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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29)화 (12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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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순간 이한은 제 품에 안겨 있는 사랑스러운 이의 체온을 실감했다. 자그마한 동물처럼 웅크린 화운은 더없이 사랑스러웠고 아주 이른 시각에 눈을 뜬 이한은 한참이나 그런 화운의 얼굴을 감상하고 또 감상했다.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원래 그리도 재미난 일이었을까. 숨을 쉬는 것도, 잠결에 눈가를 찌푸리는 것도, 이한의 팔에 뺨을 부비며 바르작거리는 것도, 무엇 하나 즐겁지 아니한 일이 없었다. 이한은 그 자리에서 하루 종일 그를 보고만 있으라 하여도 좋을 것 같았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지난밤은 또 어떠한가. 그 밤에 보인 화운의 모든 행동들이 얼마나 어여뻤는지는 이런 평범한 말로는 설명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껏 누려온 황제로서의 그 어떤 밤도 이한을 이토록 만족시키진 못했다. 영혼이 충만해진 이러한 기분을. 황제가 아닌 한 명의 사내로 행복한 이러한 감각을 이한은 태어나 처음 느꼈다.

황제께서 도무지 움직일 기색이 없으니 아진이 어쩔 줄 모른 채로 눈동자를 굴렀다. 조회에 드셔야 함을 생각하면 어서 일어나셔야 하는 것을 알지만 지금 저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눈빛은 직접 보지 못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하여 도무지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폐하….”

그런 아진의 뒤쪽에서 불쑥 치고 들어온 불청객은 오 태감이었다. 다시 한 번 그쪽을 향해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고는 주의를 준 이한은 눈치를 보듯 화운의 얼굴을 살폈다. 과한 것들을 호되게 감당해야 했던 화운은 다행히 눈을 뜨지 않았지만 이한은 이제 정말 자신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 같아선 정무고 뭐고 종일 이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 깜짝 놀라 마음을 가다듬는다. 황제가 되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 스스로를 꾸짖어 보아도 여전히 화운이 잠들어 있는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다. 이토록 좋을 줄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행복하여 온 세상이 다시 보일 정도로 마음이 들뜰 줄을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그의 밤을 찾을 것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한은 정말로 더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이한은 그것을 두고 화운의 탓을 할 것이다. 잠든 얼굴이 지나치게 순하고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으니, 몸을 일으키다 말고 허리를 굽혀 잠든 화운의 이마에, 코끝에, 뺨에 차례로 입술을 내린 것을 전부 다 화운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킨 이한이 애써 바닥을 내려다본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아진을 지나쳐 침실 밖으로 나갔다. 아진이 그런 황제를 따라 나오자 침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이한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네 주인은 몸이 약해서 잠에서 깨면 힘들어할 것이다. 날이 더우니 너무 뜨거운 물은 말고, 적당히 따뜻한 물을 미리 준비해 두어 편안하게 몸을 풀 수 있도록 하라.”

“예, 폐하. 소인이 성심을 다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연빈이 일어나거든… 내가… 곁에 있어주고 싶었으나 할 수 없이 먼저 갔다 하고….”

말을 하면 할수록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사실 배웅을 받아야 옳았다. 황제와 밤을 보낸 모든 후궁은 먼저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하고 손수 황제의 모든 수발을 들어 모시곤 배웅을 하는 것이 법도였다. 그런데 이한은 화운이 깨는 것이 싫어 홀로 숨을 죽여 아침 시간을 다 보내더니 이제는 그가 깨어날 때까지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여기기라도 하는 듯 변명을 하고 있다. 그 과분한 성은에 손끝이 다 저릴 지경이라, 아진은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점심때 다시 오겠다고… 그리 전하라.”

“예, 폐하. 꼭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오 태감은 연빈마마를 깨워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말을 하려고 했다. 황제의 소세를 돕고 의복 수발을 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 태감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황제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뭘 멍하니 서 있어?”

“…예?”

“조회에 이대로 가란 말이냐?”

황제의 표정은 너무나도 뻔뻔하고 태연했다. 오 태감은 그제야 황제가 연빈마마가 아닌 자신의 수발을 받으려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아닙니다, 폐하. 소인이 서두르겠습니다.”

후궁의 처소에서 밤을 보냈는데 왜 아침 수발을 자신이 들어야 하는지 의문이었으나 그것이 황제의 뜻이라면 곧 법도나 다름이 없으니. 미묘하게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아진의 표정을 모른 척 넘기며 오 태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하원에서의 새날이었다.


“간밤에 폐하께서 서정궁에 드신 것을 언니도 알죠?”

문후를 드리기 위해 황후궁으로 온 정빈, 송현이 가마에서 내려 바로 앞에서 걷고 있던 숙비, 비영을 발견하곤 쪼르르 달려와 대뜸 그것부터 물었다. 비영이 살짝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연빈에게 서정궁을 내어주실 때부터 이미 예정된 수순 아니었니.”

비영의 말에 송현이 그도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궁으로 올 때는 황후궁을 제외하고는 보통 총애를 받는 순서대로 황제의 궁과 가까운 곳을 정하는 것이 암묵적이었다. 지난해 명하원에 머물 때 서정궁에는 숙비가 머물렀었다. 비영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송현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왜. 이제 와 폐하께서 연빈을 찾으셨다 하니 질투라도 나는 것이야?”

“에이, 언니! 무슨 말이에요. 저야 애초에 그런 것엔 별로 관심도 없었던 걸 잘 아시잖아요.”

“하하. 그래그래. 농담이었어.”

펄쩍 뛰며 두 손을 마구 저어대는 송현의 반응에 비영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저지만 송현 역시 단 한 번 비영을 투기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비영은 송현이 궁 밖의 가족을 너무나도 그리워하여 그 나름대로 내명부 사람들을 저의 가족으로 삼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송현이, 비영의 눈치를 슬쩍 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언니는 정말 괜찮아요?”

사실 송현은 지난밤 진심으로 비영이 걱정되었다. 자신이야 애초에 황제의 총애와는 거리가 먼 후궁이었다. 물론 황제는 늘 송현을 귀엽게 여겨주긴 하였으나 그것은 총애하는 여인을 대하는 감정과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송현은 그것이 아쉽지 않았다. 서럽거나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주눅이 들지도 않았다. 이따금 연빈이 그런 자신의 처지를 들쑤시며 악담을 할 때야 화가 나고 울분이 터지기도 했지만 그건 연빈의 고약함에 화가 난 것뿐이지 황궁에서의 제 입지 때문에 분이 났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송현이 생각할 때 비영은 자신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비록 후궁의 수가 많지 않은 황실이라고는 하나 비영은 언제나 지금의 황제가 가장 아끼는 여인이라 꼽혔으니, 따라서는 자리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을 터다. 하여 송현은 늘 제가 머물렀던 서정궁도 내어주게 된 비영이 밤새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송현의 걱정이 전부 무색하게도, 지극히 편안한 표정을 한 비영이 송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숨을 빚진 은혜는 짐승도 잊지 않는 법이지.”

“아….”

“고작 이런 일로 마음이 상해서야 어디 내가 짐승보다 낫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

그리 말하는 비영의 얼굴에서는 정말 조금의 아쉬움도 없는 듯 보여서. 아니, 차라리 홀가분하게만 보여서. 지난밤 돌덩이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만 같은 송현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비영의 곁에 바싹 다가가 웃음을 지었다.

지금 연빈의 성격으로 짐작하건대 그는 간밤에 벌어진 일을 몹시도 부끄럽게 여길 것 같아서, 이따가 마주하면 괜히 한번 놀려주고 싶은 기분이 샘솟는 송현이었다.


화운은 황후와 홀로 마주 앉아 있었다. 문후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화운에게 황후, 자란이 차를 한 잔 들고 가지 않겠냐고 권하였기 때문이다. 숙비와 정빈은 내심 저들도 함께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자란은 그 눈빛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으로 그들을 물린 채 화운과 독대했다. 이는 황후가 화운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폐하께서 지난밤 서정궁에 드셨다지.”

“…황후마마께서 베풀어주신 아량 덕분에 제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극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문을 여는 황후의 말에 화운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르는 귓불을 슬쩍 보며 황후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은혜라니. 어디까지나 네가 폐하를 잘 모신 덕분이지.”

“저는…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비록 지난날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이제는 폐하께서 너를 무척이나 아끼고 계신 것을 이제는 너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황후의 말에 화운은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폐하께서 서정궁을 나선 뒤에야 겨우 눈을 뜬 화운은 제가 배웅도 하지 못하고 계속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사색이 되었으나 아진은 오히려 폐하께서 마마가 깨는 것을 원치 않으셨단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침 시간이 다가도록 잠든 화운의 곁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던 황제는 나서기 전 아진의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화운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 갔다고 하여 내내 화운의 얼굴을 화끈거리도록 만들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는지 연유야 완전히 알 수는 없어도 그분이 더없이 자신을 아껴주고 계시다는 것은 도무지 모른 척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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