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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19)화 (119/167)

119

무엇이 그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 다시 잠든 화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정안궁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이한은 내도록 고민했다. 어째서 연화운은 이한에게 다시 미움 받는 것이 당연히 예정된 사람처럼 굴고 있는 걸까. 어쩌면 최근 이한이 자신의 마음을 쉬이 다스리지 못해 정안궁을 잠시 찾지 않았던 것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넘기려 해도 연화운의 얼굴을 직접 눈앞에서 본 이한은 좀처럼 그 핑계를 납득할 수 없었다.

“내게 다 이르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깊이 가라앉는 눈동자를 한 채 이한이 홀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변했다는 연화운을 믿지 못했고, 그다음에는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을 인정했다. 허나 만약에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단순히 기억을 잃어 달라진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지금 연화운을 이다지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떤 것도 마음에 탁, 와 닿는 핑계가 없어 이한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빈 종이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화운이 정신을 차린 건 저녁때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긴 했지만 아침에 잠시 눈을 떴을 때보단 한결 몸이 나아진 것 같았다. 눈을 뜨자마자 약을 먹은 보람이 있는 모양이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상태를 살펴보던 화운의 눈이 크게 뜨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황제의 열기에 온통 잠식당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입술 사이를 버겁게 파고들던, 화운으로서는 난생처음 겪어본 타인의 뜨거운 살덩이의 감각이 마치 실제로 겪은 것처럼 되살아났다. 화운은 두 손을 들어 저의 입을 턱, 하고 틀어막았다가, 그다음에는 황제의 입술이 닿았던 목을 한 번 문질렀다가, 종국에는 그가 이를 세운 손목을 붙든다.

어째서 그런 망측한 꿈을 꾸었을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운은 행여나 누군가가 자신의 꿈을 엿볼까 봐 겁이 나 벌떡 몸을 일으켜 앉고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실은 어떠한 일도 벌어진 적이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화운은 손가락 끝으로 다시 한 번 저의 입술을 매만져본다. 버석거리는 입술이 꼭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도대체 무슨 꿈이 이다지도 생생한지, 입 속 아주 깊은 곳까지 침범하여 노골적으로 저를 핥아내던 황제의 열기가 떠오르자 괜히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미열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는 있겠으나 화운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명백한 흥분이었다. 황제의 커다란 손이 저의 목을 어르고 거세게 끌어당겨 입술을 벌려내던 순간을 떠올리자 생전 처음 겪어보는 저릿한 감각들이 순식간에 온몸을 파고들었다.

미쳤지. 내가 정말 미친 것이지. 화운은 손바닥으로 저의 뺨을 탁탁 두드리며 망측한 감각을 떨쳐내기 위해 애썼다. 그때 마침 침실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마마, 마침 일어나셨네요!”

죽을 들고 들어온 아진이었다. 서둘러 침대로 다가온 아진이 쟁반을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후 화운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마마.”

“…괜찮아. 푹 자고 일어났더니 많이 좋아졌어.”

“다행이에요. 우선 죽부터 드시고 바로 약 올리라고 할게요.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아진이 내민 죽 그릇을 받으며 화운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진을 그만 걱정시키고 싶은데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아진이 적당히 식혀 왔는지 그다지 뜨겁지 않은 죽을 한입 막 입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 아진이 말했다.

“폐하께서 다녀가셨던 건 기억하세요?”

화운은 하마터면 그대로 그릇을 놓칠 뻔했다. 씹는 것도 잊고 눈을 깜빡이던 화운이 이내 죽을 꿀꺽 삼키곤 입을 열었다.

“폐, 폐하께서… 다녀가셨다고?”

“예, 마마. 잠깐 정신을 차리셨다고 했는데 기억 안 나세요?”

“아니…. 아니, 나는….”

분명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그것이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진이 말을 이었다.

“돌아가실 때 표정이 어찌나 안 좋으시던지…. 걱정이 크신 것 같았어요.”

“그럴 리가….”

화운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폐하께서 정말로 정안궁에 다녀가셨다니. 잠시 가라앉았던 몸의 열기가 다시금 확 번져나갔다.

그렇다면 정말로 폐하께서, 폐하께서 내게.

화운은 이어지는 생각을 황급히 끊어내곤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마 잠시 눈을 떴을 때 곁에 있던 황제의 얼굴을 보고 정신을 잃은 뒤 그런 꿈을 꾼 것이 분명했다. 더더욱 폐하를 뵐 면목이 없어졌다. 폐하께서는 아픈 자신을 걱정해 바쁜 와중에도 예까지 와 주셨는데 자신은 그런 폐하를 보고는 그런 저급한 꿈이나 꾸고 있었다니.

“어쨌든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하시고 우선은 더 식기 전에 죽부터 드세요.”

“…으응.”

아진의 걱정스러운 시선 앞에 화운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 죽 한 숟가락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이 깊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자신이 황제 폐하를 그런 식으로 보고 있었던 걸까. 주제도 모르고. 그분의 후궁이 된 자신에 심취하여 이제는 감히 폐하의 밤까지도 욕심내고 있는 걸까.

아진이 놀랄까 봐 한숨을 속으로 꾹꾹 삼키며 화운이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앞으로 황제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너무나도 걱정이 되는 화운이었다.


“연빈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일어나시오. 오 공공이 예까지 어쩐 일이시오. 아진, 차를 좀 내오거라.”

황후궁으로 문후를 드리러 갈 차비를 하고 있던 화운은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오 태감을 반갑게 맞이하며 아진에게 말했다. 몸을 일으킨 오 태감이 황급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마마. 그보다… 미령하시었다고 들었는데 이제 몸은 괜찮으신지요.”

“물론이오. 신경 써주어 고맙소.”

“다름이 아니오라, 폐하의 명으로 전해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폐하께서… 오 공공에게 직접 다녀오라 하셨단 말이오?”

“예, 마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오 태감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오 태감은 비록 태감의 위치였으나 황제 폐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황궁에 태후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없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어떤 대신들은 물론이요, 황후마저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오 태감인데 그런 이를 시켜 직접 무언가를 전하라고 하는 건 그만큼 황제가 깊이 신경을 쓰고 있음을 뜻했다.

안 그래도 어제 일로 마음이 쉽게 다잡아지지 않는 화운은 은근슬쩍 요동치기 시작하는 심장을 모른 척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오 태감을 바라보았다. 오 태감이 화운에게 건넨 것은 서신 한 통이었다.

“이것은….”

“폐하께서 조회에 나가시기 전 적어 보내신 편지이옵니다.”

“편지…?”

“예, 마마. 폐하의 뜻을 제가 어찌 짐작할 수가 있겠냐마는 아프신 마마를 직접 찾아오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는지요.”

잘 봉해진 서신을 전해 받는 화운의 손이 절로 떨렸다. 지난번에 제가 먼저 서신을 보내 그 답을 받은 적이 있으나 폐하께서 먼저 이렇게 보내오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놀라고 당황한 사이에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마께서 열어 보시는 걸 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겉봉투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으려니 오 태감이 말을 이었다. ‘아….’ 하고 짧은 탄성을 흘린 화운이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겨우 봉투를 열어 안에 담긴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네가 이리 아플 때마다 내 속이 어떠한지 너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곧 명하원으로 여름 피서를 떠날 테니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어서 쾌차하도록 하여라. 너를 두고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간단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안엔 화운이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바라고, 아무 문제없이 명하원으로 화운과 함께 가고 싶은 황제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구구절절한 마음을 적어내린 편지를 여러 장 버리고서야 간신히 적어낸 이 짧고 간결한 글에 담긴 마음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는 오로지 황제 그 자신만이 아는 바였다.

다 읽는 데 몇 초도 걸리지 않는 그 편지를 화운은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저의 투박하고 보잘것없는 글씨와 달리 황제의 것은 뻗은 획 하나하나가 거침이 없고, 웅혼했으며, 한 폭의 그림처럼 유려하기까지 하여 그가 가진 천자로서의 위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답신을 주시겠습니까, 마마.”

홀린 듯 황제의 필체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화운을 일깨운 건 오 태감의 목소리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화운이 곧 대답했다.

“그리 해도 되겠소. 공공이 기다려야 할 터인데.”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폐하께서도 분명 기다리고 계실 터이니 감사한 일입니다.”

“고맙소. 아진, 부탁해.”

화운이 뭐가 그리 기쁜지 옆에서 연신 싱글벙글 웃음을 짓고 있던 아진에게 일렀다. 화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아진이 서둘러 탁자 위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 놓고는 먹을 갈았고 그 앞에 앉아 화운은 여전히 제 손엔 어색하기만 한 붓을 쥐었다. 어떠한 말로 답을 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진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본인은 알고 있을까. 이윽고 흰 종이 위로 붓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없이 볼품없어 부끄럽기만 하였던 필체도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완연하게 녹음이 우거지고, 태양이 살갗을 태울 만큼 맹렬하게 타오르던 계절. 황실은 사방에 물이 흘러 시원한 피서 별궁인 명하원으로 궁을 옮겼다. 여름을 온통 보내게 될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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