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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게 무심하였다.”
“폐하… 어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린아이처럼 내 감정에 취해 미처 너를 다 살피지 못하였어.”
그냥 없는 척을 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제 마음을 올곧게 마주 보고 인정할 용기가 없어서 어느 날은 그냥 이대로,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자위하며 지내도 상관없을 거라 여겼다. 정작 이한이 그렇게 방황하는 동안 화운이 그의 모든 변덕을 감내해야 했던 것을 모르고. 이한은 그들의 관계에서 오로지 자신만이 이토록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제멋대로 화를 냈다가, 토라졌다가,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날이면 멋대로 다가왔다가, 또 스스로의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치는 이한의 뒤에서 그것을 모조리 홀로, 조용히 감내하고 있던 건 연화운이었는데. 모든 것이 막막한 황궁에서 황제의 시침을 드는 일조차 낯설고 두려웠을 연화운은 제게 그 흔한 투정조차 한번 보인 적이 없었는데.
“…운아.”
마음이 먹먹하여 이한이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불렀다. 그리 부를 때마다 미세하게 얼굴을 찌푸리는 화운은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보였다.
“내가 오늘 너의 곁에서 머물 것이다.”
“하오나, 폐하…!”
이어진 황제의 말에 화운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으나 이한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쉬이, 잠깐. 먼저 내 말을 들어. 너를 안겠다는 것이 아니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나는 무엇도 네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야. 다만….”
그가 자신의 후궁이니까. 후궁의 자리란 본디 그런 것이니까. 이한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이 내리는 것은 당연히 그가 반길 거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놓고 연화운을 특별히 대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었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이한은 마치 화운을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만 나는 그저 네 곁에 있고 싶구나. 괜찮다면… 오늘 밤 네 침대의 한 자리를 내게 나누어주겠느냐.”
어쩌면 위선일지도 몰랐다. 무슨 말을 해보아도 그들 사이가 황제와 후궁인 것은 변할 수가 없으니 황제의 청이 연화운에게는 명이나 다름없을 수도 있었다.
“거절하기가 어려우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거라. 대답하지 않으면 돌아갈 터이니. 네게는 이조차 부담이겠으나….”
“…….”
“이렇게라도 네 곁에 있고 싶은 나를 이해해다오.”
하지만 그래도 이한은 화운에게 묻고 싶었다. 알량한 형식일지라도 그의 허락을 구하고 싶었다. 황제의 권위로 너를 겁박하여 밤을 취하는 일 같은 건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말을 마친 이한의 숨이 떨려왔다.
허면 화운은 어떠한가. 하늘과 같은 황제 폐하께서 미천한 이의 곁 하나를 내어달라 하시는 말을 듣고 있는 연화운의 마음은 과연 어떠할까.
황제를 마주하기 전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제도 모르고 과분한 것을 욕심내서는 안 된다고. 어떻게 해서든 그분의 은혜를 거절해야 마땅하다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지금 화운의 눈앞에는 그가 있었다. 온 생을 다하여 단 하나 욕심내었던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조차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그런 분이 이토록 다정하고도 연약한 얼굴로 화운에게 천하디천한 하루의 밤을 청하고 있다. 거기에 앉아 화운은 처음으로, 황제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던 수많은 후궁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여 화운은 황제의 소매를 붙들었다. 차마 제 곁에 머물러 달라는 그런 진심은 말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다는 그런 거짓도 말하기가 싫어서. 화운은 다만 폐하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이기심으로 그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이한의 시선이 천천히 화운의 손으로 향했다. 가진 모든 용기를 전부 다 쏟아부은 듯 절박한 그의 손길을.
홀린 듯 황제의 손이 화운의 손등 위를 덮어 쥐었다. 그다음에는 다른 손으로 화운의 뺨을 감쌌다. 순간 화운이 잠시 움찔하였으나 결코 황제의 손길을 피하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 순간 황제는 연화운이 기억하지 못하는, 저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을 열기를 떠올렸고 화운은 폐하께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계실, 그날 밤 제가 꾼 꿈을 기억해냈다.
여름밤의 핑계조차 댈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이한은 아주 천천히. 화운이 놀라지 않게. 원한다면 거부할 수 있게 그에게 다가갔다. 이한의 손은 화운을 얼굴을 감싸고 있었으나 그의 행동을 강제하는 어떠한 힘도 주지 않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한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사내였다.
숨결이 어지럽게 얽혔다. 시선을 내려 화운의 입술을 바라보며, 이한은 아주 느릿하게 자신의 코끝을 그의 코끝에 스치게 만들었다. 화운은 입술을 깨물었으나 물러나지 않았고 이한은 마지막 기회라는 듯 그의 코앞에서 아주 잠시 멈추어 섰다. 원하지 않는다면 괜찮으니 지금 나를 밀어내라고, 소리가 없어도 이한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운은 이한을 밀어내지 않았다.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거부의 몸짓 하나면 물러났을 이한인데도. 화운 역시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그래도 화운은 그에게서 몸을 물리는 대신. 그의 몸을 밀어내는 대신.
이 찰나의 순간을 위해 영겁의 시간 동안 지옥불에 타올라도 상관없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화운은 기꺼이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아주 천천히 입술이 닿았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서로가 서툰 몸짓이었다. 이한은 마치 제가 조금 잘못하면 화운이 다치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가 뗐다. 살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미미하게 들렸다.
양해를 구하는 듯한 몸짓으로 한 번 더 코끝을 스친 이한이 물러서지 않는 화운의 입술을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화운의 떨림이 온몸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렇게 떨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화운의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우면서도 혹여나, 그가 후궁이고 자신이 황제인 이유로 싫은 것을 견디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이한은 이대로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으며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곤 숨을 고르려 애썼다. 이한보다 훨씬 더 숨이 차오른 화운 역시 가슴을 옅게 들썩이며 이한을 바라보고 있다.
젖은 눈을 하고서, 저의 입맞춤 때문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붉어진 입술 새로 더운 숨을 뱉어내고 있는 화운을 모습 앞에서 이한은 번민하고 고뇌하였던 순간들이 전부 부질없이 느껴졌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돌고 또 돌아온 기나긴 길이 이제 와 후회스럽기까지 하였다.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어떻게 나는 외면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던가.
애틋한 손길로 화운의 마른 어깨와 팔을 쓸어내리던 이한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운아.”
“…예, 폐하.”
“아무래도… 내가 돌아가야겠다.”
방금 전까지도 네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곁에 있게만 해달라 하던 황제의 갑작스러운 말에 화운의 눈이 커졌다. 차분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화운이 반사적으로 말을 꺼냈다.
“제가, 제가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응?”
“제가 너무… 제가 너무 못해서…!”
그러다 화운은 문득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다물며 두 손으로 저의 입을 가렸다. 정녕 입맞춤 한 번에 정신이 나가버리기라도 한 건지. 물론 화운은 망측한 꿈을 꾼 후로 홀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중에 설령 그런 일이 정말로 벌어진다고 하여도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툴게 분명한 자신 때문에 폐하께서는 흥이 나지 않으실 거란 생각 같은 것도 잠깐, 아주 잠깐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순간에 그 말이 이렇게 불쑥 나올 줄은 정말로 몰랐다.
안 그래도 상기되어 있던 얼굴이 이제는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단숨에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눈만 깜빡거리고 있던 이한이 이내 고개를 살짝 젖히며 큰 웃음을 터트렸다. 방 안에 가득 차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이한은 스스로의 입을 가리고 있는 화운의 손을 잡아 살며시 내리고는 꽉 다물려 있는 붉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슬쩍 문지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다만….”
“…….”
“더 이상 여기에 있다간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런다.”
“아….”
화운이 그제야 이한의 뜻을 알아듣고는 잠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오늘도 면경에 비추어 보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사내이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연화운의 얼굴을.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어느 날에는 그 얼굴을 보고도 낯설지가 않아 스스로 놀라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화운은 이 얼굴이, 이 몸이 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무어라 생각을 더 하기도 전에 화운의 입이 먼저 열렸다.
“폐하.”
“음?”
“일전에…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지요. 제 손이 지금보다 더 크고 거칠었어도 지금처럼 보아주셨을 거라고….”
멈추어야 하는 말인 것을 알았다. 주제넘는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 또한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화운은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화운이 흘리고 있던 피였다. 눈물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내도록 홀로 틀어막고 있던 울먹임이고 서러움이었다. 그렇게 화운의 아픔은 오로지 그의 황제, 성이한의 앞에서만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