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35)화 (135/167)

135

“그러고 보니….”

각지에서 밀려드는 보고서들 중 답이 필요한 곳에 교지를 적어 내려가던 이한이 문득 붓을 멈추고 말했다. 곁에서 수발을 들던 오 태감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오 태감이 열심히 먹을 갈고 있던 벼루로 향해 있었다.

“서주국에서 보내온 것 중에 좋은 벼루가 있질 않았던가?”

“예, 폐하. 그것으로 바꿀까요.”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춘 오 태감이 물었다. 이한은 잠시 대답 없이 벼루를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 싶어 오 태감이 다시 한 번 여쭈려 한 순간 시선을 거둔 이한이 새로운 종이를 앞에 펼치더니 쓱쓱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적혀 내려가는 글자를 보고 있던 오 태감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이내 붓을 탁, 내려놓더니 종이를 오 태감에게 내밀었다.

“사람을 시켜 서정궁에 전해라. …그 벼루랑 같이.”

“예, 폐하.”

“거 종이에 먹 안 묻게 조심하고!”

저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휙, 내밀어 놓고선 막상 오 태감이 편지를 쥐려 하자 냉큼 잔소리를 덧붙인다. 어쩐지 천자의 위엄이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리 말하며 입술을 씰룩거리는 황제의 얼굴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행복한 얼굴이었다.

주군이 고뇌하고 방황하던 때에는 덩달아 마음이 불안하였던 오 태감은 이것도 다 좋은 일이려니 하며 먹을 쥐지 않았던 손으로 조심스럽게 황제의 서신을 갈무리했다.

“빨리 가라고 해라.”

굳이 한 번 더 덧붙이는 황제의 명도, 그래, 다 좋은 일이었다.


“저거 봐. 푸른색을 띠는 애들도 있네.”

먹이를 먹으려 몰려드는 물고기들을 구경하던 화운이 다소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정안궁의 연못에서는 보지 못했던 색이라 신기한 모양이었다. 곁에 서서 화운을 살피고 있던 소정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안궁으로 돌아가면 그곳에도 저 색의 물고기들을 몇 마리 채워두라 할게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하지만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화운의 시선은 여전히 영롱한 빛을 띤 물고기들을 향해 있었다. 그런 화운을 향해 소정이 무어라 더 말을 하려던 찰나, 뒤쪽에서 내관 하나가 달려와 화운의 앞에 섰다.

“연빈마마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폐하께서? 우선 일어나거라.”

“예, 마마.”

“폐하께서 무슨 일로 너를 보내셨느냐.”

황제 폐하, 라는 단어가 내관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부터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화운이 물었다. 내관은 곧장 허리를 굽히며 화운을 향해 들고 온 것을 내밀었다. 딱 보아도 여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 아닌 작은 상자와 그 위에 놓인 서신 한 통이었다. 익숙한 서신을 보는 순간 화운의 얼굴에 미소가 확 번져나갔다. 내관이 말했다.

“폐하께서 연빈마마께 이것들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어쩐지 마음이 급해 화운이 직접 손을 내밀어 물건을 받으려 하자 황급히 ‘마마.’ 하고 그를 불러 막은 소정이 제가 나서 내관에게서 서신을 먼저 받아 화운에게 전달하고는 상자 역시 받아 들었다. 화운은 서둘러 서신을 먼저 열어 보았다.

『요즘엔 통 먼저 편지 쓰는 일이 없으니 먹을 갈 벼루가 없어 그런가 싶어 보낸다.』

달랑 한 줄 적혀 있는 편지의 내용은 얼핏 보면 이 무슨 난데없는 소리인가 싶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한 줄의 말을 읽은 화운은 더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소정이 눈치 좋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윤기가 도는 검은빛의 벼루가 놓여 있었다.

“이리 귀한 것을….”

“먼저 폐하께 감사를 전하시지요, 마마.”

척 보기에도 여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 아닌 벼루에 화운이 당황하는 사이 소정이 다시 입을 열어 그를 일깨웠다. 그제야 화운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관을 향해 말했다.

“전하느라 수고하였다. 귀한 선물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폐하께 전해다오. 답신은 곧장 써서 바로 보내마.”

“예, 연빈마마. 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화운은 내관이 돌아가는 것을 잠깐 보았다가 다시 제가 받은 벼루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서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 폐하께서 쓰시길 바라며 만들었을 것이 분명해 보였는데, 이것을 제가 받아도 되는 것인지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황제의 편지 한 줄이 떠올라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것은 분명, 최근엔 통 먼저 서신 한 통 보내는 일이 없는 화운을 두고 투정을 부리신 것이리라.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감출 수가 없는 미소를 결국 내버려 둔 채로 화운이 소정을 향해 말했다.

“이만 들어가자.”

서둘러 답을 보내지 않으면 아니 될 일이었다.


“왜 괜한 짓을 하고 그러는지.”

이한은 제 명으로 홀로 남아있는 연주원을 향해 눈을 흘기며 못마땅한 목소리를 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연주원은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웃었다. 그 태평한 얼굴에 이한이 쯧, 하고 혀를 한 번 찼다.

대신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큰소리가 났다. 황제가 터무니없는 의견을 낸 연주원을 전에 없이 크게 나무란 것이다. 대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주원에게 이렇게까지 큰 목소리를 내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황제가 연주원만 남고 모두 물러가라고 하자 돌아가던 대신들의 얼굴엔 저마다의 의아함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단둘이 마주하고 있는 이한과 연주원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연주원의 웃는 낯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이한이 입을 열었다.

“실수로라도 안 할 멍청한 소리를 하는데 그걸 모르겠나? 뻔하지.”

“부족한 소신에게 맞춰주신 폐하의 자비로움에 감사드립니다.”

이번에는 아예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하는 주원의 모습에 고개를 한번 절레절레 저은 이한이 곧 다소 낮아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이야?”

“…….”

“애초에 고작 이런 연기가 의미가 있는지도 의심스러운데.”

“폐하. 사람들은 보기보다 단순하고 보이는 것에 쉽게 넘어가는 법입니다. …그들은 연빈마마께서 행동을 바르게 하지 못하시니 연씨 가문도 크게 타격을 입을 거라 여기던 이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연빈을 자주 찾으니 그것 때문에 또 지나치게 자네를 치켜세우려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본래 늙으면 걱정이 많아지는 법입니다, 폐하.”

흔들림 없는 주원의 말에 이한이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빈을 향한 황제의 달라진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비단 궁 안에 있는 이들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야 워낙에 연빈을 제외하면 황후를 비롯한 비빈들이 모두 사이가 좋았고 황제 역시 그들을 공평하게 대하고 있었으니 대신들도 딱히 크게 휘둘리며 눈치를 볼 일이 적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연빈이, 황제가 가장 믿고 아끼는 연주원의 아들인 연화운이 갑자기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진 것이다.

그동안 연주원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그의 아들뿐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왔을 정도로 박대를 받던 연빈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 종묘사직에서 연씨 가문을 견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뜻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그 아들마저도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과연 누가 있어 연씨 가문을 대적할 수가 있겠는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대신들의 머릿속에는 역사 속 수없이 많았던, 황제조차도 제 마음대로 운신할 수 없게 만들었던 권력자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이 있다면 연빈이 사내라 후사를 볼 수 없다는 점, 그 하나뿐이었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주원이 제 아들을 황궁으로 밀어 넣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니 주원은 그들 중 대부분이 오늘 황제와 자신 사이에서 오고 간 불편한 기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거라 확신했다.

이한의 침묵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던 주원이 이번에는 먼저 말을 꺼냈다.

“폐하.”

“…….”

“연빈마마께서 그리 많이 달라지셨습니까.”

묻는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아들이 황제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 놓고 기뻐하지 못하던 숙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혼란스러워했고, 한편으로는 한결 좋아졌을 아들의 황궁 생활에 기뻐하고 싶어 하면서도, 어느 날 아들이 갑자기 기억을 찾으면 예전처럼 돌아가 더더욱 힘든 나날들을 보내게 되는 건 아닌가 불안해했다. 그때마다 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라고 무심한 대답을 내놓은 주원이라고 어찌 그 마음까지 다 편했겠는가.

주원의 물음에 황제가 잠시 생각하는 눈동자를 하고는 대답했다.

“달라졌다는 말조차도 다소 무리가 있지. 꼭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연빈이 연달이 큰일을 겪었는데… 원한다면 내 자리를 마련해줄 수도 있다.”

물에 빠졌다 살아난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연회에서의 일까지 있었다. 본래 후궁이 한번 입궁을 하면 회임을 하지 않는 이상 사가의 가족들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긴 하나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화운은 사내라 회임을 할 가능성마저 없으니 연주원씩이나 되는 아비를 한번 불러 만나게 해준다고 하여도 크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참을 고민하던 연주원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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