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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37)화 (13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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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오래전, 이리 달라지기 전의 연화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투기를 하지 않는다는 건 곧 연모의 감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화운은 자신의 거짓에 대한 핑계를 그렇게 대곤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이기적인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그 말을 떠올리니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돌이켜 보면 변한 뒤 연화운은 한 번도 자신에게 고백한 일이 없다. 심지어 황제인 자신이 너를 연모하노라 절절하게 말하였을 때에도 되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이한은 문득 손발이 차갑게 질리는 것 같은 추위를 느꼈다. 어째서 그는 제게 한 마디의 마음도 표현해 주지 않았던 걸까.

“너는… 너는 정말……!”

이한은 그에게 묻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꼈다. 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냐고. 나의 그 무엇도 욕심나지 않느냐고. 너는, 나를 어떤 감정으로 대하고 있느냐고.

하지만 이한은 물을 수 없었다. 도무지 물어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답을 머뭇거린다면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견디기 힘들 것이고, 순순히 원하는 답을 내어놓는다고 한들 단지 그가 후궁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우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괜한 오기가 생긴 이한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그리 원한다니 당장 황후궁으로 가마. 그러면 되겠느냐?”

싫다고 말하거라. 서운한 얼굴을 한 번 보여주거라. 이한이 그토록 간절한 속내를 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화운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무례한 저의 청을 들어주시니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폐하.”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는 화운의 태도에 서러우면서도 분통이 터진 이한은 ‘그놈의 성은은 망극할 것도 많다!’ 하고 그를 향해 쏘아주고 싶었으나 마음이 너무 서글퍼 그럴 힘조차 나질 않았다.

대신 이한은 몸을 일으켰다. 화운이 따라 일어섰다. 이한은 보란 듯이 돌아서는 시늉을 했다. 화운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황제 폐하를 배웅합니다.’ 하고 아예 인사까지 올린다. 사람이 어찌 이리도 무심하고 괘씸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한은 네가 그렇게 나오니 나도 더 이상은 널 특별히 대우하지 않겠다 그리 이를 갈며 미련 하나 없다는 듯 발걸음을 떼었다.

…떼기는 하였다.

“…….”

하지만 결국 이한은 침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걸음을 멈췄다. 우뚝 선 이한은 몇 번이나 숨을 내쉬다가 그대로 입을 열었다.

“정말 내가 가도 상관없느냐.”

“…….”

“하나도 아쉽지 않겠느냐. 밤새 후회 같은 건 아주 조금도 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그제야 화운은 꿇은 채로 고개를 살짝 들어 황제의 뒷모습을 보았다. 좋아하는 것을 빼앗긴 소년처럼 축 늘어진 어깨가 못내 마음에 걸렸으나 화운은 자신이 본분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 것을 알았다.

“제가 무슨 염치가 있어 감히 폐하의 걸음을 붙들고자 하고, 폐하께서 떠나심을 아쉽다 하겠습니까. 저는 이미 너무나도 과분한 것을 받고 있습니다.”

진심이었다. 안 그래도 화운은 이미 제가 너무나도 과분한 것들을 얻고 있다는 생각에 매 순간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니 폐하께서 저를 총애하신다 하여 그분의 밤을 독차지하는 일을 어떻게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폐하께서 다른 여인을 품는 것이 정말로 내 마음에 괜찮은지, 화운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화운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 따위는 생각하지 않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화운이 대답하는 순간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본 이한은 화운의 얼굴에 어린 쓸쓸한 서러움을 보았다. 말로는 아쉬움이 없다 하지만 그 순간 화운은 너무나도 아프고 서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나도 안쓰럽고 처연하여 이한은 조금 전까지 돌덩이가 꽉 들어찼던 것 같은 가슴이 금세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그렇지. 너라고 정녕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이한은 서서히 화운의 마음을 납득했다. 그의 성격을 따져볼 때 대놓고 은애의 감정을 말하거나 투기를 보여주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황제의 후궁이 아닌가. 이한은 서둘러 화운에게 돌아가 꿇고 있던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이 시각에 갑자기 황후궁에 간다 하면 황후도 당황하고 번잡스러워할 것이다. 게다가 이대로 서정궁을 떠나면 내가 느닷없이 너에게 소박을 놓았다는 풍문이 퍼지지 않겠느냐.”

“아….”

“그러니 오늘은 예서 머물고, 황후궁이든 어디든 다음에 가마. 그럼 되겠느냐.”

이한의 목소리는 화운을 달래듯 부드러웠다. 이쯤 되면 화운 역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저야 무슨 소리를 듣든 상관이 없으나 황후마마의 상황도 그렇고 자칫 잘못하면 폐하의 명성에 해가 갈 수도 있는 데다가, 서정궁의 아이들이 또 괜한 무시를 당할까 봐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이내 화운이 수긍하는 얼굴로 ‘예, 폐하.’ 하고 대답을 내어놓자 기다렸다는 듯 이한이 그를 이끌어 침대에 앉히곤 자신도 냉큼 곁에 앉는다. 그리고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밖을 향해 외쳤다.

“아진.”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아진이 재빠르게 들어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황제가 말했다.

“연빈의 상처에 바르는 약이 있다고 하였지. 오늘도 빠트리지 않고 잘 발랐느냐.”

이미 낮에 아진이 꼼꼼하게 약을 발라준 터라 그 질문에는 화운이 대답을 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빠르게 아진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아직 바르지 않았습니다, 폐하.”

“아진…?”

사실과 다른 대답에 화운이 의아한 목소리로 아진을 불렀으나 그를 무시하고 이한이 곧바로 아진의 말을 받았다.

“그리 중요한 약을 빠트려서야 되겠느냐. 지금 가져오너라. 내가 직접 할 것이다.”

어찌 약을 빠트렸느냐 타박을 하고 있으나 이한의 목소리는 진짜로 아진을 탓하려 하는 어떤 날카로움도 없었다. 그것이 아진의 말이 거짓임을 눈치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상황이 흡족하였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이 없는 아진은 또다시 화운이 뭐라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예, 폐하!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하고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화운이 곧 정신을 차리곤 말했다.

“폐하. 약은 오늘 이미 발랐습니다.”

“맨날 괜찮다고만 하는 네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아진이 바르지 않았다고 하질 않았느냐.”

“폐하, 그것이 아니옵고….”

“설마… 아진이 감히 황제를 거짓으로 능멸하려 들기라도 하였다, 이 말이야?”

이한이 과장되게 눈썹을 찌푸리며 되묻자 화운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딘지 모르게 황제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아진이 거짓을 고한 마당에 그것을 따지고 들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아진이 잘못될 수 있는 일을 감수할 수 없는 화운에게는 더 이상 황제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잠시 착각을 했나 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제야 다시 흡족한 표정이 된 이한은 심장의 박동을 따라 쿵쿵 울려대는 손을 가만히 말아 쥐었다. 그게 뭐라고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긴장이 되고 마음이 요동치는지 모를 일이다. 그사이 빠르게 돌아온 아진이 황제의 손에 연고를 넘기곤 또 재빠른 움직임으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손에 쥔 연고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한이 말했다.

“돌아앉거라.”

“폐하, 저는 정말 괜찮습….”

“어허.”

“…….”

이한의 눈동자는 이미 묘한 욕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 화운은 마치 색이 옮듯 그 열망이 제 전신을 물들이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허리 아래쪽으로 힘이 들어가 당황한 화운이 서둘러 황제의 시선을 피하며 그를 등진 채 몸을 돌렸다. 이윽고, 이한의 손이 뒤에서 화운의 옷을 가만히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

“…….”

침실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옷이 겹겹이 벗겨지며 스치는 소리와 서로의 숨결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마침내 윗옷이 다 벗겨지고 맨 어깨에 공기가 닿자 화운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제게 남은 흉터에 황제의 시선이 닿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밤을 보낼 때에도 황제는 그 흉터를 여러 번 매만지고 집요하게 그 위로 입술을 내리곤 했으나 이토록 정적인 고요함 안에서 시선이 닿아오는 건 또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

순간, 어떠한 예고도 없이 이한의 손끝이 흉터에 닿았다. 약이 묻지 않은 맨손이었다. 갑작스러운 감각에 놀라 작은 신음을 터트린 화운이 황급히 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낯 뜨겁고 민망하여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이제 아프지는 않으냐.”

대신 황제는 제가 아픈 듯 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흉터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건만 여전히 심장이 천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흉터는 황제의 죗값이나 다름없었다. 하늘 아래 유일한 천자의 죄책감이었다. 자신이 안일하게 그를 내버려 두어서. 그가 내 마음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을 뻔히 보면서도 무시해서. 그래서 화운은 크게 다치고 이 흉터를 평생 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예, 폐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한은 화운이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을 하여도 도무지 제 마음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황제의 손이 천천히 연고를 화운의 흉터에 펴 바르기 시작했다. 손끝이 느리게 살결을 문지르자 화운은 마치 그 부분만 감각이 극대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저릿해 발끝을 자꾸만 오므렸다 펴길 반복했다.

그때, 황제가 말했다.

“…내가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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