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연빈, 혹시 피곤하십니까?”
그사이 동그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던 정빈이 슬쩍 물러서 있는 화운에게 말을 걸었다. 화운은 저보다 한 뼘은 더 자그마한 정빈, 송현을 다정하게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가벼운 산책이었기 때문에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연빈은 몸이 약하니 매사 조심해야 하네.”
말을 더한 것은 숙비, 비영이다. 혹시나 아픈 기색은 없는지 연빈을 살피는 듯한 비영의 시선에 괜히 발이 저린 이한이 불쑥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연빈의 몸에 무리가 갈 만큼 고생을 시키지는 않았는데.”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목소리에서 어렴풋이 불편한 기색을 느낀 비영이 말을 잇자 이한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숙비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님을 당연히 이한 역시 알고 있었는데 왜 순간 말이 그렇게 나갔는지 영문을 모를 일이다. 이한은 난생처음 숙비의 앞에서 주눅이 드는 기분으로 ‘알고 있다.’ 하고 소심하게 대답했다.
그런 황제와 숙비 사이의 대화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어 보이는 송현은 다시 화운을 향해 물었다.
“숙비마마와 제가 수화원 정자에서 간식을 먹으며 담소나 나눌까 하여 가는 길이었는데… 괜찮으면 연빈도 함께 가지 않을래요?”
“아….”
화운은 송현의 질문을 듣자마자 당황한 얼굴을 하였다. 폐하께서 바로 곁에 계시는데 송현이 저에게만 이리 묻는 것이 괜찮은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운이 곧장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돌려 황제를 쳐다보자 송현 역시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입을 합, 다물었다가 서둘러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제가 방자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허나 한쪽 무릎을 굽히며 입으로는 용서를 구하고 있는 송현의 얼굴은 그다지 두려워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비록 눈앞에 있는 분이 지엄하신 황제 폐하이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폐하는 위엄을 내세워 후궁들을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송현은 후궁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또한 입궁한 뒤 제법 오랫동안 가족들과 떨어진 황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했기 때문에, 황제는 그것이 미안해 송현에게 늘 무르게 굴곤 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이 황궁엔 황제를 온전히 두려워하는 후궁이 없었다.
이한은 조금 전 숙비에게 그랬던 것처럼 묘하게 불편한 마음을 꾹꾹 내리누른 채 송현을 향해 괜찮다고 말했다. 주눅 하나 들지 않은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 송현을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던 숙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니다. 나는 아직 일이 남아 안 그래도 청건전으로 돌아가려 하던 참이니.”
거기까지 말을 한 이한은 슬쩍 고개를 돌려 화운을 보았다. 안 그래도 화운과 헤어져 홀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워 발걸음이 무거웠건만 조금 전 송현이 화운을 향해 물은 말 때문에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껄끄러웠다. 이한이 말했다.
“연빈은 남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정말 아닌데, 이한은 굳이 ‘즐거운 시간’에 꾹꾹 힘을 주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되어가지고 심술이 났다거나, 괜한 서운함이 밀려왔다거나, 이대로 나와 함께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거나 하는 건 정말로 아니었지만 연화운이 자신의 목소리를 ‘잘못’ 알아듣고 그냥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가 화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감히 황제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어 시선을 내리고 있는 바람에 그 눈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 화운은 흔들림 하나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오면 저는 폐하의 시간을 그만 빼앗고 예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 가겠습니다.”
“뭐?”
하지만 그것이 꼭 황제를 위한 일이기라도 되는 것처럼 대답하는 화운의 말은 어찌나 황당한지. 화운의 딴에는 바쁘실 폐하의 시간을 더 빼앗으면 아니 될 것 같아 답한 것이지만 이한은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고, 설령 알았다고 해도 어이가 없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황제의 표정을 살핀 비영이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송현은 기가 막혀 높아진 황제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맑게 웃으며 연빈의 팔을 붙들며 무려 신이 나서 말했다.
“잘됐어요! 간식도 챙겨 왔으니 재밌을 거예요!”
하여간에 모든 것이 다 엉망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황제 혼자만의 사정이었다.
“정말 괘씸하지 않냔 말이다!”
아까부터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서러운 목소리에 오 태감은 티가 나지 않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건전으로 돌아가는 길, 황제는 내내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남아도 좋다고 말을 했어도! 나와 산책을 하러 온 수화원인데 그럼 돌아가는 길도 나와 함께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허면 연빈마마께 어찌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 태감의 말인 즉, 왜 이제 와 엄한 곳에서 심통을 부리고 있느냐 이 말이었다. 이한은 가마에서 뛰어내릴 것처럼 오 태감 쪽으로 몸을 휙, 굽히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명색이 황제인데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가자고 어찌 말을 해? 후궁이 되어서 그 정도는 알아서 눈치채야 하는 것 아니냐?”
물론 오 태감이 생각할 때도 연빈 역시 어지간히 눈치가 없기는 했다. 그때 오 태감은 정안궁의 궁녀들과 함께 조금 떨어져 있기는 하였으나 오고 가는 말을 얼핏 들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폐하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 말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누가 들어도 다른 속뜻을 눌러 담고 뱉은 음성인 게 티가 났질 않았던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연빈도 잘한 건 없었다.
차라리 폐하의 관심이나 질투심을 끌어내려 일부러 눈치 없이 굴었다고 한다면 이해가 가겠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연빈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더 속이 답답해졌다. 한 명은 매사 서툴고, 한 명은 갑갑하게 눈치가 없으니 이런 궁합은 또 없을 것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서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참 성을 내던 이한이 이제는 또 기운 하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커다란 가마에서 몸을 쪼그렸다. 황제의 총애를 두고 다퉈 서로의 목숨을 빼앗은 후궁들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어보았으나 살다 살다 눈앞의 황제를 나 몰라라 하고 저들끼리 신나 죽이 맞는 후궁들의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것이 나쁜 일이냐 하면 물론 그건 아니었지만 저하고는 겨우 이십 분 남짓한 시간을 보낸 화운이 그들과 풍경 좋은 정자에서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웃을 걸 생각하니 자꾸만 속이 쓰리고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서러워졌다. 옆에서 걷고 있는 오 태감의 한숨이 흘러나오는 것도 모르고, 이한은 청건전으로 돌아가는 내내 야속하게 어여뻤던 얼굴 하나만을 떠올릴 뿐이었다.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셨는지요.”
황후의 머리 장신구를 내려주며 선이 물었다. 조금 전 아버지로부터 온 서신을 읽고 난 뒤로 내도록 기분이 좋아 보이던 자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은 일이랄 게 뭐 있겠느냐. 그저 안부를 물으신 것뿐이지.”
“아….”
“아버지는 내가 아직도 품에 안아 기르던 어린아이 같으신 모양이구나.”
면경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며 자란은 오늘 자신이 읽었던 서신의 내용을 떠올렸다. 딸이 황후가 되고도 벌써 꽤 시간이 흘렀건만 자란의 부모는 여전히 그가 깊고 깊은 황궁 안에서, 악독한 후궁들 사이에서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연빈을 향한 황제의 태도가 달라지다 못해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정안궁을 드나드신다는 소문이 황궁 안팎으로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자 자란의 부모는 당장이라도 연빈이 제 딸을 어찌 핍박하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해하며 다급하게 편지를 적어 황궁으로 보냈다. 혹시나 악독하고 방자하기로 유명하였던 연빈이 뒤로는 연꽃 같은 제 딸을 몰래 괴롭히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게다가 자란은 황후이지만 아직 자식이 없었다. 그나마 연빈이 사내라 회임할 수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긴 하였으나, 황후의 몸으로 아직 후사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아마도 그들의 불안을 더더욱 증폭시키는 일일 테다.
황후의 머리를 전부 편하게 풀어낸 선이 말했다.
“부모님은 원래 자식이 칠십이 되어도 어린아이처럼 보는 법 아닙니까.”
“하하. 그건 그렇지.”
“조심하여 나쁠 것도 없는 일이고요.”
이어진 선의 말에 자란이 면경을 통해 저의 뒤에 서 있는 선을 바라보았다. 선은 시선을 내린 채로 다 풀어진 황후의 머리카락에 빗질을 시작했다.
“…그래. 결국엔 모두가 쉽게 변할 수 있는 인간이니까.”
손을 들어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자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서 권력을 잡는 일이란 아주 높은 낭떠러지 위에서 외줄을 타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게 불어온 바람 한 번에도 균형을 잃어 천길 아래로 추락할 수가 있으니 부모의 걱정도, 선의 불신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디 황후에게만 그런가. 그에 대해 깊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으나 자란은 황제 역시 연화운을 후궁으로 들일 적에 연주원이 딸 대신 아들을 보낸 것을 내심 잘되었다고 생각했을 거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