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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절기가 흐르고 나니 한여름의 무더위가 찾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후궁들이 머무는 처소에 벌써 얼음이 들어가고 있었다. 황궁은 매년 여름을 보냈던 이궁인 명하원으로 피서를 가기 위한 준비가 한참이었다.
“황후가 준비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겠소.”
황후궁에서 오찬을 들던 황제, 이한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황후, 자란에게 물었다. 자란 역시 황제를 향해 마주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달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즘… 황후가 태후궁에도 자주 들른다고 하던데….”
“그 또한 황후로서의 본분이 아닙니까.”
이어진 이야기에 이한의 표정이 다소 어둡게 변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였던 자란의 앞에서, 이한은 그들이 지나왔던 수많은 날들을 떠올렸다. 이윽고 오래된 기억을 꺼내듯 눅눅한 목소리로 이한이 말했다.
“내 어머니께서는 그대에게도 참으로 무심하였지.”
태후에게 황후는 자신의 지난날을 투영하게 되는 여인이자, 동시에 품 안에서 자신을 지켜줘야 하는 아들을 빼앗아갈 수도 있는 존재였다. 태후는 이한이 혹시나 어느 여인의 꼬임에 넘어가 황후를 홀대할까 후궁 들이는 걸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한이 황후에게 너무 물러지진 않을까를 걱정했다. 원하는 것을 한 번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는 태후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불안이었던 여인이었다. 이한이 말을 이었다.
“나 또한 어릴 때에는 그대를 절대로 내 어머니처럼은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소.”
그 말을 들은 자란이 가볍게 웃었다. 황제 역시 스스로가 우습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지. 그대를 어찌 보고.”
어리고, 서로를 잘 알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이한은 아버지 앞에 언제나 약하기만 했던 어머니를 보고 자랐고, 자란은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지 못하여 자신을 숨겼으니 말이다. 자란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생각이었다. 자조하는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황후가 이내 입을 열었다.
“허나 폐하께서는 곧 알게 되셨지요. 저는, 태후마마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요.”
“…….”
“또한.”
일순 조금 날카로워진 자란의 목소리에 이한이 잠시 찻잔을 향해 내리깔았던 시선을 올려 황후를 똑바로 바라봤다. 자란은 여전히 입매를 끌어올려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조금 전 보았던 가벼운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한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어질 황후의 말이 무엇인지 왠지 알 것만 같았다. 황후가 말했다.
“또한 폐하께서도 선황과는 다른 분이시질 않습니까.”
웃는 낯이었으나 결코 곱지만은 않은 자란의 시선이 황제의 눈동자를 올곧게 향하고 있었다. 옳은 말이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말이었다. 이한은 곧바로 자란이 한 말의 이면에 담겨 있는 뜻을 알아챘다.
자란은 이한의 어머니와는 달랐다. 그는 황제의 애정을 갈구하며 하루하루 비참한 삶을 연명하는 그러한 여인은 아니었다. 자란은 애초에 황제의 총애 같은 것을 독차지하려 하지도 않았고, 설령 그 총애가 다른 이를 향한다고 한들 감히 후궁 따위가 황후의 자리를 위협하도록 놓아둘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하면 황제인 이한은 어떠한가. 그는 더더욱 제 아버지와 같지 않았다. 이한은 어느 후궁을 특별히 아끼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가 황후를 핍박하도록 방관하고,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그런 황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한은 자란의 시선에서 그런 확신을 읽었다. 이윽고 바람 빠지는 소리로 다시 웃음을 터트린 이한이 말했다.
“그렇지. 나는 부황과는 다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한의 손이 찻잔을 향했다. 그러하면 황후는 황제가 누군가를 깊이 마음에 담는다고 하여도 괜찮을 거라고,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일까. 황제로서도 때때로 가늠하기 어려웠던 자란의 눈동자를 피하며 이한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깊은 차의 맛이 꼭 술처럼 씁쓸했다.
“뭐 물어볼 거라도 있어요?”
서서는 연빈마마께 가지고 갈 약이 잘 달여지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핑계로 주방에 들어온 소정이 자꾸만 제 눈치를 살피자 속이 답답하여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까부터 슬쩍슬쩍 눈동자를 돌려 불에 부채질을 하는 서서를 힐끔거리던 소정이 그제야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런 건 아진 언니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아요?”
“아진 낭자는 아무래도 조금 어려워서….”
잔뜩 주눅 든 소정의 모습에 서서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기야 아진이 소정에게는 유독 박하게 굴고 있으니 그가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뭐가 궁금한데요?”
행여나 이야기를 하다 마마께서 드실 귀한 약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니, 서서는 다시 시선을 약탕기에 둔 채로 물었다. 소정이 말을 이었다.
“그… 연빈마마께서는 이제 정말로 모두에게 잘 해주시나?”
“…네?”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서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소정이 다시 말했다.
“정말로 마마께서 이제 궁인들에게 해코지하지 않으시냐 이 말이야.”
“아니 무슨 그런 걸 물어보세요? 우리 마마를 보고도 몰라요? 어디 마마께서 우리들에게 목소리 한번 높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냐구요!”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고…!”
서서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지자 당황한 소정이 다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두 손을 마구 저었다. 주방에서 움직이던 다른 궁녀들이 갑작스러운 소란에 저마다 이쪽을 힐끔거렸다. 사색이 된 얼굴로 소정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알다시피 나는 이제 막 정안궁에 오질 않았어? 물론 마마께서 너무나도 따뜻하게 나를 반겨주시긴 했지만 혹시나… 혹시나 내가 실수를 할까 봐 물은 거야.”
“행여나 아진 언니에게 이런 건 물을 생각도 하지 말아요! 우리 마마께서 정말 얼마나 우리를 귀하게 대해 주시는데요. 전에 큰일을 당하신 이후로는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어요.”
“으응….”
순간 화가 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긴 했으나 따지고 보면 소정이 이리 조심스러운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서서 자신도 지금이야 철석같이 마마를 믿고 있긴 했으나 마마께서 변하신 후로 한참 동안은 그것을 믿지 못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가. 정안궁에는 서서보다 오랜 시간 동안 연빈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궁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제야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서서가 이제는 거의 울 것처럼 보이는 소정을 향해 물었다.
“소 공공은 이전에 마마를 뵌 적도 없다면서 왜 이렇게까지 겁을 내는 거예요?”
소정은 잠시 입을 다문 채로 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서서가 대답을 기다리다가 시선을 돌려 다시 약을 살피는 사이, 소정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별건 아니고… 전에 아는 궁녀가 잠시 정안궁에 있었거든.”
“아….”
“그때 살 떨리는 이야기를 오죽이나 많이 들었어야지. 그랬는데 갑자기 정안궁으로 오게 되었으니 겁이 안 날 수가 있겠어?”
“그건 뭐….”
서서는 입을 꾹 다물고 거의 다 되어가는 약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황궁은 드넓기 그지없으니 아직까지도 정안궁 밖에는 마마를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겠구나 싶어 마음이 착잡하면서도, 소정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해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던 서서가 이내 입을 열었다.
“뭐, 그건 다 지난 일이니까요. 조금 더 지켜보면 알겠지만 우리 마마는 이제 정말로 좋은 분이에요. 곧 실감하게 될 거예요.”
말을 하다 보니 불현듯 꽃병을 직접 들고 덜덜 떨며 마마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때 서서는 지금의 소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연빈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날 저를 향해 꽃처럼 웃어주시던 마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궁인들을 살뜰하게 보살펴 주시고, 보잘것없는 종인 저에게 스스럼없이 ‘내 사람’이라고 칭해 주시던 그런 모습들이 말이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이 저들의 다정한 주인이 보고 싶어진 서서가 마침 다 달여진 약탕기의 손잡이를 쥐며 말했다.
“다 됐다. 먼저 가세요. 얼른 그릇에 담아서 가지고 갈게요.”
“알겠어. 근데… 내가 이런 말을 물었던 거 말이야….”
“아진 언니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까 걱정 말구요.”
시원시원한 서서의 대답에 금세 밝아진 얼굴을 한 소정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방을 나섰다. 서서는 어쩌다 저렇게 소심한 사람이 정안궁으로 오게 되었나, 그런 생각을 잠깐 했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마마께 드릴 약이었으니 더 깊이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약을 그릇에 조심스럽게 따르는 서서의 입술 사이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제 서서를 비롯해 정안궁의 모든 궁인들에게 연빈마마를 뵙는 일은 서로 하겠다고 나설 만큼 즐거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