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22)화 (12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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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지금 후궁 자리에 있음을 감안해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 흉터를 보고 눈에 거슬려 할 사람은 이 황궁에 황제가 유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와 황제가 자신의 몸을 취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화운은 벌써 그 흉터에 대해 잊은 지 오래였다. 마치 비영을 위로하듯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화운이 말했다.

“그것을 계속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까.”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지.”

비영의 목소리는 단단해 보이면서도 연약한 것 같았고, 흔들림 하나 없는 것 같으면서도 몹시 어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운데에서 송현이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차를 홀짝였다. 화운은 자세를 조금 더 바로 하고 비영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처음 기억을 잃었을 때, 숙비마마께서는 얼마든지 저를 더 경계하실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이었지요. 제가 이전에 숙비마마께 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말입니다.”

단정한 화운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영은 그가 물에 빠진 후 처음 황후궁에 문후를 드리러 왔던 날을 떠올렸다. 화운이 말을 이어 갔다.

“헌데도 마마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지요. 만약 그때 마마께서 저를 그토록 관대하게 대해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 그때 숙비가 마음만 먹었다면 비호해줄 이 하나 없던 화운을 모욕하고 괴롭히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연빈이 그간 손윗사람인 숙비에게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굴었는지 이 황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숙비가 복수라도 하듯 화운을 집요하게 괴롭혔다고 하여도 화운을 가엽게 여기는 이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당시 화운이 황궁에서 적응하는 일은 훨씬 어려웠으리라.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화운의 말을 듣고 있는 비영에게 화운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역시 숙비마마께 받은 것이 많으니 이제 그만 편히 저를 대해주십시오, 숙비마마.”

비영은 거기에 앉아서 부드러운 물길처럼 저를 감싸는 화운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내도록 명치에 들어찬 돌덩이처럼 답답했던 걱정거리 하나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하여 비영이 이제야 다소 편해진 마음으로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을 하려고 했을 때.

“근데….”

가운데에서 눈동자만 굴리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송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모두 송현에게 향했고 통통한 볼을 부풀리며 송현이 말했다.

“연빈. 나도 연빈에게 아주 잘 대해주지 않았나요?”

비영과 화운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송현의 입술이 더욱 삐죽 튀어나왔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비영이 여전히 화운을 믿지 못해 경계할 때 먼저 손을 내밀고 친절하게 대해준 것이 누구냔 말이다. 웃음을 가득 머금은 화운이 어린 누이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정빈이 정안궁에 처음 와 주었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걸요. 얼마나 고마웠는데요.”

“그렇죠? 역시 그렇죠?”

후궁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더니 티 없고 사랑스러운 송현의 모습에 무거웠던 공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웃음만이 남았던 그날의 산책이었다.


“이러다 궁의 사람들이 전부 다 연화운과 친구라도 되겠군.”

숙비와 정빈이 화운과 산책을 하고 전각에서 도란도란 아주 사이좋게 간식까지 나누어 먹으며 담소를 즐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한이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퉁명스러운 얼굴이 얼마나 대단한지 오 태감은 제 신분도 잊고 저 얼굴을 혼자만 봐야 하는 게 아쉽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황급히 불경한 생각을 지운 오 태감이 말했다.

“그동안 연빈마마께서 홀로 겉돌기만 하셨는데 이제라도 다른 비빈마마들과 친하게 지내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이한이 금방 오 태감을 노려보았다. 벌써 제 속을 빤히 알아채고 있을 사람이 저렇게 눈치 없는 소리를 해대니 여간 얄미운 것이 아니었다. 오 태감이 몸을 사리듯 얼른 허리를 굽혔다. 그런 오 태감을 계속 노려보던 이한은 이내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리며 탁자 위를 손끝으로 톡, 톡 두드렸다. 왜 지금 이 순간 주안성의 궁인들이 화운을 두고 미공자니 무어니 하며 입방아를 찧어댔던 일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홀로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연빈이 여인들이 보기에도 매력적인 얼굴이냐?”

순간 오 태감은 제가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방금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질문을 한 건지 전혀 알지 못한 채 홀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오 태감은 하마터면 황제 폐하의 앞에서 크게 한숨을 내쉴 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창경정 연회 때도…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다른 이들을 통솔하고 숙비와 정빈을 지켜냈으니 그들이 보기엔 연빈이 영웅처럼 멋있어 보였을 수도 있지….”

“폐, 폐하….”

“예전에는 미색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긴 했어도 딱히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은 아니었는데… 요즘은 내가 보기에도 단지 어여쁜 것만이 아니라 단정하고 고아한 매력이 있는 것이 여인들이 보기엔 영락없이….”

“폐하. 소인이 감히 들을 수 없는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놔두면 그 말이 어디까지 뻗어갈지 알 수 없어 급기야 오 태감이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이한은 순간 얘가 갑자기 왜 유난이야, 싶은 얼굴로 오 태감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곤 크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한은 자신의 비빈들이 서로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한 것이 다름이 없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스스로 놀란 이한이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단지 연화운이 저는 빼놓고 다른 이들과 시간을 보낸 게 서운해서 한 말이었으나 누군가 들었다면 대역죄를 논하였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진성아. 진짜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어 결국 이한이 두 손을 들어 저의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멍청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아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하여간에 이게 전부 다 연화운이 자신을 두고 다른 이들과 명하원 구경을 하여 그런 것이다.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연빈마마와 본래 연이 있었소?”

한낮 더위가 기승일 때는 서정궁을 지키는 시위들에게 얼음이 담긴 물통을 하나씩 주라는 연빈의 명이 있었다. 오늘은 그 첫날이라 소정이 직접 시위들을 한 명 한 명 챙기며 물통을 나누어 주고 있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물통을 전해 받던 서천은 갑자기 흘러나온 소정의 물음에 표정을 굳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소정의 얼굴은 더없이 무표정하여 그가 무슨 의도로 질문을 한 것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서천은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꾸며내며 대답했다.

“미천한 신분으로 연빈마마와 무슨 연이 닿을 수가 있겠소. 나는 그저 정안궁을 지키는 시위였을 뿐이오.”

“얼마 전 갑자기 정안궁으로 소속이 바뀌었다던데….”

“정안궁에 시위가 부족하게 되어 내가 온 것인데 문제가 있소?”

조금의 틈도 내주지 않기 위해 목소리의 떨림까지 신경 쓰며 서천은 소정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채기 위해 애썼다. 연빈이 자신을 의심하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소정에게 나를 떠보라 시킨 걸까. 하기야, 지난번 달밤에 연빈을 마주쳤을 때 그토록 부자연스럽게 굴었으니 의심을 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사이 서천을 다시 한 번 위아래로 훑어본 소정이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문제는 무슨. 그냥 궁금하여 물어봤소.”

그리고 소정은 더 이상의 관심은 없다는 듯 그 자리를 떠났다. 서천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소정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서천은 여전히 혼란한 마음을 다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서천에겐 너무나도 익숙했던 하운의 검술이 떠올라 잠조차 편히 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안 그래도 우연인지 무엇인지 피서 별궁에까지 함께 오게 되어 마음이 번잡스럽기가 그지없건만 연빈의 측근이 된 이가 난데없이 이런 질문을 하니 거슬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혹시….”

그때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들었던 자문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연빈마마께서 네가 하운과 친우였다는 걸 알게 되신 거 아니야?”

서천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날 자신의 태도는 누가 봐도 의심스러웠고 만약 연빈이 자신에 대해 알아보려 했다면 하운과의 연관을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테다.

허면 그는 그날 밤, 왜 자신을 감싸준 걸까. 그 자리에서 포박하고 죄를 물었어도 할 말이 없었을 텐데 어째서 거짓말을 해가며 자신을 보호해준 걸까. 게다가 그 이후로도 따로 서천을 벌하지도 않았고 명하원으로 오는 것 또한 내버려 두었다. 연빈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

이미 소정이 멀어져 간 길을 바라보는 서천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의문을 더없이 깊어져만 가는데 답을 찾을 길은 막막하기만 하니 그저 마음만 답답한 날들이 더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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