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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 그래? 귀신이라도 봤어?”
언제 서천이 돌아올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자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넋이 나간 채로 돌아온 서천의 얼굴을 보고 놀라 물었다. 서천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너 지금 얼굴이 완전 엉망인데!”
“아니야. 괜찮아. 아무것도 없었어.”
자문은 저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서는 서천을 보며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묻고 싶었으나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무는 서천은 도무지 무언가를 더 말해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큰일이 있던 건 아니겠지, 싶은 생각으로 자문은 다시금 슬슬 몰려오는 잠을 몰아내려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보았다.
서천은 마찬가지로 앞을 본 채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심장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방금 제가 무엇을 보고 온 건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연일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연빈이 하운과 똑같은 자세로 검을 갈무리한 것을 우연 말고 다른 무슨 말로 설명할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어쩌면 그건 연빈이 가진 고유의 자세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냥 어쩌다 얻어걸린, 그냥 아무렇게나 검을 회수했는데 그게 우연찮게 하운의 자세와 비슷한 모양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튼 간에 방금 서천이 본 것은 딱히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만한 그런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서천은 자꾸만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서늘한 감각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촉이, 기민한 모든 감각들이 그런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운의 죽음에 너무 집착하여 미치기라도 한 걸까. 똑바로 눈을 뜨고 있는데도 눈앞에 많은 것들이 환상처럼 일렁였다. 조금 전 자신이 마주쳤던, 달빛 아래 선 연빈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는 어째서 그렇게 놀랐을까. 당황했을까. 자신이야 갑자기 하운의 모습이 겹쳐 그렇다고 하지만 연빈은 도대체 왜 자신을 보고 그렇게까지 동요했을까. 게다가 소정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신을 감싸려 했던 것도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단지 이제는 다정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자신이 벌을 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우연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의심에 쐐기를 박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서천은 자신이 무엇을 가정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냥 우연이야…. 우연이 아니라면 도대체….”
홀로 머나먼 어둠을 바라보며 서천이 중얼거렸다.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터무니없는 가정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고, 모든 것은 그저 우연이어야만 했다.
‘너는 폐하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이다.’
연화운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을 깊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등과 허리, 엉덩이 할 것 없이 무자비한 매질로 피투성이 된 어린 궁녀의 저주 섞인 말 따위에 눈 하나 깜짝할 연화운이 아니었다. 그는 아마도 견디지 못하고 곧 죽을 것이고, 죽지 않는다고 해도 신형사로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다. 감히 반반한 얼굴로 황제의 눈길을 사려 한 벌이었다.
비록 황제는 그 아이를 쳐다본 적이 없다고 하였지만 연화운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면 어째서 제 앞에서 굳이 저 천한 것의 편을 들었겠느냔 말이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어쨌든 연화운은 그 일로 인해 이미 기분이 상하였고, 주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종은 죽어 마땅했다.
다 죽어가는 연약한 몸을 보고서도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는 연화운을 향해 어린 궁녀가 다시 말했다.
‘너는 이대로 폐하께 점점 잊혀 미움조차 받지 못하는 사내로 남을 것이야….’
‘곧 죽을 것이 입만 살았구나.’
‘네 아비도 언젠가는 그 관직에서 내려올 테고 그러면 폐하께서 네 악독한 이름을 과연 기억이나 해주실 것 같으냐.’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었다. 연화운은 마음만 먹으면 당장 이 자리에서 이 어린 궁녀와 그의 가족들을 모조리 요절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궁녀는 더 이상 겁나는 게 없다는 듯 땀과 눈물, 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말을 씹어 뱉었다.
‘너는 네가 그토록 연모한다 여기는 폐하께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할 것이고, 평생 외면당할 것이며, 종국에는 너라는 후궁이 있었음을 폐하께서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그렇게 이름 없는 후궁이 되어 죽어갈 것이니…!’
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화운의 손바닥에 어린 궁녀의 피가 묻었다. 연화운은 상관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궁녀의 뺨을 쳤다. 바닥에 피가 튀었다. 정안궁의 궁인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였고 어린 궁녀를 붙들고 있던 내관들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겨우겨우 삼켰다.
‘역시 네년이 폐하의 환심을 사려 꼬리를 흔들어댄 것이 뻔하지. 어디 신형사에서도 그리 당당하게 굴 수 있는지 보자.’
연화운이 눈짓을 하자 혹시나 이곳에서 더 모진 꼴을 당할까 내관들이 황급히 거의 정신을 잃은 궁녀의 몸을 끌고 나갔다. 연화운은 피로 엉망이 된 바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너는 폐하께 잊혀져 기억조차 남지 않게 되리라던 궁녀의 악에 받친 말이 연화운의 마음속에 남았을지, 그렇지 않았을지는 오로지 연화운 그 스스로만 아는 일이었다.
“폐… 폐하…….”
“마마! 정신이 드세요?”
화운은 제 얼굴을 닦아내는 누군가의 손길에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워 눈꺼풀 하나 들어 올리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결국 부드러운 천이 눈가를 한 번 더 닦아주고 나서야 화운은 눈을 뜰 수 있었다. 흐릿한 시야로 울상이 된 아진의 얼굴이 보였다.
“마마, 저 아진이에요.”
“아진…. 내가 왜….”
“밤새 악몽을 꾸며 앓으셨어요. 식은땀도 이렇게 많이 흘리시고….”
아진의 대답에 화운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몸에 열기가 도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또 춥기도 했다. 정말 악몽을 꾸었는지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으나 어쨌든 몸이 좋지 않은 건 맞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어제 서천을 마주쳐 놀랐던 것이 문제인 모양이다. 화운은 설마 초라한 모양으로 검 몇 번 휘둘렀다고 몸살이 났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진이 말을 이었다.
“황후궁에는 이미 말을 전했고 황후마마께서 문후는 올 필요가 없다고 하셨으니 걱정 말고 조금 더 누워 계세요. 죽을 올리라고 할게요.”
아무리 황후마마께서 관대하게 편의를 많이 봐주고 계시다고는 하지만 자꾸 이런저런 핑계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너무 힘들고 지쳐 화운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연화운의 몸에서 처음 눈을 떴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였던 죄책감이 점점 더 버겁게 숨통을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지금 화운은 자신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 말고는 자신이 짓고 있는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화운은 행복한 미소를 한 번 지을 때마다 돌아서서 그 자신을 더욱 혹독하게 질책했다. 화운의 보이지 않는 마음 한구석은 내도록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불을 조금 더 당겨 덮으며 몸을 웅크렸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던 서천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는 어째서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걸까. 불안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들이 요동쳤다. 화운은 서둘러 서천의 얼굴을 지워버린다. 지금 그런 것들을 생각하기엔 화운은 너무 지쳐 있었다.
이번에는 너의 손이 커도, 거칠었어도, 네가 어떤 모습이었어도 너를 보기 싫다 하지 않았으리라 말하던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라리 폐하께서 처음처럼 나를 외면하고 불쾌히 여기셨다면 덜 힘들었을까.
부질없는 생각들을 하며 화운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의식 속으로 잠겨들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이토록 버거운 죄책감을 가지고도 폐하께서 제게 보여주시는 그 따스한 얼굴을 놓치기 싫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그게 정말이냐?”
“예, 폐하. 황후궁에서 사람이 다녀갔사옵니다.”
아침 조회를 마치고 나온 황제는 연빈이 몸이 좋지 않아 오늘 황후궁의 아침 문후를 다녀가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 연빈이 황후에게 얼마나 예를 다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정말로 크게 몸이 안 좋은 게 분명했다.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가 있어야지.”
황제의 목소리는 짐짓 화가 난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황제가 빠르게 걸음을 내딛자 오 태감이 다급하게 손짓을 해 저만치 대기하고 있던 가마를 불렀다. 황제는 거의 달리다시피 가마에 올랐고 그가 무어라 명을 내리기도 전에 오 태감이 소리쳤다.
“정안궁으로 가자!”
가마의 손잡이를 꽉 쥐어 희게 질린 황제의 손끝이 보였다. 굳이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연빈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한 황후의 속내를 가만히 생각해 보며 오 태감은 빠르게 가마를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