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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황후마마.”
아침 문후가 끝난 후, 황후가 연빈에게 홀로 남으라 명했다. 숙비와 정빈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더하는 말이 없이 가만히 내실이 비길 기다리고 있는 황후의 앞에 두 사람은 그저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연빈만이 남은 곳에서, 황후가 입을 열었다.
“이번 구휼소를 관리하는 데에는 전에 없이 많은 인력이 들어갔다.”
“…….”
“단순히 곡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약한 여인들이나 노인들, 그리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까지 고루 폐하의 성은이 닿게 하기 위해 노력한 탓이지.”
황후가 거기까지 말을 하자 연빈은 지난번 제가 황제에게 감히 청하였던 말들이 떠올라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때 이미 폐하께서는 화운의 청으로 인해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깨우쳤다 답을 주신 일이 있으나 막상 그것이 실제로 국사에 반영되었다고 하니 감개무량하여 눈앞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화운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말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만백성이 깊이 감동할 것이옵니다.”
“그래. 그러해야지. 헌데….”
“……?”
“그 일에 내 사가에서 사병을 풀어 인력을 보탠 것을 알고 있느냐.”
“그러하셨습니까.”
고개를 들던 화운이 이어진 황후의 말에 잠시 놀란 얼굴을 하였다가 이내 다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황후는 그런 화운의 반응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모든 나랏일은 결국 인력과 자금이 필요한 법이지. 하여 폐하의 뜻을 들은 내가 사가에 말을 넣어 폐하께서 하시는 일을 적극적으로 돕도록 하였다. 황후인 내가 나서서 모범을 보이자 다른 대신들도 눈치를 아니 볼 순 없었겠지. 하여 그들이 모두 사병과 자금을 조금씩 더 내놓아 일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후마마의 은덕에 백성 모두가 감읍할 것입니다.”
“…하여 실제로 백성들이 나를 칭송하고 있다는 구나. 자애로우신 황후마마께서 바닥까지 굽어 살펴 폐하의 은총이 더더욱 낮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게 돕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더없이 어진 황후마마를 가진 것이 아니겠느냐고.”
화운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백성들의 말이 하나 틀린 것이 없습니다.”
“억울하지 않느냐.”
“…예?”
갑작스러운 황후의 물음에 당황한 화운이 목소리를 높여 되물으며 눈을 크게 뜨고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는 그런 화운의 시선을 담담히 마주하며 여전히 그의 표정이며 작은 몸짓 하나까지도 빠트리지 않고 눈에 담고 있었다. 황후가 다시 말했다.
“그 어디에서도 너에 관한 말은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이것은 네가 폐하께 청하여 벌어진 일이었으나 백성들은 아무도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여 누구도 너의 은덕을 칭송하지 않아. 달게 맺힌 열매는 전부 내가 취했다고 할 수 있지. 억울할 일까지는 아니어도 서운할 일은 될 수 있질 않느냐.”
화운이 즉답했다.
“당치 않으십니다, 황후마마. 저는 조금도 아쉬운 마음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제가 비록 감히 폐하의 앞에서 말을 얹기는 하였으나 폐하께서는 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백성들을 마음 깊이 살피시고, 황후마마께서는 저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마음으로 백성들을 보살피시지요. 제가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분명 폐하께서 머지않아 명하셨을 것이며, 마마께서는 그 일을 지나치지 않고 도우셨을 겁니다.”
“흐음….”
“응당 폐하께서 하셨을 일을 두고 감히 제가 이렇다 저렇다 주제넘게 말을 얹었으니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 이 일을 받아들여 주시고, 마마께서 나서 주셨으니 저는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어찌 불경하게 다른 마음을 품는단 말입니까.”
화운이 대답하는 동안 황후는 내내 예리하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목소리의 울림을 세밀하게 들었고 눈빛 하나,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살폈다. 아주 조금이라도 감추는 것이 있는지. 억울함과 아쉬움을 안으로 삭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가 얻어야 할 것들을 황후가 취하고 있다 하여 분해하지는 않는지 하는 그런 것들을.
오래전 정안궁의 주인이었던 남후궁은 황제의 다시없을 총애를 받았으나 본인이 워낙에 병약하였고 또한 집안이 한미했던 탓에 권력에 욕심을 낼 여유가 없었다. 뒷배라고 할 만한 세력이 없었으니 설령 욕심이 있었다고 한들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선황의 귀비가 역적의 마음을 품을 수 있었던 건 황제의 총애도 총애거니와 뒤에서 받쳐줄 아비와 오라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황제의 마음을 이용하여 주요 관직에 여럿 올라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마음 말고는 달리 가진 것이 없던 오래전 정안궁의 남후궁은 으리으리한 궁 하나를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제대로 손에 쥔 게 없었다. 만약 그에게 좀 더 괜찮은 집안이 있었다면 그의 태도 역시 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고, 황후는 생각했다.
그래서 황후는 연화운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연화운은 과거 정안궁 주인이었던 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을 이미 가지고 있으니까. 물론 연주원은 황제의 더없는 충신이고, 지금의 연화운은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이긴 하였으나 황후인 자란은 언제나 모든 것을 더 넓게, 더 깊이 볼 필요가 있었다. 안국 최고의 위신을 가진 집안의 아들이 황제의 총애까지 얻게 되었을 때 그것들이 얼마나 큰 상호 작용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지난날 황후가 제멋대로인 연빈을 그냥 내버려 둔 건, 그가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이 내명부에는 골치 아픈 일이었으나 황실 전체를 두고 본다면 오히려 이득인 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는 기꺼이 백성들과 함께 황후마마의 은덕을 칭송할 것입니다.”
하여 황후, 자란은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의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화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홀로 지긋이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화운은 조금의 흠도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윽고, 자란이 말했다.
“…폐하께서 알고 계시다.”
갑작스러운 말에 화운이 다시 한 번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있으려니 자란이 말을 이었다.
“네가 백성들을 위해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그것은 폐하께서 이미 알고 계시지. 그리고 또한 내가 알고 있다.”
“…….”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백성들의 칭송을 얻고자 하는 건 곧 황후의 자리를 얻고자 함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을 욕심낸다면 황후는 그 욕심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허나 눈앞의 사내는 도무지 그 무엇에도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으니.
자란은 요 며칠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꽃처럼 기운 없이 다니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 자란이 이렇게 화운을 집요하게 살펴본 건 그 자신의 안위는 물론이거니와 이런 쪽으로는 필시 그 어떤 면역력도 없을 황제의 안위를 위함이기도 하였으므로. 무엇 하나 걸리는 면이 없는 화운의 모습에 자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청건전에서 오찬을 든 황제가 그대로 차 한 잔과 함께 홀로 어서방에 들었다. 오 태감에게까지 나가서 기다리라 축객령을 내린 탓에 쫓겨나듯 밖으로 나온 오 태감이 그 앞에 시립하며 절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 태감은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던 때부터 그를 모셨으나 요즘처럼 저의 주군 대하기가 어려웠던 적이 없었다.
달리 오 태감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 태감은 차라리 황제께서 자신에게 화를 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차라리 지금처럼 이렇게 답답하여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제는 그저 말이 없어졌다. 웃지도 않았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등한시하며 스스로를 하염없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러니 오 태감이 어찌 염려로 마음을 졸이지 않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이대로 폐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황후마마께 도움이라도 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폐하?!”
그때, 벼락처럼 황제가 어서방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홀로 근심에 잠겨 있던 오 태감이 기절할 듯 놀라 몸을 크게 들썩이는 사이, 마치 달리듯 빠른 걸음의 황제가 그를 지나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정안궁으로 가자!”
견디다 못해 허물어진 수문의 위로 사내의 마음이 해일처럼 넘쳐흘러, 온몸이 이미 흠뻑 젖어버린 황제의 걸음을 오태감은 황급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것을 전부 다 주었는데…. 더 가져와 주어도 될까?”
“이 정도면 충분히 주신 듯하니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다시 주시는 것이 어떠할까요?”
정안궁의 연못가에 서서 먹이를 뿌리곤 색색의 물고기들이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보고 있던 화운이 텅 비어버린 먹이 주머니를 흔들며 묻자 곁을 지키고 있던 정안궁의 새로운 수령태감, 소정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처음엔 화운의 얼굴만 봐도 부들부들 떨며 고개도 들지 못하던 소정은 여전히 연빈의 곁에서 안색이 창백해지곤 했으나 그래도 전보다는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실까요, 마마?”
먹이가 다 떨어졌다는 소리에 무언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곁에 서 있던 아진이 냉큼 화운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며 묻는다. 아진은 사실 지금 이 상황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