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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조심스럽게 화운의 몸을 당겨 제 어깨와 가슴 부근에 머리를 올리게 만들고는 이불 아래로 손을 넣어 허리와 등을 쓸어주었다. 티 하나 없이 부드러운 감각 끝에, 화운의 어깨에 남아있는 흉터가 손끝에 걸렸다. 화운은 몸을 크게 움찔했으나 이한은 조금 더 노골적으로 화운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조금 더 자자.”
“…….”
“악몽이 찾아오면 내가 쫓아줄 테니 걱정 말고.”
여전히 타인과 몸이 닿는 감각은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어제도 밤새 집요하게 황제의 입술이 닿고 또 닿았던 상처를 그가 손으로 만지자 절로 허리에 힘이 들어가 어쩔 줄 모르던 화운이 이한의 말에 덜컥, 숨을 멈췄다.
악몽. 그것을 악몽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토록 따뜻하고 행복한 꿈을 악몽이라고 하여도 되는 걸까.
하지만 화운은 그 꿈이 고통스러웠다. 무서웠다. 꿈속의 자신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죄책감 같은 건 이제 다 잊어버린 것처럼. 연화운의 삶이 정말로 제 것이 된 것처럼. 꿈속의 자신은 그토록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제게 주어진 모든 것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될까.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자신은 지금 가지고 있는 알량한 죄책감마저도 전부 버린 채 이 삶에 온전히 안주하게 될까. 화운이 느끼는 두려움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기인했다.
‘운아. 아무래도 내가 너를 은애하는 모양이다.’
귓가를 울리는 황제의 심장 소리와 함께 지난밤 들었던 그 절절하고 애틋한 고백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황제가 자신을 연모한다고 하였다. 단 한 번, 얼굴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어 황궁으로 들어왔던 이에게 황제는 이제 저의 마음이 온통 네 것이라고 말했다.
화운은 제 마음이 언제부터 연정이었는지 몰랐다. 뭇사람들이 객잔에서 저마다의 경험을 털어놓았던 것처럼 자신도 실은 그분께 첫눈에 반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존경이었던 마음이 연화운이 된 후로 차근차근 가까워지며 연심으로 변모하게 된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화운은 황제가 저를 향해 고백을 해올 때 그저 깨달았을 뿐이다.
아, 다만 경외라고 생각하였던 나의 마음 역시 어느새 연심이 되어있었구나. 나 또한 폐하를 이토록 은애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하지만 서로 통한 마음에도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던 마음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터질 듯 벅차오르는 마음 한구석에서 칼날 같은 죄책감 하나가 내도록 마음을 저미고 있었던 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걸 안다면 실망하고 분노하여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될 사람의 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받아들이고만 싶은 그런 마음을. 그 고통을 누가 알까.
천천히 고르게 퍼지는 황제의 숨소리를 가늠하며 화운은 눈을 감았다. 언젠가 폐하께서는 화운을 향해 죄인처럼 굴지 말라 하신 적이 있었다. 하지만 거짓과 기만으로 황제의 마음까지 얻어낸 죄인인 화운은 그리하여, 긴긴밤이 지나도록 그분께 차마 저 또한 폐하를 연모한다 답을 돌려드리지 못했다.
“요즘 폐하께선 어떠하신가.”
이른 새벽, 황제가 기침을 하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시각에 오 태감은 황후의 명으로 황후궁에 와 있었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태감은 황후라고 해도 감히 함부로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란이 이따금 오 태감을 불러 제가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 알아보는 건 꽤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일로, 이한도 이미 용납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자란의 물음에 오 태감이 다소 멋쩍은 얼굴을 하고선 입을 열었다.
“…소인이 폐하를 오래 모셨지만 요즘처럼 행복해 보이시는 얼굴을 처음 뵈옵니다.”
“하하. 본궁과 식사를 하실 때도 좀처럼 미소를 지우지 못하시더군.”
“예, 마마. 요즘 대신들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냐는 이야기를 수시로 듣고 계십니다.”
“그리도 좋으실꼬.”
정작 저도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 황후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중얼거렸다. 어찌 보면 황후의 앞에서 쉬이 꺼낼 수 없을 말을 오 태감은 크게 어렵지 않게 늘어놓았고 황후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오 태감은 이것이 온전히 지금의 황후마마께서 가진 성정 탓인 것을 알았다.
황후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아마 한동안은 서정궁을 떠나고 싶지 않아하실 것이네. 처음으로 그토록 소중한 것을 손에 쥐었으니 잠시라고 연빈을 홀로 두고 싶으시겠는가.”
“…….”
“그래도 오찬 정도는 숙비나 정빈의 궁에 가서 드실 수 있도록 자네가 신경을 써 주게. 쉽지는 않겠지만 말일세.”
쉽지는 않을 거라 말하는 황후의 목소리에는 미미한 장난기가 어려 있다. 오 태감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황후마마. 성심을 다하여 폐하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허면 이만 돌아가 보게. 폐하께서 일찍 찾으실지도 모르니.”
“예. 그럼 소인 이만 물러가옵니다, 황후마마.”
발소리도 죽인 채 오 태감이 물러가고 나자 황후는 고개를 돌려 이제야 여명이 밝아오는 창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랑에 눈이 멀었던 황제와 사랑 하나만을 갈구하던 황후, 그리고 사랑을 이용하던 여인의 이야기는 결국 비극적으로 끝이 나고야 말았다.
허면, 이제야 겨우 사랑을 알게 된 황제와 사랑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은 황후, 그리고 삶의 어느 순간에 불현듯 사랑을 얻게 된 사내의 이야기는 과연 어떤 끝을 맞이하게 될까.
가 보지 않은 길의 끝은 누구도 알 수 없겠으나 자란은 결코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도록 가진 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을 위해서.
화운은 가만히 서서 서정궁의 벽으로 옮겨 걸린 목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끝이 움찔거렸으나 쉬이 목검을 다시 잡을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지난번 서천을 갑자기 마주쳤던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제는 더 이상 전처럼 검을 휘두를 수는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에 있었다.
물론 훈련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체계적으로 배우고 체력을 키우면 당연히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순 있을 터다. 하지만 지금의 연화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건강했고 또 어릴 때부터 무술을 배웠던 하운처럼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화운은 이제 그걸 인정해야 했다.
손을 들어 티 하나 없이 매끈한 검날을 만져 보았다. 그것은 같은 검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수없이 많은 훈련 덕분에 이가 모두 나가고 표면에 온갖 상처가 나 있던 하운의 연습용 목검과는 전혀 달랐다. 문득 화운은 이것이 꼭 연화운과 하운의 모습이나 다름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연화운은 다시 하운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본래 연화운의 혼은 그의 몸을 떠났고, 본래 하운의 몸은 이제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화운의 검이 오래전 하운이 손에 잡았던 그 검처럼 세상을 가르지 못하듯 화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면 이제는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난날은 이제 그만 마음에 묻어버리고 황제의 애정 어린 시선과 온기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로 모르는 척을 하다가, 아예 잊은 척을 하다가, 그렇게 이대로 영영 이 삶에 머무르면 전부 괜찮은 것일까. 누군가에게 조언 하나 얻을 수가 없는 답답한 마음은 견딜 수 없이 행복한 마음 가운데에도 뿌리를 내렸다.
내가 정말 연화운이었다면. 폐하께 거짓을 고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이토록 과분한 폐하의 마음을 더없이 기꺼워하며 행복해할 것인데. 어째서 나는 가진 것도 무엇도, 아무것도 없는 이로 태어나 유일하게 욕심내던 분의 곁에서도 온전히 그분의 마음을 받을 수가 없는가.
생전 하지도 않던 한탄이 든 화운이 검에서 손을 거두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몸을 돌리자 언제 들어왔는지 소정이 서 있었다.
“응, 소정. 무슨 일이야?”
“마마, 혹시 무료하십니까?”
“응?”
“검을 보고 계시는 모습이 그리 보이셔서… 괜찮으시면 연못 구경을 하지 않으시겠어요?”
소정의 말에 화운이 ‘연못?’ 하고 되물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서정궁에도 풍경이 아주 빼어난 정원과 연못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곳으로 온 뒤 매일 정신이 없어서 구경 한 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소인이 물고기 먹이도 준비를 해두었는데….”
소정은 품에서 조심스럽게 먹이 주머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그제야 화운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소정은 다소 소심한 구석이 있지만 또 그만큼 세심하고 눈치가 빠르기도 했다. 아마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는 자신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마음이 어여뻐 화운이 애써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까, 그럼? 아진은?”
“아진 낭자는 태의원에 약재를 받으러 갔어요.”
“직접?”
“예, 마마. 다른 건 몰라도 마마의 약재는 무조건 자신이 직접 보고 설명을 들어야 한다고 하던데요.”
“아진도 참….”
별걸 다 직접 챙긴다, 하는 마음으로 말을 뱉으면서도 화운은 어느덧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진도, 여기에 있는 소정도 처음엔 화운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기 바빴는데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렇게 화운을 염려하고 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화운은 여전히 거짓으로 점철된 저의 삶도 누군가를 구해낼 수 있음을 실감했다.
그러다 또다시 습관처럼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황제도. 태어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그분도. 하여 화운의 물음으로 인해 처음으로 좋아하는 색을 가져 보았다는 황제 폐하도 아주 조금은 저의 거짓으로 인해 행복해졌다고 위안을 삼아도 되는 걸까.
또다시 가라앉는 감정을 애써 띄우며 화운이 말했다.
“그래. 연못 구경을 가자. 여기도 정안궁처럼 물고기들이 많았으면 좋겠구나.”
“마마께서 원하시면 연못 가득 물고기들을 채워놓을 수도 있으니까요.”
가볍고 정다운 대화가 이어졌다. 화운은 밀려오는 수많은 고뇌를 소정의 목소리로 막으며 연못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