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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32)화 (13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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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흠흠. 몇 번이나 괜한 헛기침을 한 이한이 이내 식탁에 올라있던 고기 한 점을 화운의 접시로 옮겨주며 애써 퉁명스럽게 말했다.

“잘 먹어라. 어찌 그리 깨작이고만 있어.”

“…예, 폐하. 감사합니다. 폐하께서도 어서….”

황제가 직접 음식을 건네주는 건 보통 황후에게도 잘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엄청난 성은과도 다름없는 행동에 다소 허둥거리며 인사를 하던 화운은 그 순간 무언가 잔뜩 기대되는 표정으로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한의 시선을 마주하였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절대로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당황한 화운이 잠시 머뭇거리며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이한은 조금 더 노골적인 표정으로 이번에는 아예 슬쩍 턱짓까지 하고 있다.

“…폐하께서도 어서 드세요.”

결국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한 화운이 다른 찬을 하나 집어 조심스러운 손길로 황제의 접시 위에 놓아준다. 사실은 그조차도 법도에 어긋난 일이었으나 오 태감마저도 내보낸 곳에서 그것을 지적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고요함 속에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오고 가는 말은 많지 않았어도 하염없이 좋기만 하였던 시간이었다.


“음…?”

교대를 하고 서정궁의 밖으로 빠져나가던 서천은 저만치 멀리서 익숙한 인영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정안궁에 있을 때는 문 앞을 지켰던 서천은 명하원으로 오면서 자문과 함께 뜰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왜? 어, 저기 소 내관 아니야?”

덩달아 걸음을 멈춘 자문이 서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더니 아는 척을 했다. 자문의 말대로 거기에는 소정이 홀로 서 있었다. 서천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소정을 바라봤다. 그는 연못 앞에 서서 가만히 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정안궁에서의 어느 밤에도 서천은 뜰에 홀로 서서는 연빈의 침전을 보고 서 있던 소정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서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 볼 때는 몰랐으나 갈수록 여간 수상쩍은 이가 아니다. 그 후에도 서천과 마주칠 때마다 속에 무언가를 감춰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하여간에 서천은 그를 마주할 때마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얼핏 보면 유약하고 소심한 내관처럼 보였으나 서천이 가지고 있는 어느 감각이 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만 해도 아무도 없는 연못 앞에 혼자 서 있는데 멀리서 봐도 이상하게 속을 불안하게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왜 그래?”

소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서천을 향해 자문이 물었다. 서천은 그제야 소정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설령 그가 정말 의심스러운 일을 한다고 한들 그건 서천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고, 단지 촉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연빈에게 무어라 말을 일러줄 길은 더더욱 없었다. 자문과 함께 몇 걸음 더 걸어가던 서천이 반사적으로 다시 한 번 소정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끝없는 바닥으로 침잠하는 사람처럼 가라앉는 소정의 눈동자에 어린 감정이 무엇인지, 서천은 알 길이 없었다.


오찬을 마친 후 숙비는 오랜만에 황후궁을 찾았다. 좋은 차가 있으니 함께하지 않겠냐는 황후궁의 전언을 받은 숙비, 비영은 크게 반가워하며 한달음에 황후궁으로 찾아왔다. 홀로 있을 송현이 다시 마음에 걸리긴 하였으나 황후마마께서 굳이 저에게만 말을 전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았고, 비영 또한 오랜만에 황후마마와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싶었던 참이라 굳이 말을 전하진 않았다.

은은하면서고 깊고 청량한 향이 금세 내실을 가득 채웠다. 천천히 차향을 음미하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던 황후, 자란이 이내 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분은 괜찮은가.”

비영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자란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흘긴다.

“요즘 저를 보는 이마다 그리 물으니 아무래도 제가 폐하께 소박이라도 맞은 모양입니다.”

“하하. 그러했나.”

“이미 정빈이 먼저 물은 바가 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비영의 음성에 내심 사소한 걱정을 가지고 있던 황후가 마음을 내려놓았다. 이전의 연빈을 제외하곤 그들 내명부에서 폐하의 성총에 집착하는 이는 없었으나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단순한 것이던가. 가지고 있을 땐 몰라도 남에게 빼앗겼다고 생각이 들면 갑자기 집착하고픈 마음이 드는 것이 인간이었다. 자란은 한결 편안해진 시선으로 비영을 건너보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의 대답은 무엇이었지?”

“목숨을 빚진 은혜는 짐승도 잊지 않는 법이라 하였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살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을 해놓고도 비영은 태연하게 찻잔을 들어 한 잔 마시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황후마마께서 좋은 차라 하셨으니 최상급일 줄은 당연히 알았지만 이것은 정말로 향도, 맛도 너무 좋네요.”

“…자네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군.”

비영은 자신이 내놓은 답에 대해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고, 자란 또한 더 묻지 않았다. 비영의 대답이 무슨 뜻인지 전부 다 파악했기 때문이다.

황후는 진심으로 비영이 황후 다음으로 가장 먼저 내명부의 일원이 된 것을 행운이라 생각했다. 물론 황후는 어떤 후궁이 들어왔어도 스스로 잘 해낼 자신이 있었으나, 비영 같은 인물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조금 더 번거롭고 귀찮은 길이 되었을 것이다. 자란은 그동안 자신을 존경하고, 따르고, 때때로 황후를 대신하여 품위 없는 말과 행동을 대신 해주기도 하였던 비영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자네가 좋아할 것 같아 챙겨 두었으니 돌아갈 때 가지고 가게.”

더 묻지 않고 흘러가는 자란의 말에 비영이 눈꼬리를 가득 접어 웃었다. 자란은 아무래도 황후궁으로 들어왔던 고급 비단 몇 필을 함께 보내야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며 편안하게 오후의 차향을 즐겼다.


성이한은 거기 앉아서 같은 상황을 두고 몇 번이나 고민하고, 속을 끓이고, 그러면서도 끝끝내 외면하고 물러서기만 했던 일을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이한이 들여다보고 있는 건 지금껏 수도 없이 봐왔던 후궁들의 패,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연빈, 연화운의 패였다.

예전 어느 날 그랬던 것처럼 손끝으로 패에 적힌 이름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그때에는 절대로 그 길을 가서는 아니 된다고 여겨 ‘연빈’이라는 글자가 제 손가락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아프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황제의 손끝에 닿아오는, 연빈이라는 글자를 따라 패인 홈은 더없이 부드럽게 애틋하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긴 길을 돌아왔다. 후궁 한 명의 처소를 찾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뒷걸음질 치고 도망치길 반복하며 길이 아닌 곳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지 아니하면 되는 일을 두고. 얼마든지 정신을 차리고 올바른 길을 만들어갈 수 있으면서도 마치 그 패 한 번을 뒤집고 나면 세상이 전부 개벽하여 황후는 불행하여지고, 그 자신은 다시없을 암군이 되기라도 할 것처럼 겁을 집어먹었다.

“물러가라.”

한참을 패를 만지작거리던 황제가 이내 손을 거두곤 몸을 뒤로 빼며 명했다. 어제 서정궁에 드시기도 하였고, 오늘은 무언가 확실히 달라 보이시기에 연빈의 패를 반드시 뒤집을 거라 확신하던 위 총관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때 황제가 곧바로 오 태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서정궁으로 갈 것이다.”

“아, 하옵시면….”

“네가 다녀와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위 총관은 황제의 뜻을 알아챘다. 황제는 경사방이 아니라 오 태감에게 직접 가서 뜻을 전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위 총관이 얼떨떨한 얼굴로 눈만 굴리고 있자니 이미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오 태감이 허리를 굽혔다.

“예, 폐하. 다녀오겠습니다.”

“아예 석찬을 서정궁에서 할 것이니 그리 알라고 해.”

“…예, 폐하.”

그것은 한시라도 빨리 서정궁으로 걸음을 하고 싶은 황제의 마음임을.

이미 그 모든 마음을 눈치채고 대답을 내어놓는 오 태감의 곁에서 위 총관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이 색이 어떠하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한참을 답지 않게 눈치만 보던 이한이 불쑥 화운의 앞에 팔을 내밀며 물었다. 저녁 식사는 어느덧 자연스럽게 술상으로 이어졌고 이한은 이미 세 잔쯤을 입안에 털어 넣은 뒤였다. 몸이 약해 술을 마시면 곧장 탈이 나고 마는 화운은 술 대신 과일향이 나는 냉차로 분위기를 맞추고 있었다.

화운의 시선이 제 앞으로 내밀어진 이한의 팔로 향했다. 흑적색의 용포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화운으로서는 자주 보지 못했던 색이었다. 안 그래도 오찬 때 서정궁을 찾은 황제를 마주한 순간부터 오늘따라 유독 더 헌앙한 자태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던 차였다.

차마 전부 감추지 못한 미소를 입가에 은은하게 두른 채로 화운이 대답했다.

“…무엇인들 아니 그렇겠습니까만 진중하면서도 무게 있는 색이 매우 잘 어울리십니다, 폐하.”

이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태자조차도 아니었던 황자 시절부터 외형에 관한 칭찬을 지겹도록 들어왔던 이한이었지만 투박하리만큼 소박한 화운의 칭찬은 이상하리만큼 특별하게 마음에 박혀왔다. 그러다 문득 제가 본래 오늘 하고자 했던 말이 있었음을 떠올린 이한이 곧바로 흠흠, 헛기침을 한번 해보고는 숨을 골랐다. 이 말을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사실은 내도록 고민을 거듭했다.

“나는 이것을… 네가 생각나서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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