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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궁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아침부터 끝도 없이 귀한 선물들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내무부에서 정 총관이 직접 으리으리한 물건들을 가지고 댓바람부터 들이닥친 것이 시작이었다. 정 총관은 자신이 가지고 온 물건들 중 가장 좋은 것은 당연히 폐하께서 친히 보내라 하신 것들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신이 얼마나 섬세하게 신경 쓰고 또 신경 써 물품을 꾸렸는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댔다.
어디 내무부뿐이었겠는가. 수방은 물론이고 천문을 읽는 흠첨감에서부터 황실의 동물을 관리하는 상사원에 이르기까지 화운으로서는 이름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황궁의 곳곳에서 저마다 가진 귀한 것들을 앞 다퉈 서정궁으로 보내왔다. 정 총관은 지금은 그나마 별궁에 있어 이 정도이지 주안성에 있었으면 분명 배는 더 되었을 거라고 제가 뿌듯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화운은 여기가 별궁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혼이 빠진 건 비단 화운뿐만이 아니었다. 연빈을 모시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궁인들은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안 그래도 다른 궁에 비해 궁인이 턱없이 적었던 정안궁이다. 소정이 수령태감으로 오면서 다행히 내관의 수가 다소 충당이 되었으나 여전히 경험이 부족한 어린 궁녀들이 대다수였던 탓에 아진은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녀야만 했다.
물론 그리 고생을 한 아진은 물론이고 궁인들 모두가 믿기지 않는 상황에 마음이 들뜨고 기뻐 함박웃음을 지으며 움직였던 건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다들 얼마나 신이 난 건지 오후가 되어서는 더 이상 찾아오는 이도 없고, 받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도 거의 다 끝이 났건만 궁인들은 여전히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 여기저기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겨우 부산해진 서정궁을 정리한 아진은 다른 이들을 전부 물러가게 하고 홀로 화운과 함께 침전에 있었다. 문득 조금 전 들었던 서서의 목소리가 떠올라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서서는 깨진 그릇이 있어 내무부에 그릇을 새로 받으러 갔는데 늘 자신을 무시하던 내무부의 어린 내관 한 놈이 어찌나 안면을 싹 바꾸고 굽실거리던지 십 년 묵은 체증이 전부 내려가는 것 같았다고 신이 나서 떠들고 다녔다.
이러다간 물색없이 큰 웃음을 터트릴 것 같아 아진은 연신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이들이 연빈마마를 감히 무시하지 못하게 된 것도 좋고, 아이들이 주눅 들지 않고 어디든 당당하게 다닐 수 있게 된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아진을 가장 행복하게 만든 건 드디어 제 주인이 황제 폐하의 시침을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본디 두 눈으로 볼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후궁을 주인으로 모시는 종은 결국 폐하께서 얼마나 자주 저의 주인을 찾는지를 셈하며 총애를 가늠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두 분의 사이가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도 좀처럼 밤을 보내고 가지는 않으시는 폐하 때문에 아진이 남몰래 속을 끓인 밤이 얼마나 되었던가.
도무지 욕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제 주인은 그런 생각 같은 건 조금도 하고 계시지 않는 것 같았으나 아진까지 신경을 끄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아진은 문득 고개를 들어 화운을 바라보았다. 이토록 거대한 폭풍을 몰고 와놓고도 마치 세상사에서 한 걸음 떨어진 사람처럼 고요한 제 주인을 말이다. 선물이 들이닥칠 때는 그것을 민망해하고 멋쩍어하더니 이제는 언제 서정궁에 난리가 났었냐는 듯 신경을 끄고 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한순간에 달라진 자신의 처지에 들뜨기 마련이건만 화운은 여전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침전에 앉아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
이런 분이시니 폐하께서도 어여쁘게 아니 보실 수가 없겠지. 괜히 코끝이 찡해진 아진이 서둘러 자신의 감상을 흐트러트리곤, 의자에 앉은 채 서책을 읽고 있던 화운이 어딘가 불편한 듯 몸을 뒤틀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마. 잠시 누우시겠어요?”
그제야 책에서 시선을 뗀 화운이 ‘응?’ 하고 되묻자 아진이 속삭이듯 다시 말했다.
“그… 몸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아….”
“괜찮으세요…?”
행여나 제 주인을 너무 민망하게 만들까 아진은 연신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비록 첫날밤은 아니라고 하지만 화운이 시침을 든 건 벌써 까마득하게 먼 일이니 분명히 몸에 무리가 갔을 것이다. 게다가 워낙에 몸이 약한 주인이질 않은가. 아진의 걱정은 지극히 당연했다. 화운은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던 책을 덮어버리고는 아진을 향해 웃어주었다.
“응. 괜찮아. 그리고 폐하께서 오실지도 모르니….”
말을 잇는 화운의 뺨에 옅게 붉어졌다. 사실 내도록 책을 손에 들고는 있었지만 좀처럼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오찬 시간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걸 알면서도 폐하께서 언제쯤 오실까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다른 일정이 생겨 오지 못하실 수도 있다고 미리 핑계를 대고 있지만 마음은 벌써 폐하께서 걸어오실 그 길에 나가 있다.
아진이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보지도 못하고, 화운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뜻하지도 않았건만 지난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아침에 일어난 뒤로 종일 이런 상태였다.
지난밤에는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을 수도 없이 했다. 낯선 감각들이 버거워 그만둬 주길 바라며 제발, 제발 하고 애원을 했다가, 정말로 그 열기가 제게서 멀어질까 봐 단단한 어깨를 끌어안으며 입맞춤을 갈구했다. 어깨에 남은 흉터 위로 몇 번이나 입술과 혀끝이 내려앉았을 땐 전신을 강타하는 저릿한 감각에 제 몸이 통제를 벗어나 떨리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순간의 감각에 화운이 제 몸을 감싸며 진정하기 위해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을 때.
조금 상기된 얼굴을 하고 안으로 들어온 소정이 말했다.
“마마! 지금 폐하께서 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급히 몸을 일으키는 화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보통 오찬을 하는 시각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으나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몸은 괜찮으냐.”
온갖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젓가락을 깨작거리기만 하던 이한이 이내 은근한 목소리로 화운에게 물었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던 화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입을 열었다.
“…예, 폐하. 괜찮습니다.”
“그… 내가 어제 너무 과했던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말을 하는 이한의 얼굴도, 그 말을 듣는 화운의 얼굴도 보기 좋게 붉어졌다. 처음이나 다름없을 화운이 아파하거나 겁을 먹지는 않았으면 해서 나름의 최선을 다해 자제하고 또 자제하였던 이한이었으나 사내의 본능이라는 것이 전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지라. 종국에는 눈물에 잔뜩 젖은 얼굴로 울먹이듯 헐떡이던 화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걱정이 되었다.
이한은 그 시간이 화운에게도 좋은 시간이었길 바랐다. 그 밤이 자꾸만 떠올라 하루 종일 그 무엇에도 제대로 집중을 할 수 없던 자신처럼. 지난밤 자신이 누구를 품에 안았는지를 떠올리면 연신 웃음이 흘러나와 대신들 앞에서 망신을 당할 뻔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그 자신처럼. 이한은 화운에게도 지난밤에 설레고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시간이었기 바랐다.
이한의 물음에 제가 조금 전까지 계속 떠올리고 있었던 민망한 장면들이 또다시 생각나, 화운은 황급히 제 마음을 갈무리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으음….”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는 화운의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괜찮은 척을 하느라 그냥 하는 말인지 쉬이 알아챌 수가 없어 이한은 시선을 내리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저는… 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화운의 말에 이한이 거의 젓가락을 떨어트리다시피 하곤 다시 화운을 쳐다보았다. 화운은 차마 황제를 마주 보지 못하고 애먼 곳을 바라본 채로 말을 이었다.
“제게는 너무나도 꿈만 같은… 그런 밤이었사오나….”
“아… 아아….”
“제가 너무 서툴러 폐하께오선 불편하셨지요….”
이번에 주눅이 든 건 화운이었다. 시침을 든 일은 둘째 치고 남과 가벼운 입맞춤조차도 해본 적이 없던 화운은 진심으로 그것이 염려되었다. 황제 폐하는 분명 많은 경험이 있으실 터인데 서툴다 못해 무지한 자신의 태도에 불편하고 마음이 식어버리시진 않았을까 자꾸만 걱정이 되었다.
“아니다!”
그때, 사위를 뒤흔들듯 우렁찬 소리가 화운의 귓가를 때렸다. 깜짝 놀란 화운이 고개를 돌리자 붉어진 얼굴을 한 황제가 거기에 앉아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운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한이 먼저 말을 이었다.
“무슨…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불편하기는커녕 나는 너무 좋아서 하루 종일 네 생각밖에 안 났…!”
이미 할 말은 다 해버리고 난 뒤에야 입을 꾹 다문 이한과 화운 사이에 애매한 정적이 흘렀다. 서로가 민망하여 황급히 피해버린 시선은 애꿎은 허공을 이리저리 훑고 있는데 그 분위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 입가에는 자꾸만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