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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진의 속도 모르고 화운은 고개를 저어 아진을 말린다.
“나를 무서워하는 게 뭐가 그리 잘못된 일이니.”
“마마.”
“너희야 내 곁에 있으니 이리 나를 보고 믿어 주는 것이지만 아직 내가 변한 것을 보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나를 두려워할 수도 있지. 안 그래도 갑자기 정안궁 소속이 되어 긴장될 텐데 너무 탓하지 말아라.”
“이거 보세요. 이리 착하신 우리 마마이신데….”
“그래그래. 소정도 차차 나아지겠지.”
사실 그저 오고 가다 마주친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정안궁의 수령태감으로 배정받은 이가 저의 주인 앞에서 침착하게 굴지 못하고 이런 추태를 보인 건 악독하다 이름난 연빈뿐만이 아니라 다른 궁이었어도 크게 혼쭐이 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드럽게 저를 감싸 주는 연빈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정은 머리를 조아린 그대로 눈을 깜빡였다. 화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려운 것이 있으면 여기 아진에게 물어보거라. 정안궁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
“예. 예, 연빈마마.”
“이제는 너도 정안궁의 식구가 되었구나. 앞으로 잘 지내보자.”
“…예, 마마. 가진 모든 것을 걸어 마마를 모시겠습니다.”
그리 대답하는 소정의 목소리가 그래도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화운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아진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기며 웃었다. 모처럼 정안궁에 새 식구가 생긴 날이었다.
정빈, 송현이 정안궁으로 화운의 안부를 물으러 왔다. 상처에 좋다는 약이며 무엇이며 한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정안궁에 들이닥친 송현은 몇 번이나 괜찮냐고 묻고 또 물어 화운이 웃음을 터트리도록 만들었다. 송현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닫고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셔 숨을 고른 뒤 확연히 차분해진 목소리로 화운에게 말했다.
“그날에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
“그날, 창경정에서 말입니다. 저를 구해 주셨지 않아요.”
거의 목숨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는 숙비만큼은 아니지만 송현은 자신 역시 연빈에게 말로는 갚지 못할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송현은 겁이 나고 무서워서 그저 덜덜 떠는 일밖에 하지 못하고 서 있던 자신을 부르던 연빈의 목소리를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송현은 그 순간 연빈에게서 저의 소중한 오라버니를 보았다.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 아닌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떻게 보면 연적이나 다를 것이 없는 상대가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에 자신을 생각해 주었다. 도와주었다. 송현이 세상에서 가장 의지하는 오라버니와 겹쳐 보일 정도로 든든하게 자신을 보호해 주었다. 직접 겪지 않았다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 일축했을 소리다.
송현의 말을 들은 화운이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살짝 웃고는 입을 열었다.
“구했다는 말은 다소 과분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연빈이 그때 저를 불러 주지 않았다면 저는 멍청하게 서서 울기만 하다가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몰라요.”
모순적이게도 창경정의 일이 있은 후 홀로 그날의 기억을 곱씹던 송현은 사실 연빈이 제 오라비와는 전혀 다른 사람임을 실감했다. 당연한 말이었으나 그때까지 송현은 저에게 다정한 언사를 보여 주는 연빈의 위로 늘 오라비를 겹쳐 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날 저를 그토록 괴롭히던 연빈에게 갑작스러운 호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송현은 깨달았다. 연빈은 저의 오라비가 아니다. 그가 제게 다정한 사내라고 하여 오라비를 대신할 인물로 여겨서는 아니 되었다. 대신 송현은 연빈, 연화운이라는 사람을 다시 보았다.
과거에는 단 하루도 좋았던 날이 없으나 어느 계기로 인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모든 화살을 묵묵히 감당하였던 사내를. 아무리 좋게 대해도 결코 좋은 말이 되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송현은 물론이오, 숙비에게까지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태도를 고수하였던 그 사내를.
하여 결국에는 제 안위를 걸고 기꺼이 송현을 돕고, 비영을 구하기까지 하였던 바로 그 사내를.
“정말 고마워요, 연빈.”
송현은 이제와 연빈을, 연화운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연빈이 나를 위해 그리 해 주었듯, 나 또한 앞으로 연빈에게 진심을 다할 거예요.”
송현은 이제 더 이상 연빈에게서 저의 오라버니를 보지 않았다.
“헌데, 정빈….”
행여나 화운의 몸에 무리가 가기라도 할까 오래 지체하지 않고 일어선 송현을 붙잡은 건 어딘지 모르게 망설이는 듯한 화운의 목소리였다. 송현이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화운을 바라보았다.
“예, 연빈. 무슨 할 말이라도…?”
“그것이… 그러니까….”
“무슨 말을 그리 망설이세요. 편하게 하세요. 저와 숙비마마도 사사로운 자리에서는 편히 지내는걸요.”
송현은 넌지시 연빈과도 그리 친밀한 사이가 되었으면 하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 말했다. 지난번에는 오라버니가 그리운 마음에 반쯤 정신이 나가 무턱대고 저와 친남매처럼 지내자 덜컥 말해버릴 뻔했지만 연빈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그토록 당황스러운 말은 또 없을 터이다. 이제 와 송현은 그날 갑자기 찾아온 폐하 때문에 그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제 송현은 자신도 연빈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되고, 연빈 역시 자신에게 친근함을 느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 제 마음이 은근슬쩍 티가 나는 것까지는 어찌 막을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송현의 말에도 화운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몇 번을 더 입술 끝을 달싹이다가 이내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잘 지내시지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송현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역시 괜한 것을 물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린 화운이 서둘러 말을 덧붙인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괜한 것을… 괜한 것을 물었습니다.”
“연빈….”
“방금 제가 물었던 건 그냥 못 들은 척해 주세요.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정빈.”
화운이 거의 송현의 등을 떠밀 기세로 크게 당황하자 무어라 대답을 하려고 했던 송현은 입을 다물었다. 근자에 폐하께서 정안궁에 발길을 끊으셨단 이야기를 송현 역시 듣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송현이 쉬이 화운 앞에서 입에 담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여 송현은 화운의 말대로 그런 말은 듣지 못한 것처럼 표정을 갈무리하곤 말했다.
“그럼 연빈, 이만 쉬세요.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화운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한 뒤 돌아서 정안궁을 나서는 송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화운이 이내 자신의 의자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아진이 황급히 다가와 화운의 안색을 살폈다.
“마마, 괜찮으세요?”
“내가 쓸데없는 걸 물어서는….”
“쓸데없는 거라니요. 마마께서 폐하를 궁금해하시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덩달아 시무룩해지는 아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화운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참았어야 했는데. 아무리 폐하가 궁금했어도 그런 질문을 하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물밀듯이 밀려왔다.
화운이 이한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 그는 정안궁을 나서며 화운에게 또 오마, 하고 인사를 남겼다. 화운이 먼저 잠드는 바람에 황제를 보지 못한 밤이 지난 아침에 아진에게 폐하께서 왔다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쉽고 아쉬워 가슴이 다 철렁 내려앉았다. 고작해야 하루를 보지 못한 것뿐인데도 자꾸만 이한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그리워 오늘은 바보처럼 먼저 잠들지 말아야지, 하고 종일 긴장하기도 했다. 그랬던 황제가 그날 이후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하루아침에 걸음을 끊으시니 화운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고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바쁘신 일이 있겠지. 시간이 나시면 찾아 주시겠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많이 바쁘시구나. 옥체가 상하시면 아니 되는데. 그런 걱정이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화운은 깨달았다. 사실 황제가 정안궁에 왔던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그것을 깨닫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자신이 폐하께서 당연히 정안궁에 와 주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지난날의 연빈이든, 자신의 자신이든 폐하께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없는 건 매한가지인데 어째서 지금의 나는 그분을 뵙는 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꿈같던 며칠의 일은 그저 자신이 크게 다쳤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짧은 호사였던 것뿐인데.
화운은 저도 모르게 그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자신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깨닫고 나서는 더 이상 황제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화운이 황제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자 화운은 그분이 궁금했다. 정안궁에 드나드실 때도 매일 정무에 치여 어렵게 시간을 내셨는데 너무 오래 바빠 혹시라도 건강을 상하실까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화운은 오늘 덜컥 송현에게 폐하를 물은 것이다. 그분이 괜찮으신지 궁금해서. 알고 싶어서. 직접 뵐 수 없다면 듣기라도 하고 싶어서.
“이게 무슨 추태인지 모르겠구나.”
“마마….”
깊이 감았던 눈을 뜨며 자조적으로 늘어놓는 화운의 말에 아진이 울상이 되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안정전으로 달려가 황제와 독대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인 아진은 서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