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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13)화 (11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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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두 손이 조심스럽게 서신을 열어 보았다.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가 드러나자 대단한 예술 작품을 마주한 듯 감정이 들끓었다. 고운 얼굴과는 다르게 글자는 다소 투박한 모양새였다. 명문가 특유의 꾸밈이 하나 없이, 어찌 보면 볼품없다 여길 정도로 정제되어 있지 않은. 그러나 한 획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조심스러웠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런 필체였다. 그것이 오히려 지금 이한이 보는 연화운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한의 검은 눈동자에 이윽고 연화운의 말이 어렸다.

『폐하께서 이리 밤낮으로 나라를 돌보시기에 여념이 없으시니 이는 백성 된 자로 더없는 복이오나 잠을 잊고 오래 앉아 계시다 혹여나 옥체를 상하실까 저어되옵니다. 부족한 솜씨이지만 부디 이것이 폐하께 짧은 휴식을 드릴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계절이 깊어져 수화원에 녹음이 우거지었습니다. 둘러보시며 심신을 달래보시는 것은 어떨는지요. 부족한 마음으로 폐하를 염려하였으나 혹시나 주제넘었다면 죄를 청하겠습니다.』

“참나. 죄는 뭔 죄를…. 뭐 대단한 말을 하였다고.”

짧은 순간 화운이 적은 글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이한이 이내 입술을 꼼실거리며 중얼거렸다. 타박하는 말을 내뱉고는 있으나 광대는 자꾸만 씰룩거리고 입꼬리는 연신 하늘을 향하고 있으니 그가 황제인 덕분에 남들이 감히 그의 얼굴을 직접 올려다보고 있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 이한의 얼굴을 보았다면 안국을 아우르는 황제의 위엄이 이날 크게 무너졌을 것이다.

고개를 숙인 채 그때까지 긴장하고 있던 아진은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다정하거나 따스한 말은 아니었으나, 흘러나온 말과 달리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야멸찬 느낌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일어나실까. 이대로 일어나셔서 정안궁으로 향하실까. 기대와 긴장으로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앉아있는 아진을 향해 이윽고 황제가 말했다.

“기다렸다가, 내가 주는 편지를 받아 가거라.”

“……?! 예! 예,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특별한 반응을 기대하면서도 생각지 못했던 황제의 반응에 아진이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 경박한 모습에 오 태감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이미 잔뜩 신이 나서 붓을 집어 든 황제는 아진의 모습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문득 오 태감은 뜻 모를 외로움을 느꼈으나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한은 오래지 않아 붓을 거두었다. 척척 손수 종이를 접는 손길에서는 흡사 열다섯 소년의 들뜸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눈치 좋게 오 태감이 다가가 종이를 받아 들고 아진에게 전달하려니 이한이 말했다.

“빨리 가서 전해라.”

“예, 폐하.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그럼 소인 이만 물러가옵니다!”

행여나 바람에 종이가 상하기라도 할까 서신을 품에 조심스럽게 안은 아진이 인사를 올리곤 종종걸음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화운의 편지를 몇 번이나 또다시 읽어 보다가, 그것을 소중히 접어 품에 넣은 이한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수화원으로 가자. 오랜만에 산책을 해야겠으니.”


황제가 전한 편지는 간결했다.

『매일이 바빠 산책을 한 지가 오래되어 도통 어찌하는지 기억이 나질 않으니, 내게 그것을 권한 연빈은 당장에 수화원으로 와 시범을 보이도록 하라.』

위엄을 흉내 내는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그 서신은 오로지 한 사람만이 보고 남몰래 웃었다.


이한은 작은 연못 앞에 서 있었다. 햇살이 제법 뜨거운 날이었으나 아직 습한 기운이 없어 견딜 만은 한 더위였다. 물론 지금의 이한은 폭염 속에 서 있다고 하여도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거기에 서서 이한은 지난 어느 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에 빠진 화운이 깨어난 후 바로 이곳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날을 말이다. 그때 이한은 제 앞에 꿇어앉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의 여린 어깨를 가증스러워했다. 황제와 마주치길 바라고 온 것이 분명한데 아닌 척, 우연인 척하는 꼴을 보자니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그러다가 평소와는 다르게 단정한 태도로 황제의 모욕을 묵묵히 받아내던 모습에 당황도 했었다. 말을 하면서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물러가라는 한 마디 명에 두말하지 않고 정말로 돌아가 버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황당하여 말을 잊지 못하였던 감정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리 놀라면서도 그때의 이한은 변했다는 연화운의 모습이 진심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돌이켜 보니 화운과 자신 사이에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이 문득 실감이 되었다. 그날, 바로 이 자리에서 연화운을 비웃던 성이한은 아주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 마음이 들끓었다. 그리움이었다. 마치 천 번의 밤을 보지 못하였던 것처럼 당장에 연화운을 보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을 것처럼 초조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그러니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정녕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일이 아니냔 말이다.

“폐하.”

바로 그때, 등 뒤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가 이미 오 태감을 비롯해 뒤를 따른 모든 이들을 물리며 연화운이 오거든 그 또한 주위를 물리고 홀로 오게 하라 해놓은 탓에 뒤의 기척은 오로지 연화운, 그 한 사람의 것이었다.

당장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차마 돌아볼 수가 없는 마음이 기묘한 방식으로 공존했다. 그의 얼굴을 빨리 두 눈에 담고 싶기도 했고, 그의 얼굴을 보기 직전 이 벅차오르는 기대감을 조금 더 오래 만끽하고 싶기도 했다. 이전에는, 다른 이에게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가 뒤를 돌아보지 않자 등 뒤에서 무릎을 꿇었는지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마주쳤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없는 연화운의 단정한 움직임을 떠올리며 황제가 그제야 천천히 몸을 돌려 저의 앞에 있는 화운을 내려다보았다.

반사적으로 손이 내밀어졌다. 어떻게 그때는 그를 앞에 꿇려둔 채로 인사조차 받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랬다. 최근 이한은 연화운의 이름 앞에서 마치 세상의 모든 모순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화운은 지난번보다는 조금 더 익숙하게 황제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 또한 처음과는 너무나도 달라졌고, 내색하지 않아도 황제에게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솟구치는 기쁨을 참기가 힘들어, 제 손안에 있는 화운의 손을 힘주어 잡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하도 대전에 틀어박혀 일만 하였더니 산책을 어찌 하였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더라.”

“…그러셨습니까, 폐하.”

이번에는 대답을 하는 화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화운은 그때 저 홀로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던 이한의 서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진의 꼬임에 넘어가 겁도 없이 편지를 보내놓고도 얼마나 겁이 나 마음을 웅크렸는지 모른다. 그러지 말걸. 보잘것없는 밑천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런 편지 같은 건 쓰지 말걸 하고 후회도 했다. 그렇게 아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화운이 폐하께서 무려 손수 쓰신 편지를 받아 보았을 때는 어떤 감정이었겠느냔 말이다. 더욱이, 그 안에 적힌 내용이 그토록 사랑스러웠을 때에는.

“그래서… 이 수화원을 어찌 거닐면 되는지 시범을 보여주겠느냐?”

이제는 그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화운을 일으키며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이한이 물었다. 그대로 이한에게 한 걸음 다가선 화운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허면…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자연스럽게 되물어오는 화운의 목소리는 지난날 여기에서 마주쳤던 그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하고 가벼웠다. 그러면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가까워진 채로 시간을 더 보내게 되면. 그러면 그때는 지금과 비교해 또 얼마나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친밀해져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니 참으려 애를 써도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와서. 설렘을 감추지 못한 얼굴을 한 채로 이한은 화운이 이끄는 걸음을 따라 걸었다. 언제 깊은 밤이 있었냐는 듯, 한낮의 태양이 더없이 찬란한 날이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일어나거라.”

이한은 수화원 입구에서 마주쳐 인사를 올리는 숙비와 정빈의 예를 면하게 하고는 그 후 자연스럽게 서로 인사를 나누는 그들과 화운을 바라보았다. 화운과 수화원 연못 근처를 가볍게 돌고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연빈과 산책을 하셨나 봅니다, 폐하.”

“그래. 막 돌아가는 길이었다.”

대답을 하면서도 이한은 자꾸만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는데, 왜냐하면 여태 자신의 손을 꼭 마주 잡고 오던 화운이 숙비와 정빈을 보자마자 냉큼 제 손을 거둬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폐하의 위엄을 위해서도, 다른 후궁들을 대하는 예의에 있어서도 이치에 맞는 행동이긴 하였다. 그렇지만 이한은 갑자기 허전해진 손이며 이제는 아예 서로 따로따로 오기라도 한 것처럼 제게서 멀찍이 물러나 있는 화운의 행동 같은 것이 영 서운했다. 그랬다. 유치하지만 이건 정말 서운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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