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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04)화 (10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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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욕망을 거세당한 사람처럼. 이한은 저의 사사로운 모든 감정들을 철저하게 외면한 채 그 모든 것들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니 아무리 모두가 이한을 성군이라 떠받들고 있다고 하여도 그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오 태감이 어찌 그 모든 걸 태연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물론 황제는 일개 사내와는 달리 더 큰 포부를 가지고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사람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평생을 그리 살 수는 없다. 오 태감은 자신의 황제가 성군이길 바랐지만 동시에 그분이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원했다. 정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좋아하는 무언가를 보며 사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후궁이든, 그림이든, 미천한 무희의 춤사위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이라도 황제가 나랏일이 아닌 자신의 일로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빈이 변하고, 황제가 그런 연빈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신경 쓰기 시작했을 때 오 태감이 은근히 연빈에게 힘을 실어 주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비록 과거의 연빈은 차마 눈뜨고 봐줄 수가 없을 만큼 안하무인인 사내였으나 만약 그가 정말로 기억을 잃고 개과천선하여 변한 것이라면 오 태감은 그것을 기회라고 여겼다. 생전 그러신 적이 없던 분이 연빈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라도 된 것처럼 굴 때는 생전 처음 보는 황제의 모습에 괜히 제가 다 설레기까지 하였다.

이대로 변한 연빈과 사이가 좋아진다면, 어쩌면 처음으로 황제에게 개인적이고도 사소한 기쁨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는데. 자꾸만 황제의 앞에 연빈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은근슬쩍 그를 비호하는 말들을 해왔던 건 그게 무엇이라도 황제의 마음에 사소한 뿌리를 내리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는데.

“…….”

오 태감은 고요 속에 잠긴 문 너머의 침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연빈의 패를 만지작거리면서도 끝끝내 그것을 뒤집지 못하였던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벼운 것이 아니었나. 그냥 하루 일과를 끝내고 처소에 돌아와 사소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던 걸까. 이토록 고통스럽게 경계해야 할 만큼. 절박하게 자신의 발걸음을 붙들어 놓아야 할 만큼.

어느 후궁을 지나치게 총애하여 황후를 일평생 불행하게 만든 선황을 떠오르게 만들 정도로, 연빈은 황제의 마음에 그렇게나 깊이 파고들고 있었던 것인가.

말이 없는 오 태감의 눈동자가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으로 침전하는 것처럼 어두워졌다.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애써 황제와 연빈의 사이를 가까워지도록 애썼던 자신의 노력은 크나큰 실수가 되는 것인지. 아직까지 해답을 알 수 없는 문제 앞에 오로지 어둠만이 길을 알듯 깊어지고 있었다.


사위가 고요에 잠긴 정안궁을 바라보고 서서 서천은 조금 전 마주친 연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정안궁으로 온 그 순간부터 연빈을 마주치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건 서천이 바란 일이기도 했다. 무엇을 어찌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지만 서천은 우선 완전히 달라졌다던 연빈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싶었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연빈을 정말로 코앞에서 마주치고 난 지금. 서천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도대체 무언지 도무지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하운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뻔뻔하게 홀로 살아남아 모든 좋은 것들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마지막까지 춥고 아프게 떠나간 하운이 생각나 가슴이 미어졌다. 동시에, 서천은 혼란스러웠다. 단순히 연빈이 자신들을 향해 상냥하게 말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기는 하였다. 입만 열면 아랫것들을 향한 욕설을 내뱉기로 유명한 연빈이 의복에서부터 티가 나는 천민 출신의 시위를 걱정해 주었다는 것부터가 더없이 놀라운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서천이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건. 이토록 한참 동안이나 연빈과의 마주침을 계속 곱씹어보고 있는 건.

단순히 그가 내뱉은 단어나 문장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말투 때문이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문제였다. 서천은 오늘 이전엔 한 번도 연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본래 연빈이 어떤 목소리로, 어떻게 말하는 사람인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마주한 연빈의 목소리가. 그 음성의 너울거림이 이상하게 익숙해서. 마치 이전에도 이미 들어 본 적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낯설지가 않아서.

“자문.”

한참을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서천이 이내 자신과 함께 보초를 서고 있는 동료 시위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응?”

“너는 입궁한 후 줄곧 정안궁에 있었다고 했지?”

“그랬지. 왜?”

“연빈마마 말이야…. 혹시 그분이 지금처럼 사람이 변했다고 하기 전에도 저런 목소리셨나?”

자문은 서천의 물음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니! 절대 아니지!”

“…아니야?”

“아니, 그게, 뭐…. 음…. 그러니까 목소리 자체로 본다면 비슷하기야 비슷했지만 말투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목소리까지도 달라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흠….”

“말도 마. 완전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처럼 변하셨으니까. 화를 안 내고, 욕을 안 하고 이런 게 문제가 아니라 말투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들이 그냥 완전 다른 사람이야, 다른 사람.”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처럼.

서천의 머릿속에 자문의 말이 메아리처럼 뱅글뱅글 돌아가며 울렸다. 어째서 그 순간 어느 궁녀의 다친 손에 손수건을 묶어 주었다던 연빈의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 자신의 물집 잡힌 손에 하운의 손수건이 묶였던 것처럼.

“연빈마마께서 변한 것이 참 좋기는 하지만 나는 아주 가끔은… 좀 무섭기도 하다니까?”

생각이 깊어지는 서천의 귓가에 자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아무리 죽었다 살아났다고 해도 사람이 저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는 것인지, 원….”

하운은 정안궁의 시위였다. 그 애는 분명 언제, 어디에서든 다정하고 온화하여 뭇사람들의 호감을 샀을 것이다. 허면 어떤 이들은. 어쩌면 가진 성정이 괴팍하여 도무지 남들의 애정을 얻을 수가 없는 인물은 하운의 그런 모습이 탐이 나지는 않았을까. 훔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을 만큼 욕심이 나지는 않았을까.

서천이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너무 많은 밤이었다.


“…정안궁에 보내라 했던 수령태감은 어찌 되었느냐.”

조회를 위해 청건전으로 향하는 중에 황제가 물었다. 오 태감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예, 폐하. 오늘 수령태감 자리를 맡을 이와 함께 몇 명의 내관들이 정안궁으로 갈 것입니다. 정안궁에는 내관들 수도 적은지라….”

“네가 직접 살펴보기는 하였고?”

“물론입니다, 폐하. 내무부에서 추천한 인물들을 제가 한 명 한 명 살펴 손수 뽑았으니 염려를 놓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오 태감의 대답에 황제가 잠시 말없이 눈을 깊이 감았다 떴다.

정안궁에 걸음을 끊은 며칠 동안 황제는 눈에 띄게 표정이 사라졌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감정의 굴곡을 겪으며 노골적으로 얼굴에 마음을 드러내던 이와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니, 그때와 비교할 것도 없이 연빈이 달라지기 전의 황제와 비교해도 지금의 이한은 지나치게 딱딱하게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 태감의 근심이 날마다 깊어지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 이유가 연빈에게 있음을 모르는 오 태감이 아니었으나 정안궁에 납시는 것이 어떻겠냐, 그리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경계하듯 한껏 기세가 날카로워지는 황제 때문에 도무지 여의치가 않았다.

게다가 오 태감 역시 아직까지 자신이 어찌 처신하는 것이 황제를 위해, 주군의 미래를 위해 더 좋은 일이 될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폐하께 무언가를 권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결국 오 태감은 오랜만에 황제가 직접 정안궁 이야기를 꺼낸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도 소극적으로 말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연빈마마께서 깊이 감복하실 것입니다.”

오 태감은 어쩌면 폐하께서 정안궁에 대해 더 말을 붙이지 않으실까 생각하였으나 대답조차도 하지 않은 황제는 가마가 청건전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황제의 얼굴에서 혹시라도 슬픔을 느끼기라도 할까 봐, 오 태감은 감히 천자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음이었다.


‘자란. 그대가 왕부로 시집을 온 것은 그대의 마음에 사내와 하나 다를 바가 없는 거대한 포부가 있어 그러한 것임을 알고 있소.’

자란은 아직도 그날, 자신의 부군이자 훗날 대 안국의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될 태자 저하가 제게 하였던 말을 단 한 마디도 잊지 않고 그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순간일 터다.

그때 아직 태자이던 이한은 귀비의 아들인 2황자를 필두로 몇 명의 아우들이 작당을 하여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아챘다. 이미 지병으로 앓아누운 부황은 힘이 다하였고 모후는 아들을 지켜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결국 이한이 살아남으려면 그보다 먼저 움직여 형제들을 단죄하는 수밖에는 없는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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