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07)화 (10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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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시키신 대로 당직을 서는 시위들에게 간식을 챙겨 주었어요.”

“응. 고마워, 아진.”

“시위 하나하나까지 이렇게 챙겨 주시고. 정말 마마 같은 분은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아진의 말에 화운이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무릎부터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이제 아진은 마치 그런 날들을 겪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화운이 말했다.

“나 때문에 너희 모두가 괴로웠던 날들이 길었으니 그날들을 모두 갚으려면 아직도 멀었어.”

“마마도 차암. 무슨 말씀을 그리 하셔요. 지금도 충분히 과분하게 대해 주고 계시니까 그리 생각하지 마세요. 간식을 받은 시위들도 얼마나 좋아하면서 마마께 감사했다구요.”

“…그래?”

“그럼요. 모르긴 몰라도 관사로 돌아가면 어깨를 제법 으쓱할 수 있을걸요. 후궁전을 모시는 어느 시위가 이리 귀한 대접을 받겠어요.”

아진의 말이 옳았다. 보통 집안이 좋은 시위들은 황제와 가까운 곳에서 근무를 하게 되는 법이라 외궁이나 후궁전에 배정받은 시위들은 출신이 다소 떨어지는 이들로 채워지는 게 관례였다. 특히나 정안궁의 시위는 천민 출신인 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어딜 가도 이렇게 존중받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아진은 뒤의 말까지 굳이 이어 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들춰봐야 지난날 정안궁이 황궁에서 홀대당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깨닫게 만들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 정안궁의 주인은 전에 없이 모두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있으니 다들 그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고 시위들 앞에서 너무 티가 나게 굴지는 말고.”

혹시나 아진이 그들 앞에서도 연빈마마의 은혜에 감사하라느니 하는 말을 할까 봐 잠시 걱정이 된 화운이 말을 덧붙였다. 아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조금 삐죽이기는 하였으나 곧 ‘알겠어요.’ 하고 수긍을 해온다. 화운이 말을 이었다.

“그럼 나가서 편하게 쉬어. 나도 잠깐… 혼자 있고 싶구나.”

“예, 마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대답을 하면서도 아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화운의 얼굴을 살폈다. 어제부터 제 주인이 영 기운이 없어 보이고 기분도 가라앉은 것 같아 여간 염려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진은 굳이 괜찮으냐, 왜 그러시느냐, 묻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제 주인이 왜 이렇게 침잠해 있는지 쉬이 짐작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오지 않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절엔 그 일을 두고 그다지 깊게 생각할 것이 없었으나 자주 찾으시다 갑자기 가타부타 말도 없이 걸음을 끊으시니 사람이라면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화운이 변하여 전처럼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후궁인 이상 황제에게 아주 관심을 끊을 수는 없었다.

아진은 화운에게서 돌아선 뒤 잔뜩 심각해진 얼굴로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제 주인이 황제를 기다리다가 잠들었던 날, 조용해진 침실 앞에서 아쉬워하며 쉽게 돌아서지 못하시던 폐하의 시선은 더없이 애틋하여 아진의 마음까지도 다 저려오게 만들었다. 헌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폐하께서는 며칠 내내 그림자도 비추지 않으시는 건지.

답답하고 궁금한 것은 한가득 많았으나 지금 아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최대한 주인의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덜하도록 최선을 다해 그를 보필할 뿐이다.

“…….”

그리고 화운은 거기에 앉아서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어깨로 침실을 나서는 아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곤 있으나 아진이 저를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가 정안궁에 자주 오시자 저보다 더 크게 기뻐하여 매일 콧노래를 부르며 다닐 정도였던 아진이었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화운이 잘 알고 있으니 짐작하지 못할 수가 없는 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니 그런 아진이 고맙고,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하여 무거워졌던 마음이 아주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의미 없이 침실 안을 훑어보던 화운의 시선이 한쪽 벽에 걸어둔 목검에 닿았다. 내무부에서 신경 써 만들어 보냈던 화운의 목검이었다. 그것을 바라보자니 하운으로 살았던 시절과 함께 서천의 얼굴이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는 시위 시절 곧잘 서로 목검으로 대련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기 때문이다.

처음 마주쳤을 때는 감정이 어지러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로 동요했으나, 지나고 생각해 보면 사실 이렇게 서천을 만나게 된 건 화운에게는 나쁠 게 없었다. 안 그래도 서천의 안부가 궁금했다. 정안궁을 오고 가는 익숙한 얼굴을 볼 때마다 서천이 잘 지내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만 황제의 후궁이 일면식도 없는 시위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기에 물을 수 없었을 뿐.

그런데 이제 화운은 서천의 안부를 눈앞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대놓고 챙겨 주지는 못하더라도 지금처럼 정안궁 소속 시위들을 전부 챙겨 주는 것으로 그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살펴줄 수도 있으리라. 전처럼 말 한마디 살갑게 나눌 수는 없겠으나. 내가 바로 하운이라고, 그리 의미도 없을 비밀을 털어놓을 수도 없겠으나. 그래도 가까이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을 보면 위안이 될 것이다. 화운은 그렇게 좋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화운이 벽에 걸려 있던 목검을 떼어내 쥐고는 검 자루 부분을 가만히 매만졌다. 일순,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모든 죄책감과 마음의 짐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것은 과한 욕심이었다. 연화운의 좋은 것을 전부 다 가지고 있으면서, 하운의 것까지 전부 다 손에 쥘 수는 없는 일이다.

‘너 같은 인재를 신분 때문에 가까이 두지 못하는 폐하의 손해지, 뭐.’

어느 달밤, 그런 큰일 날 소리를 하여 하운을 까무러치게 만들었던 친우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서러운 일은 쌓여 가는데 전부 다 내려놓을 곳이 없어 무거워지는 화운의 밤이었다.


“폐하. 들어가 편히 머물다 가시지요.”

늦은 새벽, 황제는 벌써 한참 동안 태후궁의 문 앞에서 하염없이 서 있기만 하였다. 이리 시간을 보내실 거면 가마에 오르기라도 하시지. 두 발로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 황제가 걱정되어 오 태감이 무거운 목소리로 권했으나 황제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태후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한은 태후를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 새벽에 굳이 태후궁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정안궁으로 달려갈 것 같아 그랬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고,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얼굴 하나가 자꾸만 떠올라서. 그대로 놓아두면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보러 갈 것만 같아서. 그래서 이한은 가마에 올라 태후궁으로 오는 것을 선택했다.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려도, 무엇을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떤 것을 해보아도 연화운이 자신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미소 짓는 얼굴을 당장 보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황제는 이 늦은 밤. 차마 정안궁으로 갈 수 없는 걸음을 이곳 태후궁으로 옮겨 하염없이 제 어미의 그늘에 잠겨든 전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지금 이 순간에도 불행한 삶의 기억에 잠긴 어머니를 이렇게 절박하게 떠올리고 있어야만. 그래야만 이한은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억누를 수 있었다.

“폐하….”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다시 한 번 황제를 부른 오 태감의 말이 또다시 막혔다. 들려오는 황제의 목소리는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이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연약했다.

오 태감은 황제가 가지고 있는 불안을 이해했다. 그가 무엇을 이토록 경계하여 황제로서 응당 누려도 상관없을 일을 두고 자신을 이렇게까지 채찍질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오 태감은 황제의 불안이 안타까웠다. 설령 총애하는 후궁이 생긴다고 한들 선황처럼 그가 교만하게 구는 것을 두고 볼 성정이 아니건만. 총애를 얻은 후궁 하나가 감히 황후를 겁박하고 그 아들을 끌어내리려 역모를 꾸미도록 내버려 둘 분도 아니건만. 어찌하여 가는 마음을 이리 억지로 틀어막아 고통스러워하는지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다면, 부황께서도 모든 것을 달리 대하실 수 있었을까.’

지금의 황제는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면 이따금 오 태감에게 그런 말을 했다. 그건 아마도 그가 어릴 적 홀로 겪어야 했던 숱한 밤들의 물음이었을 것이다. 아비의 무심함과 어미의 뒤틀린 감정들을 감내하며 어디에서든, 무엇에서든 이유를 찾고자 하였던 어린 황제의 고통을 오 태감은 눈에 그릴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는 결코 그럴 분이 아니시라고. 설령 폐하께서 연빈을 특별히 여겨 익애하신다고 한들 선황과 같은 결과를 역사에 얹는 일은 없을 거라고. 오 태감이 아무리 진심을 다하여 고한다고 한들 황제에게는 그 말들이 깊이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지고하신 황제라고 한들 어린 시절의 상처란 그렇게 한 사람의 일생을 옭아매는 법이었다.

하여 오 태감은 하염없이 태후궁을 바라보고만 있는 황제의 곁에 우두커니 자리를 지킨 채로 함께 서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오로지 그것만이 오 태감이 황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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