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12)화 (11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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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쉬고 싶다며 아진까지 물러가게 한 화운이 크게 심호흡을 하곤 천천히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운의 손에는 지금껏 얌전히 걸어두고만 있던 목검이 들려 있었다. 그간 상처도 많이 아물고 요양을 잘한 탓에 막 다쳤을 때보다 체력도 다소 나아진 화운이 드디어 검을 제대로 손에 쥐어 본 것이다.

눈을 감고 천천히 머릿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검술의 가장 기초적인 초식을 떠올려 보았다. 검을 쥐지 못한 시간이 꽤 길긴 했으나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을 검과 함께 살아왔던 화운이다. 기본적인 동작들을 떠올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은 화운이 이내 눈을 뜨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검을 쥔 팔을 뻗었다.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복기했고, 비가 오고 눈이 와도 멈추지 않고 내질렀던 검이었다. 같은 자리에 상처가 나고 나아지기를 끝없이 반복해 남아버린,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흉터나 다름없는 기억이었다. 호흡과, 전신과, 검이 하나가 되어 허공을 가르는 기분은 화운, 아니 지난날 하운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희열이었다.

“하아….”

하지만 검을 쥔 손으로 전해지는 쾌감도 잠시. 화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팔을 늘어트린 채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몇 번 휘두르지도 못했는데 벌써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에 열이 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 자루를 쥐고 있던 손아귀가 뻐근하게 아파와 화운은 검을 옮겨 쥐고 자신의 오른손바닥을 펼쳐보았다. 굳은살 하나 없는 희고 고운 손바닥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고작해야 몇 번이었다고, 몇 분이었다고 유난스럽게 붉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화운은 옅은 한숨을 쉰다. 신기했다. 얼마나 곱고 귀하게 자랐으면 이조차도 버거워하는 몸이 되었을까. 물론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고는 하지만 연화운의 삶은 하운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이토록 귀하게 자랐으면서, 그는 어째서 힘없는 이들을 그렇게 악독하게 괴롭혔던 걸까.

하지만 화운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강제로 흐트러트렸다. 주제넘는 생각이었다. 귀하게 자란 몸을 차지하고 있는 자신이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게다가 연화운의 지난날을 떠올리면 필연적으로 그의 부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금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애써 모른 척하며 화운은 떨리는 팔에 다시 힘을 주어 검을 들었다. 이렇게 생각이 복잡해지려 할 때는 검을 휘두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어쩌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다지도 연약한 몸이니 조금만 연습해도 쉽게 지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이전의 무위는 당연히 되찾지 못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검을 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허공으로 한 번 검을 내리긋자 오매불망 저를 따르는 아진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스꽝스러울 게 뻔한 서툰 몸짓으로 두 번 검을 찌르면 고요한 밤이면 함께 달을 올려다보며 미래를 이야기하곤 했던 서천의 얼굴 또한 연기처럼 흩어졌다. 무거운 팔을 억지로 들어 세 번 바람을 가르니 피로가 가득 차 안쓰럽기만 하였던 황제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으나 네 번, 다섯 번, 아무리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도 황제의 얼굴만큼은 눈앞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이한은 그렇게 화운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상념이 되어 있었다.

그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서. 화운은 완전히 지칠 때까지 어설픈 몸짓으로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으나 그날 밤, 녹초가 된 몸으로 침대에 홀로 누울 때까지도 황제의 얼굴은 도무지 사라지질 않았다.


“폐하. 정안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정안궁에서?”

평소 한번 일에 몰두하면 좀처럼 쉽게 집중을 흐트러트리는 일이 없는 황제가 정안궁이라는 말 한 마디에 보고 있던 서간을 단번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은 오 태감이 ‘예, 폐하.’ 하고 대답하자 이한은 말을 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어서 불러오라며 손짓을 했다. 입술을 힘주어 다문 오 태감이 문 건너로 신호를 보내자 제 몸통만 한 찬합을 든 아진이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연빈이 간식을 보내었느냐?”

“예, 폐하.”

체통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들뜬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침을 꾹 삼켜본 오 태감이 아무렇지 않은 척 아진에게 다가가 그가 들고 온 찬합을 받았다. 그러자 찬합을 건네준 아진이 황제를 향해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며 말을 이었다.

“하옵고 폐하….”

“……?”

“저희 마마께서… 혹시나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전하라 하시며 서신을 적어 주셨습니다.”

“서신을?”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이한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기울어졌다. 서신, 이라는 단어가 생경한 감각으로 혀끝을 맴돈다. 분명 특별한 단어는 아닌데. 살면서 수도 없이 듣고 말했던 단어인데 이상하게 연화운과 연관이 되자 이한은 마치 그 단어를 처음 들어본 것처럼 낯선 감각을 느꼈다. 겹겹이 옷을 둘러 입은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그사이 아진이 품에 고이 가지고 온 서신 한 장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것은 아진이 화운의 등을 떠밀어 준비한 회심의 한 수였다.

매사 온순하고 좀처럼 폐하께 무언가 티를 내 바랄 생각이 없는 제 주인과 달리 아진은 나름의 야망이 있었다. 화운은 폐하께서 근래에 정무가 더없이 과하신 것 같으니 당분간은 정안궁을 찾기 힘드실 거라 순순히 납득을 하였으나 아진은 그대로 조용히 기다리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사람은 반드시 밥을 먹어야 했고, 잠을 자야 했다. 그렇다면 아진은 폐하께서 정안궁에서 식사를 하시길 원했고, 짧은 밤이라도 정안궁의 침전에 드시기를 바랐다. 자신이 이토록 적극적인 사람인 것을 화운이 변하고 나서야 아진도 처음 알았다.

그래서 아진은 폐하께 보낼 간식을 준비하는 화운에게 말했다. 그냥 간식만 보내는 것이 폐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정이 없어 보이겠느냐고. 그러니 마음을 담아 정갈한 서신 한 장 함께 보내드리면 정무에 지친 폐하께서 분명 큰 힘을 얻으실 거라고. 그렇게.

물론 화운이 단번에 납득한 건 아니었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서신이 폐하의 마음에 누가 되면 되었지 득이 될 건 하나도 없을 거라 펄쩍 뛰었다. 화운의 입장에서야 고작해야 스승님께 글자를 배운 게 전부인지라 초라하고 무식한 티가 날까 봐 더 겁이 난 것이지만 아진에게는 그저 제 주인이 평소처럼 자신을 낮추는 일에 불과했다.

질기게 설득하고 또 설득하기를 반복한 아진에게 결국 화운이 졌다. 아진이 워낙에 강경하게 고집을 부렸던 탓도 있었지만, 내심으론 폐하께서 서신을 보고 아주 잠시라도 자신을 더 생각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아진은 화운이 속으로 몇 번이나 멍청하고 한심한 선택이라 남몰래 자조하며 써 내려간 서신을 의기양양하게 품에 안고 청건전으로 왔다.

감히 폐하께 전할 서신을 자신이 먼저 볼 순 없어 마마께서 무어라 적으셨는지 볼 순 없었으나 내용이 무엇이든 아진은 폐하께서 그 서신을 보면 정안궁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어지실 거란 확신이 있었다.

“어찌할까요, 폐하.”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눈만 끔뻑끔뻑 하고 있는 이한을 향해 오 태감이 물었다. 아진도 이미 말했듯이 그것이 무엇이든 황제에게 전해지는 건 당연히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만약 황제가 받지 않겠다고 하면 그것이 백일 동안 피로 쓴 서신이든, 목숨을 걸고 구해온 진귀한 보석이든 되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어서 가져오질 않고 뭐 해.”

하지만 이한은 마치 오 태감이 쓸데없는 걸 묻고 있다는 듯한 태도로 조급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도무지 황제의 체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많은 밤들을 고단하게 지새우도록 만들었던 모든 번뇌들도 연화운의 앞에서는 이리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리니 오 태감은 참으로 할 말이 없었다.

오 태감이 아진에게서 서신을 받아 가져오는 몇 걸음만큼의 시간이 영겁의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선 이미 한참 전에 걸어가 아진에게서 직접 서신을 건네받고 싶었던 이한이다. 서신이라니. 연화운이 자신에게 무어라 글을 남겼다니.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한은 그가 마치 자신에게 연서를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 태감에게서 낚아채듯 서신을 받아 든 이한은 방금까지 조바심을 냈던 것과는 다르게 잠시 그것을 그냥 들고만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데 서신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별말을 썼겠나 싶으면서도 그게 무슨 말이든 연화운이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며 붓을 들고 하나하나 글자를 써 내려갔을 걸 생각하면 커다란 돌덩이가 명치께로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단아하게 내리깐 눈, 집중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을 숨, 어떠한 말을 어떻게 적어 내릴까 고민하였을 연화운의 찰나들이 본 것도 아닌데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서신 하나에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이 모든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을 그럴듯하게 해명하고픈 의지조차 들지 않았다. 이한은 어느 순간부터 연화운에게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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