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09)화 (10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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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가 어떠했느냐를 떠나서, 정안궁의 연못은 화운이 이미 한 번 빠져 목숨이 위험해졌던 곳이다. 물론 그 일이 있은 후 화운이 달라졌으니 정안궁 사람들에게 있어 그 일은 딱히 나쁜 일이었다고 하기엔 애매한 사건이긴 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달라진 화운을 모시고 있는 아진은 어쨌든 한 번 빠진 적이 있는 연못은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화운이 굳이 한 번 빠져 위험했던 곳을 가까이하는 게 영 찝찝했기 때문이었다.

하여 마마께서 연못가에 너무 가까이 서서 먹이를 주고 계시는 것도 괜히 마음이 불안하건만 아진의 심경을 거스르는 건 또 있었다. 아진은 여전히 마마가 불편한 티를 다 지우지도 못했으면서 저가 대단한 측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마의 곁에 붙어있는 소정이 왠지 모르게 유독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아진은 정안궁에 오는 아이들을 늘 가장 먼저 챙기고 도와주는 사람이었는데 어째서 소정은 이리도 성에 차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화운의 말대로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야 화운이 변한 것을 믿는 이들이 황궁에 많아지긴 하였으나 워낙에 악명을 떨친 기간이 길었으니 여전히 화운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을 비롯해 정안궁의 모든 아이들이 그러했듯 소정 역시 정안궁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며 가까이에서 화운을 겪고 나면 달라질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소정이 수령태감이랍시고 마마의 곁에서 알짱대는 것을 보면 자꾸만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잠깐만 더 구경하다 가자.”

아진의 생각이 깊어지는 동안 여전히 연못의 물고기들에게 시선을 두며 화운이 대답했다. 이리저리 헤엄치는 홍백색 비단잉어를 바라보는 화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진이 다시 물었다.

“물고기 보는 게 좋으세요?”

“그냥… 이렇게 보고 있으니 마음이 좋네.”

화운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본래 화운은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운으로 살았을 적에도 늘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길고양이들이나 강아지들을 돌보기도 했을 정도였다. 황궁으로 온 뒤로는 사사롭게 돌봐주고 아껴줄 수 있는 동물이 없다 보니 항상 작은 아쉬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헌데 비록 손으로 만져 보거나 품에 안아 볼 순 없어도 이리저리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자니 조금이나마 아쉬운 마음이 달래어지는 것 같았다.

마마께서 좋으시다면 그게 뭐든 저도 좋은 아진은 그렇다면 마마께서 조금 더 편안하게 구경하시도록 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허면, 마…!”

“하오면 마마. 의자를 놓아드릴까요?”

하지만 아진은 말을 제대로 끝맺을 수가 없었다. 아진의 말을 중간에 끊은 소정이, 아진이 하려고 했던 말을 그대로 먼저 내뱉었기 때문이다. 아진의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왜 사람 말을 막고 내가 할 말을 멋대로 네가 하는 거야?”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마마께서 계시다는 것도 잊고 아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소정이 황급히 몸을 웅크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마찬가지로 놀란 화운이 아진의 소매를 슬쩍 잡으며 말했다.

“아진, 어찌 화를 내고 그러니.”

“아니, 그게 아니라 마마…! 그게 아니고… 그… 죄송해요, 마마….”

하지만 주인의 곁에서 목소리를 높인 건 분명 잘못된 일이니 아진은 우선 화운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에서 괜한 서러움이 솟았다.

“의자를 가져다 드릴까요, 하고 제가 여쭈려고 했는데 소정이 말을 빼앗아가서 저도 모르게….”

“그랬어?”

아진은 대답을 하면서도 그게 뭐라고 화를 내느냐 타박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들었다면 누가 말을 하든 뭐가 중요한 일이라고 버릇없이 구냐고 분명 무어라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화운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화한 목소리로 아진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을 뿐이다. 놀란 아진을 두고 화운이 소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소정. 아진이 워낙에 오랫동안 홀로 나를 챙겨 그런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예. 물론이옵니다, 마마.”

소정을 향한 화운의 목소리 역시 무르기가 그지없었지만 그 순간 아진은 화운의 그 다정함이 전부 자신을 향해 있는 것만 같았다. 괜히 큰소리를 들은 소정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말씀을 해주고 계신 것이다. 갑자기 서러운 마음이 사라지고 거짓말처럼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아진이 선심 쓰듯 소정을 향해 말했다.

“그, 그래.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서 그런 거야.”

말을 하고 나니 생각이 조금 정리되는 것 같았다. 화운의 말대로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화운을 홀로 곁에서 모시고 있어서. 화운이 변한 후에도 자신이 가장 가까운 시녀로 언제나 홀로 화운의 모든 것을 챙겨 와서. 그래서 갑자기 폐하의 말 한마디로 불쑥 나타난 수령태감이 어색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해본 아진이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소정에게 말했다.

“허면 어서 가서 마마께서 앉으실 의자를 가져와.”

소정은 아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몇 걸음 더 가지 못하고 소정은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마, 마마….”

잔뜩 경직된 소정의 목소리가 화운을 불렀다.

“또 무슨 일이…?!”

화운과 함께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던 아진의 목소리가 마치 조금 전 소정이 얼어붙은 것과 같은 형태로 덜컥 멈추었다. 동시에 화운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소매 안에서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의 눈앞에, 며칠 동안 통 보지 못하였던 황제, 성이한이 서 있었다.


이한은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린 화운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이 약한 사람이니 차가운 바닥에 더 오래 꿇지 않도록 빨리 일어나라 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현실감이 없어 그랬다. 지금 눈앞에 연화운이 있다는 게,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몇 번을 생각해도 고작 며칠간 보지 못했다고 느낄 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사뿐하게 인사를 올리는 연화운의 모습이 물결처럼 너울거려 도무지 현실적으로 보이질 않았다.

“폐하.”

결국 이한은 오 태감이 신호를 한 번 주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한은 이유도 없이 계속 저를 꿇려둔 황제에게 조금의 불만도 없는 듯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화운을 바라보다가 홀로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곤 그를 향해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총애하는 귀비를 일으킬 땐 언제나 직접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마주 잡아 조심스럽게 일으키던 부황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한은 이미 내민 손을 차마 거둘 수가 없었다. 화운의 시선이 이미 그 손끝에 닿았기 때문이다.

떨리는 눈동자로 황제가 내민 손을 쳐다보던 화운이 이내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손을 마주 내밀었다. 작은 손이 나풀거리는 꽃잎처럼 제 손 위에 내려앉는 모습을 이한은 숨조차 죽인 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평생의 정인을 맞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번 어느 후궁에게만 손을 내밀던 부황의 모습을 이한은 좋아하지 않았다. 제 어머니에게는 단 한 번도 그리 다정하게 내밀어진 적이 없는 손이었다. 하여 이한은 평생에 내가 어느 후궁을 향해 그토록 특별한 다정을 베푸는 일은 없을 거라 다짐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어느 후궁이. 한낱 사내가. 아주 오랫동안 미움을 받기만 하던, 고작해야 빈에 불과한 이가.

황제가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수줍게 붉어지는 두 뺨과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듯 보였으나 분명히 황제를 반기고 있음이 빤히 보이는 얼굴을 하고 연화운이 이한의 앞에 서 있었다.

하여 성이한은 그 앞에 서서 후회 대신 그이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릴 적, 제가 결코 닮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따랐다는 자괴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왜 내가 이런 짓을 했는지 후회하며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이한은 살며시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황제에게 붙잡혀 있는 손을 어쩌지 못하여 애꿎은 입술만 깨물고 있는 연화운이 어여쁘다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다. 자그마한 화운의 손은 놓아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황제의 뒤에 있던 오 태감이 이내 조용히 손짓하여 주변에 있던 모든 아랫것들을 물린 뒤 자신도 뒷걸음질을 쳤다. 그게 어느 쪽이든 오늘 이 만남으로 황제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길 바라며, 오 태감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황궁의 인물들보다도 연약해 보이는 사내를 향해 슬쩍 시선을 주었다 물러났다.

“폐하, 손을….”

“연못을 보고 있었느냐.”

화운은 아무래도 폐하께서 제 손을 여전히 잡고 있는 걸 잊으신 듯하여 그것을 말씀드리려 입을 열었으나 이한은 마치 듣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말을 끊고 물었다. 화운은 자꾸만 저릿한 느낌이 드는 손가락을 황제의 손 안에서 꼬물거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고?”

“다른 생각이라 하심은….”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화운의 되물음에 이한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잡은 손을 당겨서 화운을 조금 더 제 곁에 붙어 서게 하고는 몸을 돌려 조금 전까지 화운이 보고 있었던 연못을 함께 바라보았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 물었던 건 이곳이 ‘그 연못’이었기 때문이다. 정안궁의 연못. 연화운이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하였던 바로 그곳. 하여 연화운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만들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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