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그 앞에 서 있는 화운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이 연못 앞에서 화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쉬이 짐작할 수 없어 더욱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애매한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근 이한은 어떤 말도 없이 갑자기 정안궁에 걸음을 끊었다. 황제가 후궁의 처소를 찾고 찾지 않고는 어디까지나 그의 마음이겠지만 영문도 모른 채 가만히 앉아 오지 않는 황제를 기다려야 했을 화운의 마음은 또 달랐을 것이다.
이한이 지레 제 발 저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한은 혹시나 화운이 이 연못을 보며 자신이 외면당하기만 하던 지난날을 떠올리고 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제게는 기억도 남아있지 않는 일을 두고 황제의 온갖 냉대를 당해야만 했던 그때를 떠올리며 혹시나 다시 그날들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에 떨고 있었을까 봐. 따지고 보면 화운을 이런 상황에 내몬 건 자신이면서 모순적이게도 그런 걱정이 들었다.
깨끗한 연못 물 아래로 자유롭게 헤엄치는 잉어들을 쳐다보다가, 이한은 다시 시선을 돌려 곁에 선 화운을 바라보았다. 하나 변한 것이 없는 그 깨끗하고 단정한 얼굴을 눈에 담자니 이한은 그간 제 속을 소란스럽게 만들던 모든 그 폭풍과도 같은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옳은 곳에 당도한 것처럼. 꼭 해야만 일을 했고, 꼭 와야만 했던 곳에 온 것처럼.
화운의 맑은 눈동자가, 담담한 표정이, 단순히 어여쁜 얼굴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지금의 연화운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청아한 느낌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고통스러웠던 수많은 시간들을 단숨에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한결 안정된 목소리로 이한이 입을 열었다.
“몸은 다 나았느냐.”
“저는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으로 잘 지냈습니다. 하오나….”
“……?”
“폐하께서는 어찌 이리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까.”
이번에는 화운이 얼굴 가득 근심을 담아 물었다. 생각지 못한 물음에 이한은 잠시 당황한 얼굴을 하였으나 화운은 그저 며칠 사이 살이 내린 황제의 뺨을 안타깝게 보고 있을 뿐이다.
“정무가 많이… 바쁘셨습니까.”
화운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사실 답이 필요가 없는 물음이었다. 황제는 마치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사람 같았다. 원래도 깎아놓은 듯 예리하던 턱선은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물론 그것이 본디 황제가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해하느냐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었으나, 황제가 얼마나 잘생겼는지와는 관계없이 화운은 속이 상했다. 분명 황제의 곁에는 그의 옥체를 제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을 터인데 이 정도로 얼굴이 상하게 되었다는 건 분명 국사를 돌보는 일이 그만큼 과하였다는 뜻이리라.
“저는 그것도 모르고….”
이한의 대답도 없이 화운은 말을 이었다. 자괴감이 밀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분을 두고. 이렇게 몸이 축날 만큼 나라를 위해 바쁘게 시간을 보내신 분을 두고 고작해야 정안궁에 오시지 않는다고 속을 끓이던 자신이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후궁의 행세를 하다 보니 정말로 자신이 황제의 당당한 후궁의 몸인 것처럼 여기고 있던 것 같아 온몸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나는… 그간 생각이 참으로 많았다.”
황제의 대답이 이어졌다. 여전히 화운의 손을 잡은 채로, 화운을 바라보며, 이한은 천천히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머릿속이 참으로 복잡하였어. 아무리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출구가 없는 미로를 끝없이 헤매는 기분이었다.”
“폐하께서 지고 가시는 그 무거운 짐을 저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사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답을 찾지 못했어. 얼마나 더 고민해야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을 지경이야. 그러니… 그러니, 연빈….”
잠시 말을 멈춘 이한이 마른침을 삼켰다. 덜컥거리기만 하던 심장이 이제는 아예 엄청난 기세로 큰 소리를 내며 뛰고 있어 행여나 화운에게 이 소리가 들릴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이한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연화운을 두고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아니, 자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지조차도 선명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한은 제가 이토록 기약도 없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화운이 함께 느껴야 할 혼란이 두려웠다. 혹여나 황제가 이전처럼 다시 찾지 않는 건 아닐까 서러워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모순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알고 있는데도 이한은 어느 밤 화운이 지금처럼 홀로 연못 앞에 서서 괴로워 눈물이라도 흘릴까 겁이 났다.
그래서. 그래서 이한은. 무엇도 두려운 것이 없던 황제는.
“내가 조금 늦더라도 기다려다오.”
그것은 다시 말해 불안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오지 않더라도 네가 미워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아달라는 애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네가 보기 싫어 오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후궁 하나가 제가 오지 않아 상처받기라도 할까 봐 이리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용납하기 힘든 일임을 알면서도, 이한은 제가 감내해야 하는 고뇌와, 혼란과, 자괴감과 자책감, 그 모든 감정들보다도 화운을 앞에 두었다.
그때, 이한은 화운의 작은 손이 조금 더 힘을 주어 저를 잡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화운이 입을 열었다.
“저는 폐하의 사람입니다.”
저는 폐하의 사람입니다. 폐하의 후궁이 아니라, 연화운이 아니라, 폐하의 사람입니다.
화운은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황제의 앞에 단 한 순간이라도 진실로 서고 싶은 화운의 마음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나 화운은 이렇게나마 자신을 말하고 싶었다.
“폐하께서 언젠가 와주신다고 하면, 기다림 또한 저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는 것을요.”
기약 따위가 없는 날에도 화운은 이미 여기에 있었다. 그런 화운에게 희망이 있는 기다림이란 차라리 과분한 성은이었다. 그래서 화운은 조금의 흔들림도, 서러움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언제고 폐하의 사람으로 여기에 있을 것이니.”
폐하께서 저를 모르실 때에도 저는 폐하의 사람으로 여기에 있었으니.
“천 년에 한 번이라도 생각나 뒤를 돌아보신다면 제가 바로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저는 폐하의 사람으로, 여기에 있겠습니다.
다시 뵙는 날이 얼마나 머나먼 날이 되더라도, 화운은 기꺼이 이 자리에서 그분의 이름을 품고 있을 터였다.
서천은 걷다 말고 고개를 돌려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은 정안궁 전각을 쳐다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요즘 정안궁은 불이 꺼지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지고 있었다.
저를 보고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란 얼굴을 하던 연빈이 떠올랐다. 도무지 시위 하나를 갑자기 마주한 후궁의 반응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은 그 태도 때문에 서천은 줄곧 자잘한 모래알이 가슴의 어느 한구석에 남은 것처럼 껄끄럽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빈에 대해 너무 과하게 집착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털어지지가 않는 미련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자꾸만 연빈에게 집착하고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으니 이것이 꼭 병처럼 자신을 좀먹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왜 그래? 뭐 있어?”
그때, 함께 순찰을 돌던 자문이 느려지는 서천의 발걸음을 눈치채고 물었다. 서천이 막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저만치 뜰 한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거기 누구냐!”
서천이 걸음을 옮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전각에 아직 불이 꺼지지는 않았으나 한밤이 지난 지 한참이었기 때문에 바깥쪽의 뜰에 궁인들이 돌아다닐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공간에 웬 사내가 홀로 서 있었다.
“음? 정안궁에 새로 온 태감이 아니시오?”
서천과 함께 달려온 자문이 순간 그를 알아보고 물었다. 그제야 서천은 사내가 얼마 전 황제의 명으로 정안궁에 새로 왔다는 수령태감임을 알아챘다. 서천이 이어 물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시오?”
“아, 정안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궁이 낯설어서 이리저리 다니며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었소. 낮에는 아무래도 마마의 곁에 있어야 하는지라….”
정안궁의 수령태감, 소정이 머쓱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답했다. 달리 이상할 것이 없는 대답에 자문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으나 서천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얼굴로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그런 서천의 표정을 눈치챈 건지 소정이 서천을 슬쩍 올려다보며 말했다. 서천은 아주 잠시 조금 전 자신이 보았던 사내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주 짧은 순간이긴 하였으나 서천이 발견했을 때 그는 가만히 선 채로 한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물론 그가 곧바로 서천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돌린 바람에 계속 거기에 서 있었는지, 아니면 말 그대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아주 잠깐 서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서천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럼 이만.”
“수고하시오.”
서천이 대수롭지 않게 표정을 풀고 인사를 건네자 소정도 곧바로 마주 인사를 하곤 몸을 돌렸다. 서천은 그 자리에서 바로 돌아서지 않고 조금 전 소정이 서 있던 자리에 서서 그가 쳐다보고 있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정말 뭔 문제라도 있어?”
곁에서 자문이 다가가 물었으나 서천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소정이 보던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거기엔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는 연빈의 전각이 있었다. 그렇게 소정의 시선을 가늠하여 전각을 보고 있던 서천은, 그래서 저만치 멀어지던 소정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본 것을 알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