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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33)화 (133/167)

133

“…예?”

“꼭 네 머리카락을 떠올리게 하는 색이 아니더냐. 그래서 나는 다른 색이 아닌 이것을 내 손으로 손수 골랐다는 말이다.”

생각지도 못한 이한의 말에 화운이 몹시도 놀라 눈을 깜빡였다. 이한은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도 화운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네가 내게 물었지.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고.”

“아….”

화운은 그제야 황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날 화운이 분명 그리 물었다. 좋아하는 색이 있으시냐고. 황제는 그때 하지 못하였던 대답을. 화운이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였던 바로 그 대답을 지금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색 하나 듣는 것이 뭐라고 알아차림과 동시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 후로 줄곧 붉은색을 보면 시선이 가더구나. 원래 좋아했던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색깔 같은 것을 딱히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한에게는 이것이 제가 본래 좋아하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인지, 아니면 이제 와 새롭게 눈에 담게 된 것인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이 이제는 마음에 특별히 여겨 눈에 담는 색을 가졌다는 것뿐이었다.

“하여도 이제는 같은 것이라면 붉은색을 고르고 싶고, 지나가다가 우연이라도 마주하면 눈길을 한 번 더 주게 되니 이것을 내가 좋아하는 색이라 칭하여도 문제는 없겠지.”

“…옳습니다, 폐하. 잊지 않고 제게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상하게 손끝이 저릿한 것 같아 화운은 소매 안에 감춘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푸른색을 좋아하고, 폐하는 붉은색을 마음에 담으신다니 왠지 그 조합이 썩 어울린다는 유난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사이 이한은 여전히 할 말이 남은 듯 말을 이었다.

“운아.”

여전히 적응할 수가 없는 호칭이 화운의 마음을 부수며 들어왔다. 화운이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그런 화운을 바라보는 이한의 눈동자가 어느새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네 덕분이다.”

“폐하, 그것은….”

“아니. 내 말을 끝까지 듣거라. 네가 물어주어서.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여겨주어서.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황제로서가 아닌 ‘나’를 생각해 보았어.”

“…….”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너는 짐작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지워진 삶을 찾아내고 구해낸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한이 스스로 잃은 것을 알지 못해 찾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켜켜이 쌓이고 쌓인 흙과 돌무더기를 전부 허물어내며 오로지 연화운만이 황제가 아닌 ‘성이한’을 찾아내었다. 연화운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이의 물음이었다면 이토록 진지하게 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을 터였다.

“수도 없이 너를 밀어내려고 노력했다. 너를 향한 나의 감정이 별것 아니라고, 그렇게 내 자신을 수도 없이 속였어. 너를 탓하기도 하고, 내 자신을 탓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나는 네게서 도망치려 안간힘을 썼지.”

혼란했던 수많은 밤들이 떠올랐다. 주변을 가득 메운 안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뛰고 또 뛰었다. 하지만 겨우 길을 찾았다고 생각해 빠져나오고 나면 또다시 연화운의 앞이었다. 자꾸만 그랬다.

“그런데도 어쩔 수가 없었어.”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흡사 울먹임처럼 들리기도 했다. 천하의 황제 폐하가. 지고한 천자가. 어느 연약한 한 명의 사내 앞에서 이토록 떨고 있었다.

숱한 과거의 상처를 다시 떠올리고 또 떠올려도. 밤마다 고통에 잠겨 있는 태후를 찾아가 그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채찍질했어도.

“아무리 노력해도 참을 수가 없었어. 이제 더 이상은… 모른 척을 할 수도 없게 되었구나.”

이한은 지난밤 그를 안고, 이제야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마침내 도달한 듯 느껴지던 충만한 행복감을 기억했다. 머나먼 길을 돌아 이곳까지 왔다. 이한은 이제 도망치는 일을 멈추기로 하였다.

“폐하… 폐하…….”

화운은 절박한 심정으로 그를 불렀다. 그의 말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둥소리 같은 거대한 경고음이 귓가를 때리는 것만 같았다. 두려움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화운은 이러한 말을 들어서는 안 됐다. 하지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천천히 미소를 지은 이한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연화운. 운아. 내가 너를… 아무래도 내가 진정으로 너를….”

하지만 결국 화운이 무엇도 할 수 없었던 건.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도, 이한의 말을 막아서지도 못하였던 건. 두려움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그 말 한 마디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화운의 뺨으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황제의 손이 화운의 젖은 뺨을 감쌌고, 이윽고 이한은 처절하게 참고 참았던 말을 토해낸다.

“내가 너를 은애하는 모양이다.”

“아….”

“황제가 아니라 내가. 성이한이. 너를 이토록 연모하고 있어.”

심장을 찢고 고통을 퍼붓는 희열이 화운의 전신을 가득 채웠다. 그것이 아프고 좋아서. 두렵고 행복해서. 서럽고도 소중하여서.

화운은 천천히 다가오는 이한을 마주 보다 눈을 감았다. 입술을 파고드는 뜨거운 열기가 제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낼 거라 해도, 지금 이 순간의 화운은 아무래도 좋았다.


꿈에서 화운은 고운 볕을 받으며 정원의 그네에 앉아 있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세상 만물이 그저 아름답게 보여 무릉도원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음이 지극히 편안했다. 오랫동안 화운을 괴롭혔던 죄책감 같은 감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화운은 제가 연화운은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따금 정안궁의 궁인들이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상하게도 얼굴은 모두 뿌옇게 보였으나 화운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모두 자신과 오랜 시간 동안 정안궁에 함께 있었던 이들인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때나 마주쳐도 불편하거나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화운의 사람들이었다.

마음에는 한 점의 근심이 없다. 어려움도 없었다. 밤을 지새워 고민해야 하는 것도, 피하려고 애써야만 하는 감정도, 아무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 화운의 마음에 있는 건 오로지 다가올 순간들을 향한 기대와 설렘뿐이었다.

햇살이 따스해 손을 가만히 내밀어 보았다. 곱고 흰 손은 이제 본래 제가 타고나기라도 했던 것처럼 익숙하다. 어디 손뿐인가. 곱고 고운 얼굴도, 마르고 낭창한 몸도, 병약하기 그지없는 체질까지도. 이제는 화운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때 저만치에서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화운은 자신이 여기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것이 바로 저 우렁찬 소리임을 알아챘다. 폐하의 말씀으로는 저녁 때 오시겠다고 하였으나 화운은 여전히 해가 하늘 높이 떠 있는 대낮부터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고, 황제 역시 해가 떨어지려면 한참이나 남은 시간에 정안궁으로 찾아왔다. 화운은 천천히 그네에서 내려와 바닥을 딛고 섰다. 황제는 벌써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자 당연한 수순처럼 황제가 두 손을 내밀어 화운의 어깨를 잡았다. 결코 화운은 차가운 바닥에 꿇리고 싶지 않다는 황제의 의지였다.

‘바닥에 꿇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거늘. 하여간에 황제의 명을 이렇게 무시하는 건 너뿐일 것이다.’

봄날의 햇살처럼. 가을의 바람처럼 온화한 황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생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던 화운으로서도 모를 리가 없을 만큼 명백한 애정이 온통 화운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시선이 마주쳤고, 서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여전히 주변을 오고 가는 궁인들이 아니었다면 진즉 입을 맞추었을 두 사람이다.

‘들어가자.’

황제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화운을 이끌며 말했고 화운은 자연스럽게 황제의 곁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자연스럽게 얽히는 두 사람의 손가락은 이곳 정안궁에서는 이제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어느 날, 어느 때라고 굳이 명명할 수도 없을 만큼 무수히도 많았을.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날의 순간이었다.


“흐읍…!”

화운은 거칠게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자 아직 낯선 서정궁의 천장 무늬가 보이며 현실 감각이 되돌아왔다. 서서히 꿈속의 장면들이 떠오르자 절로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우스운 일이다. 화운이 꾼 꿈은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꿈이었는데. 아마도 누구나 바라 마지않을 그런 꿈인데도 화운은 마치 악몽을 꾼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때, 커다란 손 하나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 화운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넘겨 주었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이한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화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악몽을 꾸었느냐.”

“아니. 아닙니다, 폐하.”

“그런데 어찌 이리 창백해.”

“…정말 괜찮습니다.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이한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다소 마음이 진정된 화운이 이불을 슬쩍 당겨 목 아래까지 덮고는 시선을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 행동에 이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일어나자마자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또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고 있으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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