서 한 걸음 물러나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연빈이 왜 갑자기 혼절한 것이지?”

그러자 태의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색을 하며 ‘저, 그것이 폐하….’ 하고 대답을 망설이는 게 아닌가. 이한의 심장이 바닥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상태가 심각한 건가. 엄청난 병증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갑자기 몸이 약하여 일찍 병사하였다는 정안궁의 남후궁 이야기가 떠올랐다. 혹시 궁의 터가 좋지 않은 건 아닐까. 황제가 두려움에 마음이 움츠러들어 무어라 말도 꺼내지 못하자 자란이 대신 입을 열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대답을 머뭇거리는 것이냐. 어서 연빈의 상태에 대해 아는 대로 고하라.”

“예, 예…! 그것이… 그것이 연빈마마께서는 특별히 병이 드신 것이 아니고….”

“병이 든 것이 아닌데 어째서 쓰러져 있단 말이냐!”

이번에는 황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입술을 한번 꽉 깨물었다 놓은 태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연빈마마께오선 단지 기력이 쇠하신 것인데….”

“기력이?”

“안 그래도 몸이 약하신 분인데 최근 체력적으로 너무 무리를 하신 탓으로 보입니다, 폐하….”

“연빈은 후궁이다. 그런 이가 체력적으로 무리를 할 이유가 뭐……!”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 태의 때문에 속이 더 답답해진 이한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묻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후궁전에 있는 이가, 게다가 몸이 약해 움직이는 것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하는 이가 도대체 무리할 일이 뭐가 있다고 이리 혼절까지 한단 말인가 싶어 되묻던 이한의 머릿속에 명하원으로 피서를 온 이후로 매일같이 벌어지던 밤의 일들이 떠올랐다.

경험이 없던 것도 아닌데 화운과 보내는 밤은 뭐가 그렇게 다른지 한번 밤이 시작되고 나면 좀처럼 그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온몸의 열기는 밤이 다 가도록 사그라질 줄을 몰랐고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화운 역시 아주 조금씩이지만 익숙해지는 것 같아 이한은 그 역시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이한은 불현듯 그 밤들에 화운이 덜덜 떨며 제발, 그만, 하고 간청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의 몸이 약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한 나름대로는 자제를 한다고 했던 것도 화운에게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황제가 입을 다문 채로 갑자기 얼굴을 은은하게 붉히자 서서히 별실 안에 민망한 적막이 찾아들었다. 연빈이 쓰러진 연유를 모두가 짐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태의는 마치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황제의 앞에 엎드려 있었다. 그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자란이었다.

“허면 단지 기력이 쇠한 것뿐 다른 문제는 없다 이 말이냐.”

“예, 황후마마. 약을 드시고 끼니를 잘 챙기시며 며칠 정양하시면 될 것이옵니다. 다만….”

“다만?”

“다만… 그것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셔야만 하여….”

태의의 이마에서는 이제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을 정도였다. 황제가 고개를 숙이며 손으로 제 눈가를 가렸다. 태의의 말인즉슨, 당분간은 밤에 화운을 괴롭히지 말라 이 뜻이렷다. 자란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무슨 뜻인지 알았다. 자네는 이만 가서 약을 지어 서정궁으로 보내도록 하여라.”

“예, 황후마마. 폐하, 소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황제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말이 없었다. 대신 황후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태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숨 막히는 별실을 서둘러 떠났다.

“연빈에게 큰 문제가 없다 하니, 허면 저희들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이번에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황제를 향해 숙비, 비영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옆에서 덩달아 일어난 정빈, 송현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화운을 바라보며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으나 그것을 간신히 꾹꾹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삐쭉 올라간 송현의 눈이 아무도 모르게 황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연빈의 몸이 과하게 약한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 어찌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몰아붙였나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후궁이 되어 감히 황제 폐하를 향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자네들도 이만 돌아가게.”

이번에도 황제 대신 두 사람을 물리며 수습을 한 건 자란이었다. 비영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자란과 시선을 슬쩍 나누고는 이내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송현을 데리고 별실을 나섰다.

“폐하.”

그리고 눈짓으로 아랫것들을 전부 물린 자란이 이윽고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한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무래도 연빈은 폐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은 모양입니다.”

“그것이….”

“허니 폐하께서 연빈을 조금 더 섬세하게 살펴 주시지요.”

다시 말해, 후궁인 연빈은 감히 황제를 거부할 수 없을 테니 네가 알아서 자제하라 이 말이다. 물론 자란이 그렇게까지 노골적인 뜻으로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이한의 귀에는 꼭 그렇게만 들렸다.

사실 누군가를 취하는 일에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고 애가 달았던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던 건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한에게 지금까지의 합궁은 황제가 해야 하는 다른 의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화운과 보내는 밤은 그렇지가 않았다. 입을 한번 맞추면 견딜 수 없는 갈증이 밀려와 화운의 숨을 아무리 마시고 또 마셔도 속이 타고 안달이 났다. 그래도 제 딴에는 화운의 몸을 생각해 나름 자제한다고 한 것인데 유난히 몸이 약한 사람이라 매일 밤을 그리 보내는 게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러겠소….”

대답하는 황제의 몸이 자그마하게 쭈그러들었다. 다시 슬쩍 바라본 화운의 얼굴이 여전히 창백하여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폐하.”

그때, 문밖으로 물러나 있던 오 태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왜 자신을 부르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원래 조회가 끝난 후 호부상서에게 보고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헌데 황제가 바로 예까지 달려왔으니 호부상서는 영문도 모른 채 아까부터 중천전에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한은 대답을 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화운이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황후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다른 걸 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냥 쓰러졌다고 하여도 마음이 미어질 것인데 심지어 그 이유가 자신이라니 안타까운 마음이 오죽할까. 이한은 뼈가 도드라진 화운의 손을 잡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요동치는 제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럴 수만 있다면 깨어날 때까지 곁에 있어 주고 싶은데. 이한은 새삼 자신의 의무와 책임보다 앞세우고 싶은 어떠한 마음이 저에게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자신이 이런 마음을 가지면 천지가 개벽하고 지축이 뒤흔들릴 것만 같은 불안함에 사로잡혀 있었건만 이제 이한은 연화운의 얼굴을 보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은애의 감정을 떠올린다. 아픈 그의 곁에 있고 싶어 대신과의 약속을 미루고 싶다는 생각 따위를 하면서 말이다.

“폐하. 연빈은 제가 잘 돌보아 깨어나는 대로 돌려보낼 테니 이만 염려를 거두시지요.”

오 태감의 음성에서 대강 상황이 어떤지 파악한 자란이 한 걸음 다가와 말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로서 당당하게 연화운을 마음에 계속 담아둘 수 있으려면 더더욱 황제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걸 이한은 잘 알고 있었다. 연심은 황제에게 어떠한 면죄부도 줄 수 없다. 주어선 아니 된다. 그가 황제인 이상 사사로운 감정을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한은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