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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를 가늠하는 황제의 검은 눈동자가 더더욱 깊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오 태감이 황제를 달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보통의 비빈마마들은 입궁을 하기 전 폐하를 모시는 일에 대해 미리 교육을 받곤 합니다.”
이한은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오 태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연빈마마 역시 같은 교육을 받으셨겠지요.”
“그게 무슨 상관….”
“하오나 마마께서는 모든 기억을 잃으셨지 않습니까.”
“아….”
그제야 황제는 오 태감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깨닫고 짧은 탄성을 흘렸다. 오 태감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마무리했다.
“마마께서는 아마도 모든 것이 처음인 양 낯설고 어려우신 것이 아닐는지요.”
화운이 어째서 갑자기 나를 두려워하는가, 이제는 그도 나를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여겼던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그런 생각들로 덩달아 두려워지던 황제의 마음이 오 태감의 말 앞에 차분해졌다. 평생을 황자로, 그리고 황제로 살아온 이한은 생각지도 못한 지점이었다. 한참 동안 다시 말이 없던 이한이 이윽고 오 태감을 향해 말했다.
“서정궁으로 가자.”
그 걸음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가 없음이었다.
화운은 침대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이불을 당겨 덮고는 연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마음이 혼란하고 어려워 차라리 이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폐하께서 제게 시침을 명하신 것도 믿기가 힘든 일이거니와 그런 폐하를 자신이 거부했다는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앞은 막다른 골목인데 뒤에서는 검을 든 자객이 쫓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황제는 자신을 연화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처럼 대하느니 무어니 말은 하여도 어쨌든 연화운이 큰일을 겪고 기억을 잃어 달라진 것으로 생각할 뿐이지 정말로 다른 사람일 거라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화운은 감히 황제 폐하께서 거짓된 이를 품에 안고 성총을 내리시도록, 그리 모른 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서글픈 기분이 들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연화운이 된 후 수도 없이 많이 찾아왔던 행복했던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너무 지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뻔뻔하게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이 내 것인 척 지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모두의 앞에 속 시원히 모든 진실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애매한 뻔뻔함과 죄책감 사이에서 화운은 말라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수도 없이 많은 밤에 화운은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일을 고하는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이러한 말을 믿어줄까. 어쩌면 연화운이 아예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라 여겨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다 핑계였다. 화운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이기심을 이미 알고 있었다. 믿어주지 않을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정말로 두려운 건 폐하께서 그 말들을 전부 믿으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폐하를 뵙지 못하게 될까 봐, 이제는 가족처럼 소중해진 정안궁의 아이들을 영영 볼 수 없게 될까 봐, 화운은 그것이 무서워 차마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뻔뻔한 마음이라는 걸 알았지만 화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져본 이토록 소중한 사람들을 어찌 제 손으로 끊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마냥 행복해할 수도 없는 이 생활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들통 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버림받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과는 또 언제까지 싸워야 할까.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면 언젠가 이 모든 죄책감과 두려움도 전부 다 희석되어 별것도 아닌 일이 될 수 있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미래의 일들이 화운은 때때로 너무나도 지치고 버거웠다.
차라리 마음이 아예 없었다면 좋았을걸. 황제의 향한 마음도, 그분의 체온을 원하는 욕망도, 아무것도 없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걸.
그게 맞는 일이라 생각해서 황제의 밤을 거절해 놓고도 화운은 그분의 손길을 상상했다. 여전히 너무나도 생생한, 그날 꿈에서 겪었던 황제의 열기가 자꾸만 떠올랐다. 실제로 그분의 입술에 닿고, 손길을 받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하는 궁금증을 도무지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설마….”
그러다 화운은 문득 아찔해졌다. 불현듯 이전에는 감히 해본 적이 없던 가정이 들어온 탓이다. 다만 하늘의 태양을 바라보듯 그분을 경외할 뿐이라면 어째서 이런 마음을 가지는가. 어째서 그토록 터무니없는 꿈을 꾸었나. 한번 어떤 짐작이 들고 나니 그쪽으로 깊어지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다. 폐하께서 잠시 정안궁에 걸음을 끊었을 때 아쉽고 애가 타 매일같이 그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도. 다만 무릎을 꿇고 있는 저를 일으켜주시기 위해 폐하께서 내민 손을 한번 잡은 밤은 내도록 손안에 머물렀던 따스한 온기를 떠올리며 잠을 설쳤던 것도 지금에 와서 떠올리니 모두 다 이상했다.
이것이 보통 주인을 섬기는 종의 마음인가. 황제 폐하를 모시는 이들은 비빈들이 아니어도 전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일생에 한 번도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섬기는 주인을 만나본 적이 없는 화운은 지금과 비교해볼 수 있는 이전의 마음 같은 것이 없었다.
아니겠지. 내가 설마 그렇게까지 주제를 모르지는 않겠지.
화운이 놀란 가슴을 애써 그렇게 다독이고 있을 때.
“들어가도 되느냐.”
문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화운이 감히 오늘밤은 만나기를 바랄 수 없었던, 황제 성이한이었다.
뭐라고 정의 내리기 힘든, 아니 정의 내리고 싶지 않았던 수많은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있었다. 이한은 거기에 서서 자그맣게 몸을 웅크리고 앉은 채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화운을 마주하며 자신이 끝없이 외면하고 회피해왔던 마음을 돌이켜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거부하고 싶었다. 모른 척을 하고, 거기에 없는 척을 하고 싶었다. 제가 옳다고 믿어왔던 지난날들을 전부 부정해야만 할 현실이 두려웠다. 받아들이면 사는 내내 절대로 닮고 싶지 않았던 선황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게 될까 봐 뻔히 보이는 길을 두고 애먼 곳을 내도록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소용이 있었던가. 이한이 발버둥을 치며 노력하였던 그 모든 시도 중에 단 하나라도 뜻대로 먹혀든 것이 있었나. 이한은 결국 변한 화운을 믿었고, 그를 아끼게 되었으며, 애가 타 그를 찾았고, 그리워했고,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행동으로 연화운을 대했다. 그런 주제에 어차피 누구도 볼 수 없을 속마음으로만 수백 번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연화운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아니다 되뇌어 봐야 낙엽 무더기 속에 머리를 박고선 자신이 안 보일 거라 안도하는 새와 다를 것이 없었다.
화운은 너무 놀라 인사를 하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울고 있지는 않았으나 두 눈은 젖어 있어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만 같았다. 후궁이라면 응당 바라 마지않을 황제의 성총을 거절하고, 연화운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지치고 서러운 얼굴을 하고 있나.
이한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하여 다 살피지 못한 연화운의 마음속에는. 이따금 짐작도 하지 못할 얼굴로 이한의 마음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곤 했던 연화운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가.
이제 와 이한은 자신이 제 감정을 묻어두기 바빠 진중하게 들여다본 적이 없는 연화운에 대해 생각했다.
“화,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한참을 멍한 얼굴로 이한을 바라보고만 있던 화운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침대에서 내려와 인사를 올렸다. 이한은 그의 앞까지 천천히 걸어가 두 손으로 화운의 어깨를 살짝 잡고선 몸을 일으켜 세운다. 저의 손이 닿자 단박에 느껴질 정도로 긴장하여 힘이 들어가는 화운의 몸을 느끼며 이한은 입매를 굳혔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이한은 그 모든 부정하고 싶은 감정을 뛰어넘어 화운에게 닿고 싶은 자신의 마음에 취해 정작 모든 것이 더 어려운 화운의 마음을 짐작도 하지 못했다. 오 태감이 곁에서 일러주지 않았다면 이한은 밤이 다 가도록 화운에게 거절당한 저의 마음만을 돌아보며 지새웠을 것이다. 오로지 제 감정에 홀로 취해 이리저리 허둥대기만 하던 그간의 일들을 돌아보며, 이한이 화운을 향해 말했다.
“걱정이 되어 왔다.”
“폐하….”
“너를 탓하려 온 것이 아니니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돼.”
이한은 화운을 조심히 이끌어 침대에 앉힌 후 곁에 나란히 앉았다. 화운이 급히 밖으로 나오느라 아무렇게나 엉클어진 이불을 보는 것조차 왜 이렇게 마음이 안타까운 것인지. 이한은 그 구겨진 이불이 꼭 홀로 두려움에 떨고 있던 화운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이한은 말을 이었다.
“괜찮으냐.”
“아, 저는… 저는….”
화운이 말을 몇 번이나 더듬었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그랬다. 비록 밤을 거절하느라 오 태감에게 거짓을 고했던 화운이었으나 눈앞에 있는 이한을 보니 차마 그를 직접 보고 거짓말을 하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운아.”
그때, 마치 배려인 듯 화운의 말을 끊으며 이한이 그를 불렀다. 시공간이 멈춘 듯, 화운이 말을 하다 만 채로 입을 벌리고선 황제를 바라보았다.
운아.
그 말 한 마디에 겨우 견뎌내고 있던 마음이 전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