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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24)화 (12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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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연화운이야 이미 황제의 시침을 든 적이 있었겠으나 그것은 지금 화운의 경험이 아니었다. 화운은 사내는커녕 여인과 손을 잡아본 경험조차도 없던 사람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황제와 밤을 보내는 일은 당연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화운이 이토록 겁을 먹어 거짓으로 황제의 명을 거부한 이유는 단순히 경험이 없음에도 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화운은, 자신이 감히 황제 폐하의 성총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말이 아닌가. 그는 연화운이 아니다. 연화운의 몸을 하고는 있지만 그는 너무나도 하찮은 천민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황제를 속이고 있는 대역 죄인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화운이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황제의 밤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아니 되지. 내가 그럴 수는 없지….”

“마마….”

두려워 떨다가, 이윽고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서러운 얼굴로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주인의 모습에 아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화운을 불렀다. 폐하께서 제 주인을 찾지 않으신 지가 언제인데. 겨우 다시 찾아온 기회가 이렇게 날아가 버린 것도 아쉽거니와 지금 제 주인이 보여주는 모습 또한 마치 제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서 아진은 덩달아 울음을 터트리고만 싶었다.


“서정궁이 여기서 만리(萬里)는 떨어져 있는 모양이지, 아주.”

이한은 앉아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연신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서정궁으로 간 오 태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가 중천전을 떠난 지가 벌써 몇 시간은 흐른 것 같았다. 물론 정말로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 태감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이한이 마음이 그러했다는 말이다.

“…떨릴 일이 뭐가 있다고.”

사실 오 태감을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이한은 황제이다. 황제가 오늘 밤 어느 처소에서 머물겠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것은 허락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명을 내리는 일이었다. 황후를 비롯한 황궁 안의 어느 누가 감히 황제의 밤을 거부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걸 아는데도.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황제의 시침을 들지 못했던 연화운이라면 더더욱 반길 일임을 알고 있는데도 이토록 초조하고 긴장되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지.

생각해 보면 매번 이런 식이다. 보통이라면 지극히 평범해 아무것도 아닌 일들도 오로지 연화운과 관련되기만 하면 쉽게 그를 동요시켰다. 이한은 이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이 모든 감정들로부터 도망치기 어려워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꾸만 요동치는 마음을 어떻게든 내리누르려 이한은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가만히 입에 물고는 생각에 잠겼다. 경사방에서 보내는 패에 적힌 ‘연빈’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그 패를 모두 물리고 고요한 침전에 앉아 깊은 생각에 수도 없이 잠겨들면서. 그 밤들에 아무리 거부하고 또 거부해 보아도 지독하게 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왔던 연화운의 얼굴을 지워내려 애를 쓰면서. 사실 이한은 수도 없이 연화운의 밤을 취하는 상상을 했다.

이한이 알던 것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가 이토록 달라졌으니 그와 밤을 보낸다면 이한이 기억하고 있는 밤들과는 조금도 같지 않을 것이 뻔했다. 과연 어떤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볼 것인가. 살결에 입술이 닿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열에 들뜬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또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허물어지게 만들 것인가.

열이 올라 정신없는 그의 입술을 정신없이 탐했던 날 이후로 상황은 더더욱 심해졌다. 그런 생각이 한번 들기 시작하면 그날 느꼈던 화운의 부드러운 입술이, 연약하게 헐떡이던 숨과, 품에 전부 들어오던 마른 몸이 생생하게 떠올라 더욱 짙은 상상들 또한 보일 듯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그런 밤이면 이한은 늦은 시간까지 쉬이 잠들지 못해 홀로 고생스러운 밤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일은 이한에게도 처음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연화운과 처음 보내는 밤은 물론 아니었으나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한 연화운과는 모든 것이 처음인 셈이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긴장감은 더더욱 심해졌다. 이제 이한은 도대체 어떻게 입을 맞추며 시작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다음을 이어 가야 하는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

문득 물고 있던 손에서 약간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자 물고 있던 손가락에 선명한 잇자국이 나 있었다. 화운과의 밤을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간 탓이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첫날밤에도 이처럼 긴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가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폐하, 소인 다녀왔습니다.”

“그래. 말은 잘 전하고 왔느냐.”

이한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금까지 연화운 생각은 조금도 하고 있지 않았고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절대로 아니었다는 듯이 평범하게 대꾸했다. 헌데 오 태감의 반응이 이상했다.

“네. 헌데 폐하….”

“……?”

“연빈마마께서….”

“연빈이 왜?”

“그것이… 연빈마마께서….”

불쑥 불안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오 태감의 역할을 그저 황제의 명을 전하고 오는 것에 불과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을 시킨 것도 아니고 어려운 자리에 보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오 태감은 답지 않게 말하기를 어려워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초조했던 마음이 다시금 크게 쿵쿵거리기 시작하자 이한이 초조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찌 망설여. 연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더냐?”

“그것이… 연빈마마께서 오늘 몸이 과히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

“오늘 폐하를 모시기가 어려우실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뭐?”

“연빈마마께서 몹시도 죄송해하시며 곧 죄를 청하러 오실 것이나… 오늘밤은 폐하를 모실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졸지에 홀로 김칫국을 거하게 마셔버린 이한이었다.

“왜… 왜?”

한참 동안 멍한 얼굴로 오 태감이 한 말을 곱씹던 황제가 겨우 내뱉은 말은 고작해야 이것이었다. 왜? 도대체 왜? 이한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오 태감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내가 싫대?”

얼마나 놀란 건지 황제의 말투는 마치 여염집의 철부지 소년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오 태감이 황망한 표정을 전부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순간 마주친 눈망울이 어찌나 처연한지 자신의 주군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다니, 이런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하실 수도 있는 분이었다니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그사이 오 태감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온 이한이 말했다.

“나랑 밤을 보내는 것이 싫다고 하더냐?”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연빈마마께서는 몸이 안 좋으신지라….”

“내가 가는 것이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은 아니고?”

이한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운이 자신을 거부할 거라고는 정말 전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가 품에 안을 화운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하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부드럽게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런 것들만 걱정하고 있던 이한에게 오 태감의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연빈마마께서는 폐하의 후궁이신데 어찌 폐하의 걸음을 저어하겠습니까.”

화운을 대신해 변명하듯 꺼내놓은 오 태감의 말은 사실 이치에 맞았다. 하지만 이한은 왠지 그 말을 그대로 수용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한은 거기에 서서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신이 그동안 보아왔던 연화운의 모습을 떠올렸다. 단지 후궁이라서가 아니라 그는 진심으로 황제를 극진히 대하고 경외하여 어떤 날은 너무나도 깍듯한 태도로 이한의 마음을 괜히 서운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런 이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황제의 걸음을 거절했다?

이한은 그 대답이 너무나도 석연찮았다. 흔들렸던 표정을 재빨리 갈무리하며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나를 마주할 수도 없을 만큼 아파 보였느냐.”

궤를 달리한 황제의 물음에 덩달아 진지한 얼굴이 된 오 태감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안색이 창백하긴 하였으나 평소와 비교에 크게 다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것이 아니라 네가 본 것을 솔직히 고하라. 허면… 싫은 기색이었느냐?”

그가 말한 것이 아니라 네가 본 것을 고하라. 황제의 그 질문은 오 태감이 차마 뱉지 못하였던 속내를 꺼내 놓으라는 뜻이었다. 저를 대하던 화운의 모습을 곰곰이 떠올려본 오 태감이 말했다.

“싫은 기색은 아니었고….”

“아니었고…?”

“연빈마마께서는 마치 겁을 먹고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겁을 먹었다….”

“예, 폐하. 마치 크게 두려운 일을 마주하여 떠는 사람처럼… 소인의 눈에는 그리 보였습니다.”

황제의 심장이 툭, 떨어져 내렸다. 겁이 났다니. 두려워하는 것처럼 떨었다니. 그 말은 화운이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전에 이한은 이미 화운에게 내가 두려우냐 그리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화운의 대답이 어떠했나. 그는 폐하를 너무나도 존경하여 어려워할 뿐 두려워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헌데 이제 와 겁을 먹고 물러서는 건 무엇 때문이냔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한은 오히려 그 대화를 나눈 이후에 연빈에게 더 무르게 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그래선 안 된다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고, 늦은 밤 태후궁을 찾으면서까지 애썼지만 결국엔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린 채 화운을 다시 찾고야 말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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