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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화운으로서는 감히 들을 수 없는 말씀에 화운이 너무 놀라 곧장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그는 더 무슨 말을 잇지도, 돌아보지도 못한 채 굳었다. 목 뒤에, 이한의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며 등허리가 빳빳하게 굳었다. 그 입맞춤은 성적인 함의가 담겨있다고 하기엔 지극히 단정하였으나 화운은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벼락처럼 머릿속에 지난 여러 밤 황제와 나누었던, 더없이 절절하고 애틋하면서도 동시에 노골적이고 망측하기까지 하였던 정사가 떠올랐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던 화운이 반사적으로 흘러내린 옷을 다급하게 끌어올려 벗은 어깨를 감추며 황제에게서 물러섰다. 떨리는 목소리로 화운이 말했다.
“이제, 이제 되었습니다, 폐하. 이제… 괜찮습니다.”
하지만 화운은 알지 못했다. 흐트러진 옷깃을 움켜쥔 채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자신의 모습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느라 멋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옷자락 사이사이로 드러난 흰 피부 위를 수놓듯 지나가고 있는 지금 그 모습이 얼마나 사내의 마음을 열망으로 뒤흔드는지를 말이다.
이한은 순식간에 화운의 몸을 끌어당겼다. 다시 마주친 이한의 눈동자는 거대한 화염처럼 타오르고 있어 화운은 그 열기에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한이 화운의 입술을 한번 부드럽게 머금었다가 떼고는 그의 귓가에 가깝게 다가가 속삭였다.
“나와 더 닿고 싶으냐.”
“폐, 폐하….”
“황제가 네게 물으니 솔직하게 대답하여야 할 것이다, 연빈. 지금 나와, 무엇을 하고 싶으냐.”
이한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화운이 몸을 웅크리며 그에게서 물러나고 싶어 했으나 이한은 결코 화운이 물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도 황제에게 황후궁으로 가시라는 둥 특별한 감정이라고는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굴던 사람이 제 손길 하나에, 입맞춤 하나에 이리 파르르 떨며 명백한 감정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한은 그야말로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져 나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턱 끝을 살짝 깨물며, 이한이 말했다.
“네가 말을 해주지 않으면 나는 알 수가 없다.”
“…….”
“운아.”
운아. 그 말에 화운의 숨이 잠시 멈추었다. 제아무리 황제라고 하여도 이것은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 이러한 태도로, 운아, 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너무나도 과한 처사였다. 화운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제 마음을 느끼는 사이 황제가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다오.”
이한에게는 그저 아주 작은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비록 뻔뻔하게 말을 하진 못하여도. 투기 따위를 해주진 않더라도. 그래도. 그 역시 아주 작게나마 자신을 원하고 있음을. 단지 후궁이라서 황제를 거절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진심을 다해 황제를 기꺼워하고 있음을 아주 조금만이라도 제게 보여주길 바랐다.
후궁의 마음 한 자락을 얻지 못해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황제라니.
이한은 그것이 황제를 암군에 이르게 하는 삿된 마음임을 알고 있었으나 도무지 벗어날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화운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방어적으로 제 옷을 움켜쥐고만 있던 화운의 손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더니 이윽고 이한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왔다. 그 손길을 느낀 이한이 고개를 들고선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화운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도망치고 싶은 듯 불안해 보이기도 했으나 그의 손은 여전히 이한의 뺨에 닿아 있었다.
이윽고 이한의 손이 화운의 작은 손등 위를 덮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화운의 여린 손바닥에 깊이 입을 맞췄다.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홀로 번뇌하고 방황하며 멋대로 다가가고 밀어내기를 반복할 동안에도 묵묵히 자신의 모든 변덕을 받아준 화운이지 않은가. 허니 이한은 자신 역시 화운의 느린 걸음을 기다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 손길 하나면. 나를 싫어해 밀어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이 작은 표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내가 전부 다 잘못했다.”
아무것도 일러주지 않은 채 홀로 방황했던 것도. 옹졸한 고집을 내세워 너를 다치게 내버려 둔 것도. 전부. 전부 나의 탓이니.
황제로서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한 마디의 말을 고백처럼 쏟아내며 이한은 곧장 화운의 입술을 찾아 머금었다. 또 하루의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서천. 잠깐만 나 좀 보자!”
막 침대에 누우려던 서천은 갑자기 저를 부르는 자문의 목소리에 의아한 얼굴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자문은 서천과는 다른 방을 쓰고 있는데 이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것이며 다급한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이야?”
서천이 군말 없이 일어나 나와서 묻자 자문은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서천을 이끌고 구석진 곳으로 가 목소리를 낮춘 채로 말을 꺼냈다.
“너 혹시 나 모르게 서정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서정궁에서? 무슨 소리야, 갑자기?”
“연빈마마랑 또 마주쳤다던가… 뭐, 그런 거 없어?”
난데없는 자문의 물음에 서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서정궁으로 옮겨온 이후엔 연빈과 스치듯 다시 만난 일도 없어 오히려 답답하던 서천이다. 이대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의문만 마음에 품은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려니 안 그래도 속이 타는데 자문은 왜 갑자기 이런 걸 묻는 걸까. 서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없어. 연빈마마를 뵙지도 못하는데 일은 무슨.”
“그런데 왜 소 내관이 너에 관한 것을 물었지?”
“뭐?”
생각지도 못한 자문의 말에 서천이 순간 목소리를 높였다가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늦은 시간이라 주변에 사람이 있지는 않았다. 서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 내관? 서정궁의 소정을 말하는 거야?”
“그래. 그 내관. 내가 아까 우연히 들었는데 걔가 너에 대해서 묻고 다녔대.”
“…연빈마마의 명으로?”
“글쎄, 나도 지나가다 얼핏 들은 거라 정확한 건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겠어? 연빈마마의 명이 아니라면 굳이 너에 대해 알려고 하는 이유가 뭐겠어.”
서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자신에게 뜻 모를 말을 하던 소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로 연빈마마가 무언가 눈치를 챈 건가.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사이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춘 자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연빈마마께서 설마 정말로 너와 하운에 대해 알고 계시기라도 한 거라면….”
서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즘 서정궁은 하루가 멀다 하고 폐하께서 걸음하시는 덕분에 온 궁이 들떠 있는데 고작해야 천한 시위에 불과한 자신에게 연빈이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의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밤의 기억 때문이니.
“아무래도 너 다른 곳으로 소속을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 야.”
진지하게 걱정해오는 자문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서천은 생각에 잠겼다. 수상한 것은 연빈뿐만이 아니라 매번 이상하게 의심스러운 소정 역시 마찬가지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연빈. 안색이 매우 좋지 않은데 괜찮은 것이냐.”
문후를 든 후궁들을 하나하나 살피던 황후, 자란이 창백하게 질린 화운의 얼굴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물었다. 안 그래도 먼저 화운을 마주하곤 마찬가지로 걱정하고 있던 숙비, 비영과 정빈, 송현 역시 마찬가지로 염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화운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황후마마. 다소 피곤하긴 하나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창백하구나. 오늘은 별다르게 이를 일도 없으니 어서 물러가 쉬도록 해라.”
“황후마마의 관대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말로는 괜찮다 대답을 하긴 했으나 사실 화운은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혹시나 폐하께 심려라도 끼칠까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참으며 억지로 식사를 하였더니 황제가 서정궁을 나선 이후로는 긴장이 풀려 더더욱 몸이 안 좋아졌다. 아진과 소정은 황후마마께 말씀드리고 오늘은 문후를 들지 말고 쉬시라 청을 해왔으나 홀로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이 있는 화운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온 궁의 시선이 서정궁에 몰려 있는데 여기서 아프단 핑계로 문후까지 들지 않는다면 분명 연빈이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황후마저도 업신여긴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 뻔했다. 화운은 자신이 억울한 소리를 듣는 것보다 황후마마께서 저 같은 것에게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싫었다. 하여 문후만 다녀오고 푹 쉬겠다 아진과 몇 번이나 약조해 가며 예까지 오게 된 것이다.
평소라면 황후의 제안에 괜찮다고 하였을 화운이었으나 지금은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힘에 부쳤다. 결국 화운은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이기 위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한쪽 무릎을 꿇고 감사 인사를 올린 뒤 황후의 손짓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눈앞이 핑, 하고 돈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시야가 빠르게 어두워지며 숨이 가빠왔다. ‘연빈마마!’ 하고 외치는 아진의 목소리와 함께 제 팔을 붙드는 손길이 느껴졌으나 한번 어그러지기 시작한 시야는 돌아올 줄 몰랐다. 귓가에 들려오는 삐- 하는 이명과 함께 이윽고 세상이 온통 까맣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