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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20)화 (12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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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폐하께서 정말 신경을 많이 써 주셨나 봐요…!”

명하원에서 화운이 머물게 될 처소인 서정궁은 황후궁을 제외하고는 황제께서 머무실 중천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궁이었다. 처소 안은 얼마나 꼼꼼하고 세심하게 꾸며 놓았는지 일 년 동안 비어 있던 궁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진이 내실에 놓인 풍륜의 날개를 가만히 돌려보자 시원한 바람과 함께 그윽한 향이 퍼졌다. 직접 화운을 궁까지 안내한 내무부의 정 총관이 제가 다 흐뭇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연빈마마의 처소에 특별히 신경 쓰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폐하께서 말이오?”

“예, 마마. 여기에 얼음을 놓으면 훨씬 더 시원해질 것이나 마마께오선 몸이 약하시니 너무 가까이에 두진 마시라는 말씀도 남기셨지요.”

이어지는 정 총관의 말에 아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화운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정안궁 궁인들은 명하원으로 피서 오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궁 곳곳에 물이 흘러 시원한 명하원이 다른 이들에게야 무릉도원처럼 좋은 곳이었겠으나, 불청객이나 다름없는 저들의 주인 때문에 정안궁의 궁인들은 언제나 군식구처럼 주눅 들어 가장 구석에 있는 궁에 머무르곤 했다.

정안궁 자체가 가지고 있던 화려한 위엄마저 사라진 연빈의 처소는 그야말로 냉궁과 같았고 그럴 때면 더운 날씨로 인한 짜증까지 더해져 연빈의 상태가 더더욱 포악해졌으니 지옥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아진은 슬쩍 고개를 돌려 뜰에 줄지어 서 있는 궁인들의 모습을 슬쩍 바라보았다. 주인의 명이 없어 아직 바로 서 있긴 했으나 이리저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얼굴은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신나 보였다.

“신경 써 주어서 고맙소, 정 총관. 폐하께는 내가 따로 감사를 드리도록 하겠소.”

“예, 마마. 허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정 총관이 몸을 물리자마자 화운은 총관이 있어 자세히 훑어보지 못하였던 서정궁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크기와 화려함으로 보자면 정안궁에 비할 수는 없겠으나 단정하면서도 깨끗하게 꾸며진 것이 오히려 화운의 취향에는 더 잘 맞았다. 게다가 중천전과 가까운 곳이라니. 이전에는 매번 가장 먼 궁을 받았는데 폐하께서 이제 마마를 정말 아끼시는 모양이라는 아진의 말을 이미 들었던 화운은 자꾸만 마음이 들떠 두 손으로 연신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을 정도였다.

내실을 둘러보던 화운의 시선이 창가에 놓인 화병에 머물렀다. 꽃을 놓아둔 것은 내무부에서 보낸 사람들이겠으나 화운의 눈에는 그것이 꼭 폐하께서 놓으신 꽃처럼 보였다. 꽃뿐만이 아니었다. 화운에게는 이 서정궁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 그분이 직접 주신 것만 같았다. 전에는 화운이 머문 적이 없던 처소를 폐하께서 친히 정하여 내려 주셨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문득 참을 수 없이 황제가 보고 싶었다. 화운은 지난번 꿈과 현실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날 이후로 황제를 만나지 못했다. 화운은 화운대로 이궁을 위해 정양에 힘써야 했고 황제는 별궁으로 오기 전까지 처리해야 하는 일들로 바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물론 아예 단절이 되었던 건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황제와 화운은 서로의 궁을 오가는 서신을 보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것은 매번 몹시도 마음 한구석을 간질거리게 만드는 일이긴 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얼굴을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은 되지 못하였다.

화운의 손이 꽃잎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한번 황제를 떠올리고 나니 온통 머릿속을 가득 채워오는 생각을 어찌해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옥체는 강녕하신지. 정무를 보시느라 잠을 거르시는 건 아닌지. 편지에는 매번 괜찮다, 건강하다, 적혀 있긴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그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 중천전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내리누르고 있으려니 뒤로 아진이 와 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화운이 말했다.

“언제쯤이면 폐하를 뵈러 가도 될까?”

이제 막 명하원에 도착하였으니 분명히 바쁘실 것이다. 어쩌면 오늘은 시간을 내기 어려우실지도 몰랐다. 애가 탄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일까. 남부끄러운 꿈을 꿔 폐하의 용안을 어찌 뵈어야 하나 홀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하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지경이다. 화운은 처음 황제를 마주한 이후로 줄곧 그분을 그리워하며 살았으나 이상하게도 근자에 느끼는 그리움은 미묘하게 그 색이 다른 것 같았다. 괜히 조바심이 난 화운은 대답이 없는 아진을 향해 다시 물었다.

“응? 아진. 언제쯤이면 괜찮을까?”

“지금 보는 것은 아니 되느냐?”

그때 바로 어깨 너머에서, 그토록 그리웠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다소 멋쩍은 얼굴을 한 황제, 이한이 거기에 서 있었다. 아진은 언제 물러갔는지 내실엔 황제와 화운을 제외하고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폐하께서 어찌…!”

“왜. 내가 오지 못할 곳이라도 왔나?”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아…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리려던 화운의 팔을 붙들어 꿇지 못하게 만든 건 이한이었다. 놀라 올려다보는 화운과 시선을 마주한 채 이한이 말했다.

“꿇지 마라. 몸도 약하면서.”

“하오나….”

“앞으로도 우리 둘이 있을 땐 굳이 꿇으면서 인사할 필요 없다.”

“그렇지만, 폐하….”

“하오나고 그렇지만이고 간에 하지 말래도.”

분명 황제로서 명을 내리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꼭 어린 소년이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 같은 얼굴과 목소리다. 그것이 귀여워 화운은 방금 놀랐던 것도 잊고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희고 고운 얼굴에 순식간에 퍼지는 미소를 보며 이한은 말을 잃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답답하게 막혀 있던 숨이 다 트이는 기분이었다.

바쁘다고는 하지만 사실 마음만 먹으면 정안궁에 잠시 들를 시간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었다. 정 여유가 없다면 그를 청건전이나 안정전으로 불렀어도 상관없을 일이다. 그런데도 이한이 편지 몇 장만을 꼬박꼬박 보내며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건 지난 기억이 민망하고 수줍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듣는다면 비웃을 만한 이야기였다. 일국의 황제가. 황후는 물론이고 후궁들까지 여럿 두고 살아온 황제가 고작해야 제 후궁 하나와 입을 좀 맞췄다고 해서 민망하고 수줍은 기분이 들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여간에 연화운과 관련되기만 하면 이한은 평범하고 익숙했던 모든 일들이 이상하게 꼬이고 유난스러워진다.

“저… 폐하.”

그사이 웃음소리는 그쳤지만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화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한은 그와 눈을 마주쳐 듣고 있다는 표현을 하며 잡고 있던 화운의 팔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탁자 앞에 앉도록 했다. 혹시라도 더운 날 오래 서 있어 무리라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이한이 이끄는 대로 느릿하게 걸어 자리에 앉은 화운이 말했다.

“폐하께서 제가 이 궁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거야… 흠흠. 그렇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궁이 너무 아름답고 마음에 들어요.”

“그러하냐.”

“예, 폐하.”

이한은 진심으로 기쁜 듯 보이는 화운의 얼굴을 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이한이 생각할 때 궁이 아름다운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분명 있는 것 같은데 화운이 말을 해주지 않으니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든 탓이다.

지금 이 궁이 아름다운 것이 문제인가. 이 궁이 있는 위치가 중요하지.

물론 이한은 황제의 위엄이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으므로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그건 그렇고….”

게다가 이한에게도 정말 중요한 말은 따로 있었다. 사실은 벌써 한참 전에 했어야만 하는 말이었다. 제 말에 집중하고 있는 화운의 얼굴을 슬쩍 바라봤다 괜히 시선을 탁자 위 어딘가에 놓은 이한이 말을 이었다. 중요한 말은 아직 꺼내지도 못했는데 벌써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전에 그 일 말이다….”

“전에 그 일이라 하심은…?”

화운이 단박에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자 가슴이 더더욱 요동쳤다. 그간 애써 잊으려고 애썼던 그날의 기억이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라 이한의 전신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날 느꼈던 열기가, 부드러운 입안이, 연약하게 바르작거리던 마른 몸이, 바로 어제 보고 느꼈던 것처럼 아른거렸다. 이한은 괜히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지난번 네가 아팠을 때를 말하는 것이야.”

“아….”

그러자 화운의 얼굴 역시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시선을 내리고 있던 이한은 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화운 역시 황제에게서 시선을 떼곤 그 어깨 너머의 어딘가를 힐끗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날… 송구하옵니다, 폐하.”

“음?”

“폐하께서 다녀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경황이 없어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가지 못하였습니다.”

“이야기를 전해… 들어…?”

조금 전까지 길을 잃은 것처럼 이리저리 헤매던 이한의 시선이 이번에는 한껏 당황하여 화운에게로 향했다. 화운이 이번에는 탁자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예, 폐하. 그날 제가 정신이 없어서… 잠결에 폐하의 얼굴을 뵌 것 같긴 하였는데 꿈인 줄 알았던지라….”

“아… 허면….”

이한의 표정이 허탈해졌다. 그날 있었던 일 때문에 자신은 내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 태감에게 온갖 꼴을 다 보였건만 정작 이한을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그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믿기 힘든 현실에 이한이 화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허면 그날 일이 기억이 나질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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