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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운의 목소리의 결이 달라진 걸 느낀 이한이 덩달아 무거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허면 폐하… 손이 아니라 다른 곳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다른 곳?”
“제 키가 지금보다 더 컸다면. 지금보다 어깨가 더 넓고, 얼굴이 더 사내다웠다면 어찌하셨을까요.”
객잔에서 지낼 때 하운도 곱게 생겼다는 말을 꽤 듣기는 하였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나 시장통에서 무인들과 비교되며 들었던 표현을 두고 절세미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연화운의 미모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켜켜이 쌓인 서러움이 터져 나오는 것을 화운은 쉽게 막을 수가 없었다.
“제가 그런 사내였다면… 폐하께서도 분명 저와 밤을 나누고 싶어 하지는 않으셨겠지요….”
사실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 굳이 물을 필요가 무엇일까. 화운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옛말에 물에서 건져 놓으면 보따리를 내놓으라 한다더니 제가 딱 그 짝이었다. 이한은 답이 없었고 화운은 더더욱 몸을 웅크렸다. 이번에야말로 네가 지금 주제도 모르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단단히 혼이 나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 이한은 화운을 보며 상상을 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연화운을. 지금보다 조금 더 어깨가 넓고, 조금 덜 화려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 연화운을, 이한은 상상하고 있었다. 물론 눈앞에 보이는 얼굴이 있는지라 아예 우락부락한 모습으로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대신 이한의 눈앞에는 조금 더 건강해 보이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순한 얼굴을 한 이가 앉아있을 뿐이었다.
한참 만에, 이한이 입을 열었다.
“아니 될 말이지.”
화운이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예상하였다고 해서. 당연한 대답이라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저릿한 심장의 아픔에 화운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한은 말을 이었다.
“지금도 너를 보고 궁인들이 온통 마음을 빼앗겨 미공자이니 무엇이니 입방아를 찧는데.”
“……?”
“아예 궁 안의 여인들을 온통 홀려내기라도 할 참이냐?”
이한은 매우 진지했다. 연빈마마를 보고 싶어서 문후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정안궁으로 가는 길을 어슬렁거린다는 궁인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이한의 마음속에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이한은 제가 지금 무슨 대답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화운의 얼굴을 본다. 순간 철없이 심술 났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이한은 화운이 어째서 이 질문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돌이켜 보면 화운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특히나 몸이 약해져 마음까지도 함께 허물어진 것처럼 보일 때는 늘 그랬다. 마치 이한이 그를 잘못 보고 있는 것처럼. 오로지 외형에 반하여 이토록 그를 애틋하게 대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화운은 끊임없이 이한에게 자신이 달라진다면, 다른 사람이라면, 다른 모습이 되냐면 어떻겠느냐 묻기를 반복했다.
“…네 불안이 무엇인지 내가 전부 다 알 수는 없겠지.”
어쩌면 기억을 잃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이전의 연화운과 자신을 같은 사람이라 여기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기억은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데, 지금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전부가 그전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고 하니 화운 스스로는 지금 자신이 전과는 관계없는 전혀 새로운 사람인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다.
허면 연화운은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외형조차도 온전한 제 것은 아닌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한은 짐작할 뿐 타인의 마음을 완벽하게 알아낼 순 없었다. 다만 이한은 화운이 그런 불안함은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지 자신이 이토록 아름다운 외형을 덧입었기 때문에 이한의 마음을 돌린 것처럼, 그렇게 느끼지는 않았으면 했다. 이한의 손이 애틋하게 화운의 뺨을 쓸었다. 자신이 제 마음 하나 다 갈무리하지 못하여 방황하는 동안 화운이 홀로 이러한 두려움과 싸워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선득하게 내려앉았다. 이한은 말을 이었다.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
“다만 네 얼굴이 고와 내가 너의 이 밤을 얻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운의 미모는 이한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했다. 화운이 패악을 부리기 전부터도 그러했다. 이한은 좋아하는 색이 없었고 좋아하는 장신구가 없는 황제였다. 좋아하는 시도, 책도, 그림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여인이든 사내이든 후궁이 가지고 있는 미색 같은 건 당연히 이한에게 특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의 말이 좋았고, 온화하고 따스한 마음이 좋았다. 바라는 것도 없이 내게로 밀려드는 너의 다정함이 끝끝내 나의 마음을 이토록 무너지게 만들었어.”
순간 이한의 머릿속에 이제는 아득해진 봄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바닥에 엎드린 화운의 어깨가, 폐하의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던 그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정하게 어린 종들을 향해 웃어주는 그런 화운의 다정함이 이한으로 하여금 그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러니 너의 마음이 지금과 같다면 어떤 모습이라도 나는 결국 너를 원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일이란 본디 무엇도 알 수 없는 법이다. 아주 작은 틀어짐으로도 결과는 걷잡을 수 없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이한이라고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도망가고 벗어나려고 그토록 애를 쓰고 또 애를 써도 결국엔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던 이러한 감정이라면. 이러한 인연이라면. 그러하면 지금과 꼭 같지 않아도 언젠가는 마주하게 되질 않았겠느냐고. 이한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그런 말이었다.
이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화운은 저의 두 주먹 안에 이불을 꽉 그러쥐었다. 많은 물음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하나같이 불경하고 터무니없는 가정이었다. 허면 후궁 연화운이 아니라 시위인 하운을 만나셨어도 저를 특별히 여겨 주시였겠냐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물음들 말이다.
하지만 차마 할 수 없는 그 물음의 대답 같은 건 이미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화운은 이 말도 안 되는 가정조차도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감히 할 수 없는 상상임을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 이토록 좋은 분이 아니시고, 이토록 다정한 분이 아니시며, 하찮은 이들에게조차 어진 분이 아니셨다면 화운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폐하….”
이윽고, 화운의 입이 열렸다. 조금 전까지 두려워 도망치고만 싶어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이불을 쥐고 있던 화운의 손이 아주 천천히 움직여 다시 한 번 황제의 소매 끝을 붙들었다.
“폐하…….”
단지 부르는 것뿐인데도 담긴 감정이 어찌나 애절한지 이한은 대답도 못하고 숨을 참았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종류의 긴장감이, 기대감이, 설렘과 미미한 두려움이 전신을 휘감았다. 오로지 지금의 연화운 앞에서만 느끼는 감각이었다. 화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지 마세요, 폐하.”
“아….”
“가지 마시고 오늘밤, 예서 머무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화운은 황제가 허락한 것이라 여기고 싶었다. 애초에 하운이 황제의 용안을 뵐 수 있었던 것도, 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황제가 원래는 허락되어 있지 않은 일들을 허락해 주신 덕분이었다. 그래서 화운은 이 밤을 욕심내고 싶었다. 단 한 번도 무언가를 가져본 것이 없어 욕심낼 줄도 몰랐던 삶에 유일한 욕심이 되었던 그분을, 황제를, 성이한을 화운은 조금만 더 손에 잡고 싶었다.
눈에 띄게 침을 한 번 삼킨 후 이한이 말했다.
“그 말이 내게 어떻게 들릴지 알고 있느냐. 나는 자제할 수 없을 것 같다 말하였다.”
“…예, 폐하. 알고 있습니다.”
이한은 거의 신음 소리를 낼 뻔했다. 심장의 어딘가로부터 불길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검은 눈동자에 어렸던 불빛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화운은 자신을 도망치고 싶도록 만드는 죄책감을 똑바로 마주 대하며 황제의 옷자락을 더더욱 힘주어 쥐었다.
하루만. 단 하룻밤만.
폐하께서 주시는 이 하루의 밤을 얻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았다. 죽고 난 뒤 무엇을 해도 죄를 씻지 못해 영겁의 세월 동안 불길에 타오른다고 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삶에서 황제가 주신 온기를 품에 다 안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고통도 기꺼이 마주할 것이다.
“저는….”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나올 것 같아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며, 화운이 말했다.
“……저는 폐하의 밤을 얻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를 것입니다.
그러니 이한이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참을 수가 있을까. 제 삶에 최초이자 유일함이 되어가는 사내가 이리 말을 하는데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입술이 다시 가까워졌다. 이한은 제 옷자락을 쥐고 있던 화운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목에 감게 하고는 단번에 숨을 깊이 파고들며 그를 천천히 눕도록 만들고 그 위로 자신의 몸을 덮었다.
“…천천히, 아프지 않게 할 테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거라.”
화운에게는 아마도 이것이 첫 경험이나 다름없을 거란 오 태감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한이 화운의 입술을 혀로 부드럽게 핥으며 속삭였다. 이한은 진심으로 이 밤이 화운에게 고통이나 두려움이 되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에게는 처음으로 기억될 이 순간이 다소 버겁더라도 행복한 감각으로 남길 바랐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러운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