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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운은 화운 나름대로 죽을 맛이었다. 안 그래도 밤마다 꿈에서 느꼈던 감정이 떠올라 곤욕스럽건만 황제가 그날 일을 입에 담으니 정신이 다 아찔했다. 폐하께서는 아픈 자신을 걱정해 바쁜 와중에도 친히 와 주셨는데 자신은 헛된 욕망에 젖어 그런 꿈이나 꾸고 있었다니 차마 폐하를 마주할 염치가 없었다. 화운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자 한층 더 울상이 되어버린 이한이 또 말했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것이야?”
“그것이… 잠시 눈을 떠 폐하를 뵈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기는 하온데….”
“그것뿐이냐? 다른 것은 기억나는 게 없고?”
“…예, 폐하. 혹시 제가 뭔가 실수라도 하였는지요….”
“허….”
몇 번을 물어도 달라지지 않는 대답에 이한이 허망한 숨을 터트리듯 내쉬었다. 황제가 되어서 아픈 이를 두고 홀로 욕망을 채우는 짓을 했으니 차라리 화운이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다. 너는 곧장 다시 정신을 잃었는데 실수할 것이 뭐가 있느냐.”
“몸이 약하여 자주 앓는 저를 매번 챙겨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래. 그래….”
대답하는 황제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화운은 좀처럼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서정궁에서 이한은 화운과 함께 오찬을 들었다. 둘의 관계가 변한 후, 화운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록 화운이 엄청난 일 하나를 기억하지 못한 것이 이한을 다소 섭섭하게 만들긴 하였으나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함께 음식을 먹는 일이 생각 외로 너무 좋아 서운한 마음이 전부 가시는 것 같았다. 수발을 드는 이를 전부 물리고 단둘이 식사를 한 것도 특별한 일이었다. 어딜 가나 수많은 법도가 존재하는 황궁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조용히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였던 시간은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으나 이한은 그 시간 동안 내내 저를 짓누르고 있던 피로감이 전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처리해야 하는 일들도, 고민하고 있던 일들도 그 시간만큼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여 더없이 상쾌해진 기분으로 막 서정궁을 나선 참이었는데.
“숙비와 정빈이 여긴 무슨 일로 왔지?”
이한은 가마 위에서 저를 향해 인사를 올리고 있는 두 후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한은 여전히 서정궁 앞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정빈이 가벼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연빈을 보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연빈을?”
“예, 폐하. 연빈과 함께 명하원 구경을 하려고요.”
명하원 구경을 왜? 연빈이 왜 너희와 함께? 이한의 입술이 일순 움찔거렸다. 의아해하는 황제의 표정을 읽은 숙비가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연빈은 기억을 잃었으니 명하원에 처음 와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겠지요. 하여 저희가 산책 겸 명하원 곳곳을 보여줄까 하여 온 것입니다, 폐하.”
“아….”
숙비의 말을 듣고서야 이한은 아차, 하는 마음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듣고 보니 과연 옳은 말이었다. 왜 자신은 진즉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스스로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같이 산책을 한단 말이지.”
“예, 폐하.”
“그래…. 연빈의 몸이 아직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니니 너무 무리는 하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래도 어찌하겠나. 이미 예까지 온 두 사람에게 구경은 내가 나중에 시켜줄 터이니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이한은 끓는 속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돌렸다.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숙비와 정빈이 저만치 멀어지고 나서 이한은 옆에 따르고 있는 오 태감을 향해 불퉁하게 말했다.
“연빈에게는 명하원이 낯설 거라는 말 같은 건 네가 미리 내게 일러줘야 하는 게 아니냐?”
천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반박할 수가 없는 오 태감이었다.
“마마, 잠시만.”
숙비와 정빈으로부터 서정궁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곧장 나오면 된다는 전언을 받고 막 나서려는 화운의 걸음을 소정이 붙들었다. 화운과 아진이 함께 돌아보자 눈앞에 소정이 고이 내민 신발이 보였다. 의아한 얼굴을 한 화운에게 소정이 말했다.
“가마를 타신다고 하여도 정원을 둘러보시려면 분명 걸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 신발로 갈아 신으시면 발이 좀 더 편하실 것이옵니다.”
곁에 서 있던 아진이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뱉었다. 소정이 내민 신발은 지금 화운이 신고 있는 것과 모양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안쪽 바닥이 조금 더 푹신하게 덧대어져 있는 신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아진은 입술을 삐죽이지 않기 위해 애쓰며 표정을 관리했다. 자신이 먼저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분했으나 얼마 전 서서와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에 남은 탓이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소정.”
생각지도 못한 점까지 신경 써 주는 소정의 태도에 화운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 정안궁에 왔을 때만 해도 벌벌 떨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이가 그사이 많이 편해진 것 같아 덩달아 마음이 놓였다. 소정이 신발을 화운의 발 앞에 내려놓자 아진이 화운의 팔을 붙들어 그가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왔다. 화운이 신고 있던 신발을 벗기고 새로운 신으로 갈아 신기는 건 소정의 몫이었다. 아진은 화운의 팔을 잡은 채로 앞에 쪼그리고 앉은 소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처음엔 정안궁에 와서도 제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해 마마의 앞에서 두려운 티를 내는 유약함과 눈치 없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정안궁의 식구가 되었으니 잘 적응하고 마마를 챙겨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진은 그 후로도 계속 소정에게 눈치를 주고 핀잔하기 일쑤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서서의 말대로 아진은 그를 내심 질투했던 것이다. 그동안 마마와 가장 가까운 자리를 홀로 차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굴러온 이와 그 자리를 나누는 게 불편하고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제가 무엇이라고, 마마의 곁을 독차지하네 마네 하는 생각이 어디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자신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은 소정이 떠올려 챙길 수 있다면 몸도 약한 저들의 주인이 한결 더 편하게 생활할 수 있을 테니 제 감정만 제외하고 본다면 어느 쪽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득이었다.
“그럼 다녀올게.”
발을 한결 편안하게 지지해 주는 신으로 갈아 신은 화운이 소정을 향해 말한 뒤 걸음을 옮겼다. 이번 산책은 아진만 대동한 채 갈 생각이었다. 자연스럽게 화운의 뒤를 따라나서던 아진이 불현듯 걸음을 멈춰 서서 소정에게 말했다.
“잘했어.”
“…무슨?”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네 덕분에 마마께서 조금 더 편하게 다녀오실 수 있으실 테니 잘했다구.”
매우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으나 명백한 칭찬이었다. 종이 된 몸으로 주인을 잘 모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므로 아진은 사사롭고 유치한 자신의 감정은 빨리 떨쳐버리기로 했다. 생각지도 못한 아진의 말에 놀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소정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고맙소, 아진 낭자. 아직 낭자의 눈에는 내가 한참 부족하겠으나 나도 마마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할 테니 잘 부탁드리오.”
아진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소정은 순순히 더 노력하겠다 대답했다. 괜히 머쓱해진 아진은 더 말을 잇지 않고 그대로 화운을 따라나섰다. 내실에 홀로 남은 소정은 저만치 멀어져가는 화운과 아진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명하원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정원인 월상원을 둘러보던 숙비 비영과 정빈 송현, 그리고 연빈 화운이 전각에 자리를 잡고 앉자 뒤를 따르던 숙비의 궁녀들이 재빨리 전각의 탁자 위에 챙겨온 간식들을 펼쳐놓는다. 찬물로 우려 마시는 차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식탁에 앉아 화운은 불현듯 너무나도 달라진 자신의 삶을 바라보았다.
먹고사는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산책하고, 누군가의 수발을 받고, 걷다 지쳐 앉으면 그 앞에 바로 다과상이 차려지는 삶이라니. 이제는 제법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문득 자신이 죽음을 통해 얼마나 다른 삶으로 내던져졌는지 실감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연빈.”
깊은 상념으로 빠져들려던 화운을 깨운 건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러온 비영이었다. 화운이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치자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비영이 입을 열었다.
“상처는… 괜찮은가.”
“아….”
생각지 못한 질문에 화운이 대답 없이 눈을 깜빡였다. 속을 알 수 없다 여겼던 표정이 사실은 염려를 담고 있었다는 것이 이제야 보였다. 상처라고 묻기는 하였으나 이제 와 비영이 묻는 건 분명 흉터를 말하는 것이렷다. 상처가 아문 자리에는 여전히 깊은 흔적이 남았다. 태의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영영 지우기 힘들 거라 하였다. 하지만 화운은 흉터 따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화운에게 흉터는 이미 다른 삶을 살며 익숙하게 가져본 것이었다. 귀한 집 자제로 태어나 곱게 자라온 이들에겐 대단히 특별한 일일지 모르나 지금의 화운에게는 신경 쓸 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화운은 그저 자신의 상처에 약을 바를 때마다 울 것처럼 속상해하는 아진의 반응을 보고 높으신 분들께는 이것이 대단한 일인가 보구나 짐작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