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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빈마마는 이미 황실의 사람이온데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워 호사를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자네도 참으로 융통성이 없어서 탈이야.”
“저와 제 부인은 그저… 연빈마마께서 또다시 폐하를 실망시켜 드릴까 봐 그것을 염려하는 것뿐입니다.”
사실 그것은 이한 역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화운의 모든 변화는 물에 빠져 기억을 잃은 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만약 어느 날 갑자기 그가 기억을 되찾게 되면 과연 어떻게 변하게 될까 걱정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태의 또한 화운이 기억을 찾을지 못 찾을지, 찾게 된다면 언제 찾을 것이며 그 후엔 어떻게 변할 것인지 확실한 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이한은 그들 부부의 걱정을 십분 이해했다.
“폐하….”
확실한 것이 없으니 대답해줄 수 있는 것도 없어 입을 다물고 있던 이한을, 연주원이 불렀다. 그러나 다음 말은 쉬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연주원은 그때 말하고 싶었다. 연빈마마를 너무 총애하지 마시라고. 그러하면 사사롭게 소신을 치켜세우고, 소신의 뒤에 서서 소신의 눈치를 보려 드는 이들이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고. 그런다고 하여 소신이 감히 무도한 생각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나 폐하께서는 응당 끊임없이 소신을 경계하고 의심하셔야 한다고. 연주원은 신하 된 도리로 황제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도 늦은, 뻔뻔한 죄책감이라고 하여도 어쩔 수 없었다. 주원은 황제를 위해 아들의 삶을 진창으로 밀어 넣은 아비였다. 헌데 이제야 겨우 애정을 받고 있는 아들을 두고 황제에게 다시 그를 모질게 대하셔야 한다고, 그런 말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하여 연주원은 아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폐하. 사람의 속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고, 제아무리 꼿꼿하고 청렴하던 이도 한순간에 변절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그러니 나더러 자네를 전부 믿지 말고, 항상 경계하고 의심하라 이 말을 하고 싶은 게지.”
영민한 황제는 연주원의 뜻을 곧장 이해했다. 아마 그 속에 담긴, 차마 하지 못하였던 아들에 대한 속내도 이미 읽어냈을 것이다. ‘그 늙은이 꼬장꼬장하기는.’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황제의 목소리에 연주원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한이 말했다.
“걱정 마라. 네가 뒤로 무슨 일을 꾸며댄다고 한들 당할 내가 아니니. 설마하니 나를 아직도 어린 태자로 보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 보아라.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하고.”
“예,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어느새 거대하고 찬란한 태양이 되어 온 나라를 전부 비추고 있는 황제의 앞에 늙은 대신이 허리를 굽혔다. 여전히 그 태양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고목이었다.
“내가 왔는데 어찌 그런 표정인 것이냐.”
이한은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화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말했다. 이제 와 그가 버선발로 자신을 반기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나 이렇게 대놓고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화운이 무거운 표정으로 답이 없자 더욱 마음이 초조해진 이한이 다시 물었다. 화운은 그제야 시선을 조심스럽게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폐하. 황후마마께는 아니 가십니까.”
이한의 입매가 일순 꾹 다물렸다.
이한이 서정궁에서 밤을 보낸 것도 벌써 여러 날이 되었다. 서정궁의 아이들은 이제 저녁이 다가오면 당연히 폐하께서 오실 줄로 알고 미리 준비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 일을 두고 황궁은 폐하께서 꽤 오랫동안 연빈의 시침을 받은 적이 없으니 새로운 마음에 잠시 자주 찾는 것이 아니냐는 말과, 폐하의 총애가 정말로 연빈에게 쏠린 것이 아니냐는 말이 오가며 온통 시끄러웠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황제는 본래 황후서부터 정빈까지 모두와 제법 공평하게 시간을 보내던 분이셨다. 물론 당연히 일국의 정궁인 황후와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긴 하였으나 그를 제외하곤 수를 세어 비교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였다. 그러던 황제가 다른 누구도 아닌 연빈의 처소로 매일 걸음을 하고 있다. 눈과 귀가 넘쳐나는 황궁에서 말이 아니 나올 수가 없는 일이다.
오죽했으면 궁인들 사이에 폐하께서 언제까지 연빈의 처소를 찾으실지에 대한 사사로운 내기가 오가고 있다는 풍문이 돌아 황후가 친히 경고를 내린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 일을 두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하게 흘러가는 건 오히려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는 연빈을 포함한 내명부뿐이었다.
하여간에 그런 상황에서 이한은 오늘도 서정궁을 찾은 것인데. 생각지도 못한 화운의 말에 이한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미미하게 들끓었던 피가 확 식는 기분이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한이 말했다.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하느냐?”
순간 이한은 이 일을 두고 누군가 화운에게 눈치라도 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황후인 자란은 물론이고 내명부의 누구도 그럴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분명 연화운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렷다.
매사 남 생각만 하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그 속이 뻔했다. 황제의 성총을 ‘감히’ 자신이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 염려되는 것이다. 이한은 문득 자신과 함께 있을 때 화운이 이따금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득한 얼굴을 하곤 했던 것을 떠올렸다. 아마도 화운은 내내 그런 걱정들을 마음에 담고 있던 모양이다. 이한은 화운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런 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괜한 신경 쓰지 말아라. 그럴 시간에 네 몸 걱정이나 더 하든지. 오늘도 어지럼증을 느꼈다 하질 않았느냐.”
이한의 말을 들은 화운이 그것을 폐하께서 어찌 아셨냐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이한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화운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이미 아진을 통해 미주알고주알 전부 다 전달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뻔뻔한 얼굴로 이한이 말했다.
“네 얼굴에 전부 다 쓰여 있어.”
이한은 자신의 능청에 화운의 표정이 다소 풀어지길 바랐지만 그는 여전히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다.
사실 황제라고 그러한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황제는 그 누구보다 가장 치열하게 번뇌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생각하는 황제의 총애란 다른 게 아니었다. 어느 후궁이 더 많은 황제의 밤을 차지하는가, 누가 황제의 성총을 가장 많이 입는가, 그것이 세간에서 총애를 가늠하는 가장 첫 번째 기준이다. 그러니 이한이 아무리 황후를 존중하여 챙기고, 숙비와 정빈을 골고루 신경 쓴다고 한들 그들과 밤을 함께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황제의 마음은 공평하다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한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때때로 이한은 결심하곤 했다. 오늘은 황후를 찾아가리라. 지난번 제대로 위로해 주지도 못하였던 숙비를 찾아가 그 마음을 달래 주리라. 가족들과 떨어져 외로움을 많이 타는 정빈을 챙겨 주리라. 그런 생각을 이한이라고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밤이 되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하는 오 태감의 말을 들으면 서정궁에 오도카니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연화운의 얼굴만 떠올라 도무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조차도 핑계이다. 정작 참을 수 없던 건 이한 그 자신이었다. 낮에도 내도록 그리워 몇 번이나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던 사람을 하룻밤이라도 보지 못하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스스로 겪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면 간신히 뛰어넘었던 경계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되어 어느 한 후궁만을 이토록 찾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냐.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선황이 귀비를 무턱대고 총애하던 것과 과연 다른 일이냐. 너는 정말로 네 선황과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가 있겠느냐. 그런 목소리가 때로는 이한 자신의 목소리로, 때로는 어머니의 목소리로, 때로는 밤마다 마음을 갈고 닦았던 어린 자신의 목소리도 떠올라 마음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런데도 차마 다른 궁으로 가자는 말을 할 수 없던 그 간절함 마음을 과연 누가 알까.
그런 번민을 마음에 꾹꾹 내리누르고 예까지 찾아왔건만 이한은 남의 속도 모르고 어째서 황후궁으로 가지 않으셨냐 묻는 야속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쭈뼛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으나 이한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비록 하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그 깊은 속내가 어여쁘지 않은 것은 아니라, 결국 한참 만에 이한은 얕은 한숨을 내쉬곤 다시 말했다.
“네가 그리 마음에 걸린다면 내일 조찬은 황후궁으로 가서 들도록 하마. 어떠냐.”
이한으로서는 제법 양보를 한 셈이었다. 왜냐하면 아침 일찍 일어나 제 품에서 곤한 숨을 내쉬며 잠든 화운의 얼굴을 한참 만끽하다가 오붓하게 식사하는 시간은 이한이 너무나도 기대하여 소중히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운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폐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황후마마를 찾아 밤을 보내시는 것이….”
“너는 도대체…!”
하지만 기어코 화운의 입에서 밤이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때에는 이한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큰 목소리를 내었다. 문득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연화운은 질투도 아니 한단 말인가? 그는 정말 내가 황후궁과 다른 후궁들의 처소에서 번갈아 가며 밤을 보내길 바란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