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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05)화 (105/167)

105

성공하면 황제가 될 것이고 실패하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거사를 코앞에 둔 이한은 자란을 불러 다정하고도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나의 부인이 아니라 일국의 황후가 되고자 하였지. 그간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런 부인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소.’

‘저하…. 어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자란. 그대는 강한 사람이야. 여인의 순결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라느니, 지아비에게 의지하여 순종적으로 살아가야 하느니, 무슨 일이 있어도 지아비와 생사고락을 함께해야 하느니 하는 세간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을 사람이기도 하지.’

‘…….’

‘내가 여길 떠나고 나면 그길로 부인은 별궁으로 가시오. 그대를 호위할 이들을 따로 준비하여 두었으니 믿고 움직여도 될 것이오.’

그날의 이한은 마치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준비한 사람 같았다. 보통의 여인이라면 절대로 수락하지 않았을 일이었으나 자란만큼은 반드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이 없는 자란을 두고 이한이 말을 이었다.

‘별궁에도 이미 호위를 보내 두었으니 혹시 누가 그곳에 쳐들어오더라도 도망칠 시간쯤은 충분히 벌어 줄 수 있을 것이오,’

‘저하.’

‘그러니 만약에… 만약에 내가 실패한다면 그대는 그대를 이끄는 호위들을 따라 그 길로 황궁을 벗어나 멀리 도망가시오.’

어떻게 들어도 절대로 말이 되지 않았다. 태자의 정실이자 장차 황후가 될 사람이 자신의 부군이 사지가 될지도 모르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홀로 도망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꼭 황실의 사람이 아니라도 하더라도, 여염집의 아낙네라고 해도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보통의 여인이라면 이한이 하는 이런 말은 오히려 자신을 모욕하는 언사라고 화를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란은 들었고, 이한은 말을 이었다.

‘어딜 가도 먹고살기에는 충분한 돈을 준비해 두었어. 비록 권력을 쥐고 살지는 못할 테지만 남편의 삶에 묶여 죄도 없이 죽는 것보다야… 그대에게는 훨씬 나은 삶이 아니겠소.’

이한은 웃으며 그리 말했다. 비록 사내와 여인으로 서로를 은애하는 감정은 없었으나 함께한 세월 동안 서로를 알아가고 마음 깊이 이해하며 살아왔던 시간이었다. 자란은 거기에 앉아 자신을 보는 이한의 시선이 그저 여인이 아닌, 마음으로 아끼는 지기를 대하는 감정을 담고 있음을 알아챘다.

검을 들어 싸울 수 있었다면 싸웠을 것이다. 자란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한과 함께 사지로 뛰어드는 게 그를 구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자란은 망설임 없이 나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싸움은 그렇지 않았다. 이한의 살고 죽음은 자란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고, 거사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판가름이 나는 시점에 이한의 생사 역시 이미 결과가 정해질 것이다.

허니 자란이 의리를 지키겠다고 해봐야 할 수 있는 거라곤 얌전히 기다리다가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는 일뿐이었다. 자란은 그렇게 무의미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저하. 저는 살겠습니다.’

그래서 자란은 대답했다. 그 말 한 마디를 하는 데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저는 도망쳐서 살 것입니다.’

자란은 가만히 앉아서 허무하게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스스로 선택한 싸움으로 말미암아 죽고 싶었다. 자란은 이한의 거사가 실패하는 순간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몸을 숙이고 물밑에서 몰래, 감히 자신의 황후 자리를 빼앗아가고 하나뿐인 부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역도의 무리들을 처단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릴 것이다.

만약에 그런 순간이 오지 않는다 해도. 복수의 순간이 영영 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래도 자란은 그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하며 끝까지 살아남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저하의 복수는 제가 해드리지요.’

누군가는 명색이 부인이 되어 뻔뻔하고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는 말을 두고.

일개 여인인 주제에 무슨 일을 도모할 수 있느냐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을 두고.

‘…그대가 황제가 된다면 차라리 내가 안심할 텐데.’

자란의 그 모든 말들을 앞에 두고도 이한은 웃으며 세상천지 어느 여인도 들어 보지 못하였을 말을 했다.

그날, 이한과 자란은 특별한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애틋한 이별의 말이나 격려의 말조차 없었다. 이한은 마치 가벼운 마실을 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웃으며 돌아섰고, 자란은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한이 미리 준비해놓은 별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밤이 다 가도록 황궁에서 올 기별을 기다리며 자란은 생각했다.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지만. 죽어버린 남편을 따라 죽어버리는 그런 멍청한 짓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지만. 만약에 이날을 무사히 넘긴다면. 이한이 무사히 돌아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자신이 황후가 된다면.

그리 된다면 자신은 남은 평생을 어진 황후로 황제를 보필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그리고.

세상의 눈으로는 한낱 여인에 불과한 자신의 삶을 존중해 준 그를 위해. 사내의 여인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자란을 인정하여 준 그를 위해. 자신 역시 황제가 아니라 성이한, 그 한 사람의 삶을 지켜 줄 것이라고.

황제조차도 알지 못했던 자란의 이야기였다.


“폐하의 용안을 보았느냐.”

황제가 황후궁에서 오찬을 들고 돌아간 후에도 황후, 자란은 한참 동안 폐하께서 앉아 계시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곁에 서 있던 선은 자란의 물음을 들었으나 감히 입을 열어 대답할 수 없는 황후의 분위기에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란이 말을 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어찌 그리 서러운 얼굴을 하고 계시는 건지.”

자란의 손가락이 탁, 탁, 하고 식탁 위를 두드렸다.

최근 황제가 정안궁에 발길을 끊었다는 소식은 자란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안궁에 드나들면서 자란이 원래 알던 분이 맞나 싶었을 정도로 잔뜩 들떠 보이던 황제가 연빈을 보지 못하게 되자마자 저리 티가 나게 서글픈 모양을 하고 있으니 모른 척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사태가 여기까지 왔는데도 자란의 황제는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

“아니. 아니지. 어쩌면 이미 알고 계신지도 모르지.”

점점 더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가는 자란이 여전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평생 황제의 사랑을 갈구하며 불행했던 태후와, 불안정한 어머니의 품에서 어떤 감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자란 황제의 어린 날들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만… 인정하기 두려우신 건지도….”

황제가 후궁 하나를 총애한다고 하여 세상이 뒤집어지진 않는다. 이한이 연화운을 지나치게 아껴 새로운 궁 하나를 지어 준다고 한들 자란이 불행해질 리도 없다. 대역무도한 죄인인 선황의 귀비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연씨 가문은 황제에게 충직했다. 만약 자란이 후사를 본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 아이를 태자에 올릴 인물이 바로 연주원이었다.

자란은 또 어떠한가. 그는 황제의 연심을 갈구하는 여인이 아니었고, 후궁 하나가 총애를 등에 업는다고 하여 무너질 연약한 황후 또한 아니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지금처럼 마음 깊이 두려워 저어하실 필요가 없는 일인 것을.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한 사내의 마음을 안쓰러이 가늠하며, 그렇게 자란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 연빈마마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 아, 앞으로 목숨을 다 바쳐 마마께 충성… 충성하겠습니다…!”

화운은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린 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말을 더듬으며 인사를 올리는 내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바닥을 짚고 있는 손과 팔까지도 떨고 있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연빈’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것 같았다. 혹시 언젠가 연빈에게 억울하게 해코지를 당했던 인물은 아닌가 싶어 화운은 그가 놀라지 않게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이 소정이라고 했느냐.”

“예…! 예, 마마.”

“혹시 이전에 나를 만나 본 적이 있었느냐.”

“아닙, 아닙니다, 마마. 가마를 타고 가시는 마마를 멀찍이… 멀찍이 뵈온 적은 있으나 이리 마주 뵌 것은 오늘이 처음, 처음입니다.”

화운이 질문을 하자 더 겁이 난 건지 몸을 더 웅크리고 대답하는 모습에 곁에서 보다 못한 아진이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게야? 설마하니 마마께서 너를 어찌 할까 봐 겁을 먹었니? 우리 마마를 뭘로 보고 있는 거야?”

“아진.”

“마마. 내무부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을 보냈다고 하더니 감히 마마 보기를 꼭 귀신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잖아요.”

우리 마마께서 달라지신 지가 벌써 한참이고, 얼마 전 숙비를 구하신 일도 이미 온 황궁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아진은 여전히 저의 주인을 야차 보듯 하는 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렇게 눈치도 없고 겁은 많은 내관이 어떻게 정안궁의 수령태감이 되어 일을 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요즘 아진은 폐하께서 통 정안궁에 오시지 않아 심사가 불편하건만 새로 온 이는 저리 마뜩찮게 행동하고 있으니 부아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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