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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28)화 (128/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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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한의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화운이 늘 홀로 감당해야만 했던 죄책감을 전부 막아주는 것만 같아서. 그 무엇도 너를 다치게 할 수는 없으리라 자신을 지켜주는 것만 같아서.

화운은 덜덜 떨면서도 이한의 목을 감싸 안은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를 조금 더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며 마찬가지로 속삭였다.

“폐하께서 이리 제 곁에 있어주시니….”

“…….”

“저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살아온 세상을 뒤엎게 만들고, 두려움을 잊도록 만드는 감정을 과연 무엇이라고 명명하면 좋을까.

이한과 화운은 그것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로 참고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모든 것을 다하여 뜨겁고도 서러웠던 밤이었다.


‘조금 전 구경하던 이의 어깨를 검으로 때린 자가 누구냐.’

어가가 막 백성들이 줄지어 기다리던 곳을 지나친 뒤, 가마를 잠시 멈춘 황제가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며 말했다. 오 태감이 서둘러 곁에 호위하고 있던 이를 불렀고 그자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이한이 입을 열었다.

‘나를 보러 온 백성에게 마음대로 손을 대도 된다고, 누가 허락하였지?’

그 음성에 담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챈 호위무사가 황급히 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소인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한은 앞에 엎드린 이의 등을 내려다보며 조금 전 제가 보았던 어느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황제의 자리에서 이따금 백성의 얼굴들을 직접 마주할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오늘 마주한 이의 얼굴은 그중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특별함이 있었다. 단순히 고귀한 천자를 마주한 이의 얼굴에서 보이는 놀라움과 경외함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과는 미묘하게 궤를 달리했다.

마치 삶의 빛을 처음 본 것처럼. 하늘의 태양을 처음 보고, 밤의 달을 태어나 처음 본 아이처럼.

그는 그런 얼굴을 하고 세상에 오로지 황제와 자신 단둘만이 있는 듯 하염없이 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이가 갑자기 어깨를 때린 호위 때문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을 땐 얼마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지. 하여 이한은 그 길을 지나오는 내도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앞으로 각별히 주의하여라.’

하지만 어찌 되었든 자신을 보호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 이가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일. 이한은 결국 짧은 경고로 상황을 정리했다. 황제가 다시 가마 안으로 자세를 바로 하자 ‘가자!’ 하고 외치는 오 태감의 목소리와 함께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그 안에서 황제가 얼마 동안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이의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화운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새벽이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렸고 부은 것처럼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렸다.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하여 몸을 일으키려던 화운은 제 몸을 붙들고 있는 어떠한 힘에 의해 그대로 다시 누워야 했다.

“……?!”

그제야 정신을 차린 화운은 지금 자신을 감싸고 있는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황제였다. 화운은 이불에 감싸여 황제, 이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순간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던 화운이 황급히 입을 꾹 다물고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그제야 지난밤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겁도 없이 황제에게 밤을 달라 청했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말자고 마음을 다스렸던 것이 전부 무색하게 화운은 뻔뻔하게도 그분의 옷자락을 잡아 곁에 머물러 달라 하였다.

그런 자신을 내치지 않고 기꺼이 제게로 파고들던 입술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어색한 화운에게 전부를 맞춰주던 몸짓이, 열기 가득한 눈동자를 하고서도 천천히 자신을 기다려주던 모든 행위가 선명하게 떠올라 온몸에 다시금 지난밤의 열기가 도는 것 같았다.

태어나 처음 경험해 보는 버거운 감각에 화운이 헐떡이면 커다란 손이 뺨을 얼러 주었다. 뜨거운 숨을 담은 목소리로 끝도 없이 다정하게 괜찮다고 화운의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하여 화운은 죄책감도, 서러움도, 아픔도 전부 잊고 오로지 황제 한 사람에게 매달려 가진 모든 것을 그분에게 맡겼다.

눈을 감고 있자니 자꾸만 간밤 보았던 장면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화운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겨우 다스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앞에, 그린 듯 아름다운 얼굴 하나가 눈을 감고 곤히 잠들어 있어 이번에는 숨이 멎을 뻔했다. 황제 폐하께서 천하에 다시없을 미남인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이토록 친밀한 마음으로 바라보자니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꿈이 아니었다니. 폐하와 내가 정말로 하룻밤을 보내었다니.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 설레고, 두렵고, 행복하고, 슬프기도 하여 무어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마음의 우물을 가득 채웠다. 화운은 웅크리고 있던 팔을 조금 움직여, 마치 홀린 듯 잠든 그분의 턱으로 손끝을 가져다 댔다.

혹시 이대로 만지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사실은 이 모든 것이 환상이라 욕심을 내어 한 번 손을 대면 전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건 아닐까. 그런 두려움을 꾹꾹 내리누르며 화운의 손끝이 이윽고 황제의 턱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흩어지는 대신 온기가 느껴졌다. 눈앞의 황제는, 이한은 사라지지 않은 채 거기에 있었다. 그것이 신기하고 좋아서 이번에는 손을 조금 더 움직여 그분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사실 황제의 손이 자신의 뺨을 어를 때마다 화운은 내도록 저 역시 그분을 이리 매만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몸에는 여전히 곳곳에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으나 그것이 전부 폐하께서 제게 주신 것이라 생각하니 좋기만 하였다. 이러다 폐하의 잠을 깨울 수도 있으니 이제 그만 손을 거두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황제를 실감하는 것이 좋아 쉬이 손이 거둬지지가 않았다.

“으음….”

황제가 뒤척이며 목소리를 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놀란 화운이 서둘러 손을 다시 제 품속으로 거두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익숙하게 화운을 제 품으로 더 꼭 끌어당겼다. 한껏 잠긴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찌 벌써 깼느냐….”

평소의 단정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음성이었다. 심장이 다시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그, 그것이….”

“더 자지 않고….”

황제는 잠에 취해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으나 화운이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단단한 팔이 화운의 허리를 감쌌고 화운은 이내 제 이마에 닿아오는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쉬이… 괜찮으니 조금 더 자자.”

황제는 화운의 이마에 입술을 붙인 채로 속삭였다. 화운이 그대로 얼어버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연화운과 잠자리를 가진 것도 한참 전이었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잠결에 황후마마나 다른 후궁의 처소라고 착각하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운은 그런 의심에 마음을 졸이지는 않았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정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잠결에 그리 착각을 하셨더라도 폐하께서 지난밤 제게 주셨던 것은 절대로 착각이 아닐 터이니, 화운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는 그분의 체온이 마냥 좋기만 했다.

긴장하여 딱딱하게 굳어졌던 몸에 절로 힘이 빠지고 절로 마음이 절로 노곤해졌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바라지도 않았던 것을 가졌으니 이것이 마지막이든 무엇이든 화운은 이후에 다가올 어떤 것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하루의 밤을 위해 화운은 영겁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였으니, 단 몇 시간 동안 이토록 평화롭게 잠드는 것 정도는 괜찮으리라.

화운은 바로 곁에 흩어지는 황제의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느덧 다시 잠이 오고 있었다.


“폐하, 아진이옵니다.”

침실의 앞에 선 아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려운 척을 하고 있지만 그런 아진의 입가에는 미처 참아내지 못한 미소가 깃들어 있다. 곁에 서 있던 오 태감이 그런 아진의 얼굴을 보고 쯧, 하고 혀를 한 번 찼지만 그런 것쯤은 아진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아진은 지금 이 순간, 이 명하원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일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황제 폐하도, 연빈마마도 평소 기침하시던 시각이 이미 지났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아진이 고개를 돌려 오 태감을 슬쩍 바라보자 잠시 안의 기척을 살피던 오 태감이 이내 고갯짓으로 아진에게 들어가 보라 지시를 내렸다. 아침 조회에 드셔야 하니 폐하께서 이제는 준비를 시작하셔야 했다. 아진은 긴장한 숨을 한 번 후,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쉿.”

하지만 안으로 들어선 아진은 이미 깨어 있는 황제를 보았다. 잔뜩 흐트러진 침의를 편안하게 걸친 채, 황제는 화운이 잠들어 있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황제는 화운이 깨는 것을 원치 않는지 입소리를 내어 아진을 단속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여전히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화운을 바라본다. 아진은 숨을 죽인 채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입을 열었다.

“폐하, 소셋물을 준비하였습니다.”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다. 황제는 아진의 말을 듣고도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 다른 반응이 없이 계속 화운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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