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23)화 (12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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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성.”

“예, 폐하.”

영영 지지 않을 것처럼 길었던 하루해가 어느덧 저물어가고 있을 무렵, 이한이 정무를 보던 중천전에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경사방에서 올린 패를 습관처럼 전부 물리고 난 후로 이한이 심각한 얼굴로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오 태감은 지금 황제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번뇌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쉬이 짐작할 수가 있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이것은 연빈에게 서정궁이 주어졌을 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황후가 그러더군. 자신은 태후와 같지 아니하고, 나 또한 선황과는 다른 분이 아니시냐고.”

“…황후마마의 말씀이 실로 옳은 말씀이 아닙니까.”

“허면 네가 생각할 때… 내가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으냐.”

황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그저 그렇게만 물었다. 내가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지금 내딛고 싶은 이 걸음을 나중에 돌아보며 가슴을 치진 않겠느냐고. 그 선택이 무엇인지 황제는 말하지 않았으나 이미 오래 전에 그 마음을 전부 짐작한 오 태감은 차마 모르는 척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지엄하진 폐하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겠나이까.”

“…….”

“다만 폐하….”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오 태감의 눈동자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선황의 병이 갑작스럽게 심해지고 그를 틈타 역모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갑자기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이한을 오 태감은 오랫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며 지켜봤다. 그간 백성들은 물론이오, 황궁 내의 가장 미천한 이들에게까지 더없이 자비로웠던 황제였으니 어찌 보면 그분의 가장 큰 은혜를 입으며 살아왔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오 태감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 태감은 선황의 곁에도 있었던 자였다. 지금의 황제처럼 선황이 즉위하자마자 그를 모셨던 건 아니지만 그 기간이 선황의 성품을 온몸으로 체득할 정도는 되었다. 오 태감은 지금의 황제가 자신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해주고, 아껴주며, 보호해주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폐하께오선 언제나, 누구에게나 더없이 관대하여 기회를 주시는 분이셨지요.”

오 태감은 이토록 선하고 어진 황제가 행복하길 바랐다. 단순히 성군으로 꼽히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태평성대를 이어가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 태감은 자신의 황제가 동시에 개인적인 행복을 얻기를,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을 가지시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의 황제는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기회를 한 번 내어주시는 건 어떠십니까.”

오 태감은 그것이 누구를 위한 기회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얼핏 들으면 당연히 연빈을 칭하는 말인 것 같으나 곱씹어 생각하면 황제 그 자신에게 기회를 주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황제의, 이한의 시선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오 태감에게 닿았다. 황제가 그 말을 어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해가 산 너머로 거의 다 저물어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을 즈음, 이한이 말했다.

“서정궁에 다녀오너라.”

오 태감은 기꺼이 황제의 명을 따랐다.


“오 공공이 이 시간에 예까지 무슨 일이시오?”

화운이 직접 서정궁까지 걸음을 한 오 태감을 반기며 물었다. 혹시 또 서신을 보내오신 건가 싶은 마음에 자꾸만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려 해 입가에 힘을 주어야 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오 태감이 직접 오고 가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긴 하였으나 그만큼 폐하께서 제게 전하는 서신을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면 마냥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연빈마마.”

하지만 오 태감의 목소리를 들은 화운은 순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서신 한 장을 전하러 왔다기엔 오 태감의 목소리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말을 기다리지 못하고 화운이 불쑥 물었다.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있소?”

“아닙니다, 마마.”

“허면….”

아니라는 오 태감의 대답에 화운이 짧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딱딱해 보이는 오 태감의 표정이며 목소리가 미묘한 불안함을 불러일으켰다. 이윽고 오 태감이 말했다.

“오늘밤 폐하께서 서정궁에 머무실 것입니다.”

이번에는 화운뿐만이 아니라 그의 곁에 있던 아진과 소정의 얼굴까지 굳었다. 순식간에 안색이 하얗게 질린 화운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게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마마. 폐하께서 오늘밤을 서정궁에서 보내실 것이니 마마께서는 폐하를 맞이할 준비를 하시지요.”

화운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그, 그 말은… 그건….”

머리가 핑핑 돌았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꺼내려는 말들이 자꾸만 목에서 걸려 음성이 되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화운은 너무 놀랐고, 당황했고, 겁을 집어 먹고 있었다. 거의 숨을 헐떡이며 화운이 겨우 말을 이었다.

“오 공공의 말은… 내가… 내가 오늘 폐하의….”

“예, 마마. 마마께서는 오늘 폐하의 시침을 드시게 될 것이옵니다.”

제멋대로 오해한 건 아닐까. 그런 뜻이 아닌데 괜히 혼자 앞서 생각한 건 아닐까 하던 화운에게 오 태감이 완전히 쐐기를 박았다. 옆에서 아진이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마마!’ 하고 부르는 것이 들렸으나 화운은 너무 빠르게 심장이 뛰고 온몸이 떨려와 아진의 목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그런 화운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 태감이 덧붙여 말했다.

“마마께서도 아시겠지만 폐하께서 저를 직접 보내 이르시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사옵니다.”

맞는 말이었다. 보통 황제가 패를 뒤집어 후궁의 처소를 선택하면 그를 후궁전에 이르는 건 경사방의 몫이었다. 오 태감이 직접 찾아와 말을 전하는 건 후궁에게는 여태 한 번도 없던 일이고 황후궁에도 드문 일이었다.

“가, 갑자기… 너무 갑작스러워서….”

하지만 화운의 반응은 오 태감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단지 놀랐다거나 너무 좋아 당황한 것과는 전혀 다른 화운의 목소리에 오 태감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화운을 바라보았다. 파리하게 질린 화운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이 상황을 겁내고 있는 것 같았다.

“연빈마마…?”

그것이 놀랍고 의아해 오 태감이 그를 한 번 부르자 화운은 마치 호랑이에게 쫓겨 도망치는 작은 동물이라도 된 듯 떨어대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예?”

“너무… 너무나도 황공한 일이고… 기쁜… 기쁜 일이지만 내가 오늘 몸이… 몸이 너무 좋지 않으니….”

화운은 횡설수설하듯 말을 잇고 있었다. 오 태감이 당황하여 옆에서 마찬가지로 놀란 듯한 아진을 바라보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제 주인과 오 태감을 번갈아 바라보던 아진이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 공공. 그것이… 저희 마마께서 오늘 하루 종일 몸이 좋지 못하셨던지라 안 그래도 방금 태의를 부를 참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아진 역시 제 주인이 어째서 이러는지, 이 좋은 기회를 왜 마다하고 계시는지 알지 못했으나 어쨌든 이미 마마께서 그리 말씀을 하셨으니 아진은 마마를 도와야만 했다. 오 태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으나, 아진은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입니다. 마마의 창백한 안색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러니 오 공공이 폐하께 잘, 잘 말씀을 전해주셔요. 부탁드립니다.”

아진의 말을 들은 오 태감의 시선이 다시 화운에게로 향했다. 의자에 걸터앉아 입술을 깨물고 있는 화운은 누가 보아도 매우 아픈 사람 같았다. 이상한 점은 그가 황제의 시침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갑자기 이런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오 태감이 연빈을 향해 그런 것들을 따져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연빈마마. 폐하께서 걱정하실 테니 어서 빨리 태의를 불러 진맥을 받으시지요.”

“그… 그러겠소…. 폐하께 송구스럽다 전해주시오. 몸이 나아지면 직접 죄를 청하러 갈 테니….”

“예, 마마.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인사를 한 오 태감이 이윽고 서정궁을 빠져나갔다.

“마마!”

아진은 의자에 앉은 채로 허물어지는 화운의 몸을 재빨리 받아 안았다. 화운은 정말로 어딘가 잘못된 사람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마마, 갑자기 어찌 이러세요. 태의를 불러올까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괜찮다고 하면서도 화운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요동치던 심장이 쉬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운에게 이 일은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바라지조차 않았던 일이다. 게다가 최근의 황제는 후궁들은 물론이고 황후궁에서도 밤을 머무는 일이 없었건만 갑자기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처소에서 밤을 보내신다니 화운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이 한기가 든 것처럼 으슬으슬 추웠다가, 화염을 집어삼킨 것처럼 열이 오르기를 반복했다. 지난번 폐하를 두고 망측하게 꾼 꿈은 또 왜 지금 생각나는 건지 화운은 차라리 기절해버리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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