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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30)화 (13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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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황후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넙죽 긍정하기엔 염치가 없고 부끄러워 화운이 말을 머뭇거렸다. 그사이 얼굴에 잠시 미소를 지었던 황후, 자란이 이내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채 입을 열었다.

“연빈.”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자란의 목소리의 무게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단지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자란이 지금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예, 황후마마.’ 하고 화운이 대답하기가 무섭게 자란이 말을 이었다.

“허나 너는 사내의 몸이지.”

“…….”

“그것은 네가 앞으로 얼마만큼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후사를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말을 하며 자란은 화운의 얼굴을 살폈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또한 황궁 안에서는 결코 당연할 수가 없는 말을 두고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후사이니 무어니 하는 것은 단 한 번도 제 일이라 여겨본 적이 없는 화운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황후마마. 알고 있사옵니다.”

“…두렵지 않느냐.”

그래서 황후는 물었다. 화운은 비록 몸이 연약하긴 하지만 오래 전 총애를 독차지하였다던 남후궁만큼 심각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한번 들어오면 죽어서도 나갈 수가 없는 이 황궁에서, 자란은 과연 연화운이 그리는 미래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폐하께서 제게 과분한 성은을 내려주시고, 황후마마께서 이토록 관대하게 저를 돌봐주시니 제가 두려워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황궁에서 후사가 없는 후궁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다. 비록 지금은 내명부에 아이를 낳은 이가 없으나 나라를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폐하의 피를 이어야 할 테지.”

“…….”

“사소한 바람에도 권력의 향방이 바뀌어버리는 이 황궁에서 너는 너를 지켜줄 최소한의 방패막이도 없이, 오로지 폐하의 총애에 기대어 긴긴 날들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세상에 영원한 권력이란 없다. 언젠가는 연씨 가문의 명성도 전과 같지 않을 날이 올 것이고 어쩌면 그 일은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빨리 다가올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 만약 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될 아이가 연빈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기라도 하면. 부황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어머니를 외롭게 한다고 억하심정을 품기라도 한다면. 그러다 어느 날 황제의 총애조차 그의 곁을 떠나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과연 누가 있어 연화운의 앞을 막아 그를 지켜주겠는가.

“그것이 정녕 두렵지 않더란 말이냐.”

두려움은 사람을 심약하게 만들 수도 있고, 악독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마는 이들이 이 나라의 역사에는 너무나도 많았다. 후궁이라 하여도 피해 갈 수 없는,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앉아 화운은 자란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황후의 말은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화운에게 지금처럼 속편하게 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네 한 몸을 지키기 위해 무슨 수라도 내어야 할 것이라 경고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화운은 두렵지 않았다. 먼 미래가 걱정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단 한 번도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었다. 바라는 것도 없었다. 하루하루 살면 사는 것이고 죽으면 그만인 채로, 하운은 아주 오랫동안 그런 삶을 살았다.

그런 하운에게 미래가 되어주신 분이 바로 지금의 황제였다.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는 내일을, 손에 쥐고 싶은 미래를, 하운은 황제를 마주한 뒤 처음으로 마음속에 품어 보았다. 그러니 지금 화운에게는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지난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도. 단 한 번 꿈같은 일이 되어도. 오늘이 지나 두 번 다시 폐하께서 자신을 찾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래도.

그저 같은 궁에 머물기만이라도 하고 싶어 무턱대고 이 황궁으로 들어온 화운에게는 이미 과분한 미래를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비록 한 번의 죽음을 겪어야 했지만 그래도 이토록 소중한 것을, 소중한 사람들을 손에 쥐게 된 화운은 더 이상 그 어떤 욕심도 없었다.

짧은 침묵을 뒤로하고 화운이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저는 이미 그날에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황후는 덧붙이는 설명이 없이도 지금 화운이 말하고 있는 ‘그날’이 언제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연화운이 새로 태어났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던 그날. 죽음과 새로운 삶이 공존하였던.

“뜻하지 않게 더하여 사는 삶에 이미 과분한 것까지 받고 있으니… 제가 감히 무엇을 더 욕심내겠습니까.”

“더하여 사는 삶이라….”

“저는 그저 남은 생을 폐하께서 계신 이 황궁에서, 황후마마를 모시며 그리 조용히 살아갈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제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하운의 몸은 이미 죽어 사라졌다. 이것은 하운의 삶이 아니고, 하운이 화운으로서 얻은, 이미 제게는 터무니없이 과분한 삶이었다. 그러니 설령 남은 삶이 다시 어느 진창으로 굴러 떨어진다고 하여도 화운은 기꺼이 그것을 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여 정말 다른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화운의 태도를 끝까지 살피고 있던 자란이 이윽고 말했다.

“연빈은 듣거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엄의 무게가 한 번 더 달라지며 더더욱 무거워지자 화운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예, 황후마마.’ 하고 대답했다. 자란이 말을 이었다.

“너는 앞으로, 지금처럼 폐하의 마음을 귀히 여기거라.”

연빈에게 가지고 있는 황제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크고 무거운지, 그것을 자란이라고 전부 다 알 수는 없겠으나 자란은 적어도 연화운이 자신에게 있어 가장 큰 기회임을 알았다. 어쩌면 이 사내는 오로지 황제로서의 삶만이 있었던 황제에게 ‘성이한’의 행복을 알게 해줄지도 몰랐다. 자란은 그것을 바랐다.

“네가 탐내서는 안 되는 자리를 탐하지 말고.”

하여 자란은 생각했다. 연화운이 지금처럼 본분을 지키고.

“네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욕심내지 말고.”

황제의 총애를 무기로 휘둘러 다른 이들을 다치게 하지 않고.

“…지금 내 앞에 고한 것처럼 정녕 그리 살아간다면.”

지금처럼 하염없이 다정한 사람으로, 연약한 황제의 마음을 안아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허면 본궁이. 황후인 내가.”

그렇다면 자란은 반드시.

“그 어떤 권력의 폭풍 속에서도 너를 지켜주마.”

그 자신을 지키고, 황제를 지키듯, 연화운을 지킬 것이었다.

황제조차도 알지 못하였던 황후의 오랜 염원이 연화운을 만나 비로소 펼쳐지던 날이었다.


“…….”

잠시 숨을 돌릴 겸 중천전의 뜰을 걷던 이한은 불현듯 자신의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입어보는 것도 아닌데 흑적색의 용포가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보통 황제의 용포는 아침마다 각기 다른 종류로 세 가지가 준비되고, 그중 하나를 황제가 선택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한은 딱히 무언가를 직접 골라본 적이 없었다. 그까짓 의복 어떤 것을 입든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하여 이한의 의복을 정해주는 일은 언제나 그날 의복 수발을 드는 사람의 몫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보통 때라면 아무거나 알아서 고르라는 황제의 말에 오 태감이 선택을 했겠으나 오늘 아침 이한은 제 앞에 있는 세 가지 각기 다른 색의 용포 중 굳이 흑적색을 선택했다. 그 색을 보는 순간 마치 수를 놓은 듯 이불 위로 흐트러져 있던 화운의 머리카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번 그것을 떠올리고 나니 다른 옷을 고르고 싶지 않았다. 옷 따위 무얼 입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기어코 그 흑적색의 용포를 걸쳐야 하루가 제대로 흘러갈 것만 같았다.

이한이 은근슬쩍 용포 하나를 툭 건드렸을 때, 평소처럼 제가 임의로 고르려 준비하고 있던 오 태감이 얼마나 놀란 얼굴을 하였던지. 그것을 떠올리자 괜히 민망하여 뒷목이 화끈거렸다.

문득, 화운이 저에게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 물었던 날이 떠올랐다. 남들에겐 지극히 평범할 그 질문에 이한은 가지고 있는 답이 하나도 없어 몹시도 당황했었다. 그 후로 이한은 줄곧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생각해 보았다. 좋아하는 음악을, 그림을, 서책 따위를 자꾸만 떠올려 보았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진지하게 고민해본 건 처음이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에 하나 도움 될 것이 없는 일들을 두고 처음으로, 이한은 진심을 다해 치열한 고민을 했다.

“오진성.”

“예, 폐하.”

“오찬 시간은 아직이냐.”

한참을 제 소매만 바라보고 있던 이한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오 태감이 황급히 한 걸음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다소 이른 시간이긴 하옵니다.”

이한은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간에 필요 없을 땐 쓸데없이 눈치가 좋아서 얄밉게 굴더니 이럴 때는 그 눈치를 어디에 팔아먹는지 모를 일이다. 더 말이 없는 황제의 표정을 슬쩍 살핀 오 태감이 그제야 다시 입을 말을 이었다.

“허나 폐하. 오늘 조찬을 적게 하셨으니 이른 식사를 하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불쾌한 티를 팍팍 내던 표정이 그제야 유하게 풀렸다. 괜히 용포 자락을 한번 툭, 하고 털어낸 이한이 이내 빠른 걸음을 내디디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서정궁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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