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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목이 말라 눈을 뜨자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황제가 정안궁에 있을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화운은 이것을 꿈이라고 생각했다. 악몽일까. 화운의 마음이 빠르게 움츠러들었다. 꿈에서 보는 황제는 대부분 화운을 경멸하거나 외면했다. 왈칵 눈물이 솟아올랐다. 오늘은 싫었다. 이런 악몽을 꾸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또다시 저의 기만을 탓하는 황제를 마주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폐하… 제발….”
저도 모르게 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꿈이라면 제발 깨길 바라면서. 아니면 단 한 번만 자신을 가엽게 여겨 이 꿈이 악몽으로 변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토록 간절한 화운의 앞에 앉은 황제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많이 아프냐. 어찌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야.”
그와 동시에 따스한 손바닥이 화운의 뺨을 감쌌다. 화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흐릿한 시야를 다잡으려 노력했다. 꿈인가. 현실인가. 모든 것이 너무나 혼망했다. 이렇게 다정하시었다가, 갑자기 또 변하시는 건 아닐까. 내가 이렇게 네게 잘 해주었는데 너는 어찌 나를 그리 속이고, 배신한 것이냐 야단을 치시는 건 아닐까. 수도 없이 꾸었던 악몽들이 연신 황제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화운은 황제의 손바닥에 뺨을 가만히 문질렀다. 살결로 전해지는 온기가 꼭 실제 같아 마음이 더욱 서러웠다. 이내 화운은 자신의 손을 천천히 황제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꿈이기에 가능한 충동이었다. 그가 자신을 이리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처럼, 화운도 그의 뺨을 감싸고 싶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악몽으로 변하기 전에 그 따스함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 오직 그것만이 화운의 차가운 밤을 지켜주는 온기였다.
“…….”
황제는 화운이 어째서 손을 뻗는지 그 의도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열이 있다고 하더니 그 때문에 정신이 완전히 온전치는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황제는. 이한은 기꺼이 그가 내민 손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할 수만 있다면 화운에게 자신이 곁에 있음을 조금 더 선명한 방식으로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자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외면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도록. 이한은 화운의 온기가 되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이 너를 아프게 하느냐….”
자그마한 화운의 손에 연약한 사내처럼 뺨을 대고, 이한이 속삭였다. 단순히 몸이 아픈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 누가 생각해 보아도 지금 화운은 부족한 것이 하나 없을 사람이다. 황제와의 관계는 극적으로 좋아졌고, 내명부에서의 대우 또한 달라졌으며, 주인을 진심으로 따르는 정안궁의 사람들과 차근차근 변하고 있는 황궁에서의 입지 등 어느 쪽을 생각해 보아도 지금 연화운은 입궁한 이후 최고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연화운은 이따금 시린 얼굴을 했다. 불안하고 아픈 얼굴을 했다. 평소에는 그것들을 꽁꽁 숨겨 꺼내두지 않다가 이렇게 몸이 아파 마음이 약해질 때에는 낡은 수문으로 겨우 막고 있던 물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불안하고 서러운 마음을 내보였다. 이한은 그것들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서럽게 하고 있냐는 말이다. 응?”
“…….”
“운아….”
운아.
순간 이한이 그렇게 화운의 이름을 부른 건 그저 친밀함의 표현이었다. 우리가 지금은 이토록 가까운 곳에 있다고 전하고 싶은 이한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간지러운 애칭이 화운에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렁그렁 차올라 있던 눈물이 후두둑 옆으로 흘러내리며 화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운아. 운아.
황제의 그 목소리가 꿈속의 이명처럼 귓가를 연신 맴돌았다. 어째서 하필 운이었을까. 어떻게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황제는 저의 이름을 그렇게 불러 주었을까. 이것이 꿈이라면 차라리 깨지 않길 바라며 화운은 저도 모르게 황제의 얼굴을 감싼 손에 힘을 주어 천천히 끌어당겼다.
이한은 숨을 참았다. 거부할 수 없는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이한은 저를 끌어당기는 화운의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화운이 지금 열이 올라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눈물에 젖은 얼굴로 이토록 간절하게 자신을 갈구하는 사내를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코끝으로 숨이 흩어질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화운은 두 손을 들어 황제의 뺨을 감싸고 젖은 눈으로 시선을 맞춰왔다. 이한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그를 욕망하고 있었음을, 황제는 지금 이 순간에서야 그 사실을 마주했다.
“폐……!”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던 화운의 입이 다급하게 맞물리는 뜨거운 열기에 의해 막혔다. 커다란 손이 화운의 목덜미를 파고들어 감싸고는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고 반사적으로 벌어진 화운의 입술 사이로 곧장 타인의 살덩이가 침범해 들어왔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생경한 감각이 순식간에 화운의 온몸을 결박한 채로 밀려들어왔다. 그것은 이런 방식으로 누군가와 교감한 적이 없는 화운에게는 폭력적일 정도로 낯선 자극이었다.
이한은 놀라 저로부터 떨어지는 화운의 손목을 잡아 제 목에 두르게 만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고개를 뒤로 젖히게 만들어 더욱 깊이 그의 안으로 파고들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연한 살결을, 작고 부드러운 혀끝을 가득 머금고 나서야 이한은 자신이 이토록 절박하게 그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알고도 외면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해갈은 또 다른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한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화운의 입안을 맛보길 바랐고 곧장 그것만으로는 전부 다 만족할 수 없을 것을 알아챘다. 커다란 손이 화운의 목과 어깨를 쓸어내리자 얇은 침의는 쉽게 흐트러졌다.
“흐읍…. 으응…!”
처음부터 너무 격렬하게 밀려오는 행위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화운이 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리자 그제야 이한은 그를 놓아주었으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자신의 타액으로 젖은 화운의 입술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다. 얇은 옷 위로 도드라진 쇄골이 차례대로 타오르듯 검은 눈동자에 들어왔다.
이한은 아주 부드럽게 화운의 아랫입술을 한 번 달래듯 머금었다가, 턱 끝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가, 가늘고 흰 화운의 목에 그대로 입술을 파묻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였던 타인의 살에서 나는 단내가 이한의 입속에 퍼졌다.
“흐읏…!”
목에 닿은 황제의 숨과 혀끝이 전부 다 뜨거워 화운이 반사적으로 탄성을 터트렸다. 눈앞이 뜨겁게 밝아졌다가 차갑게 어두워지기를 끝도 없이 반복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분명 꿈일 것인데. 꿈이 아니고서야 폐하께서 미천한 자신을 이리 대하실 리가 없는데. 마치 현실처럼 너무 생생한 꿈의 감각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화운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두 손을 움직여 제게로 파고드는 황제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끼기도 했다. 혼망한 정신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제대로 다 파악조차 하지 못했으나 화운은 그저 황제의 이 뜨거움이 오래도록 제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폐하….”
연약하고도 애달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한은 절박하게 저를 끌어안고 있던 화운의 손을 잡아 그 손목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때, 화운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부디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이한의 몸짓이 일순간에 멈추었다. 커다란 몽둥이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을….”
놀란 이한이 고개를 들어 화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화운의 얼굴을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슬퍼 보이기도 했다. 이유도 모른 채로 이한의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져 내렸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게 아플 정도로, 화운은 그만큼 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를 버리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화운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안 그래도 약해진 몸이 과한 자극까지 받았으니 견디지 못한 것이다.
이한은 순식간에 홀로 남았다. 자신이 연화운을 이런 식으로 바라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충격을 느낄 새도 없이. 아픈 이를 상대로 저열하게 욕망을 채우고 있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힐 새도 없이 생각지도 못한 화운의 태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연화운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이러한 불안을 가지게 된 것인가.
감은 눈가에 맺힌 눈물이 이한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한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멍하니 거기에 앉아 있었다.
“폐하…!”
이한은 오 태감의 당황한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붓 끝을 그대로 대고 있어서 먹물이 번진 종이가 보였다. 이한은 교지를 작성하던 중이었다.
“종이를 다시 올리겠습니다.”
오 태감은 서둘러 종이를 거두었다. 이한은 거기에 앉아 오 태감이 거둬 가는 더러워진 종이를 바라본다. 그것이 꼭 제 마음 같았다.
깨끗한 종이가 다시 깔리는 것을 보고서도 이한은 쉽게 붓을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무슨 말을 쓰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무슨 보고를 보았더라. 조금 전 대전에 들렀다 간 호부상서가 무슨 말을 했었지. 이한은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눈만 깜빡거리며 기억을 되짚었다. 도무지 선명한 기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정무 대신 이한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연빈, 연화운이었다.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손짓 한 번이면 먼지처럼 바스라질 것처럼 연약하던 목소리를 떠올리자 지끈, 하고 심장 근처의 통증이 느껴졌다. 이한의 커다란 손이 저의 가슴 부근을 움켜쥔다. 그래도 통증은 나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