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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03)화 (10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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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간, 정안궁에 황제 폐하의 발걸음이 끊겼다. 예전을 생각하면 며칠 황제가 오지 않는 것쯤은 달리 특별할 게 없었으나 다친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정안궁에 드나들었던 황제가 아니던가. 화운은 그런 자신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하고 우습다 생각하였으나 시시때때로 폐하께서 어찌 오시지 않는지 고민하고 걱정하는 자신의 마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던 건 아닐까 그날의 대화를 몇 번이나 곱씹어 보았다. 아니면 폐하께서 오셨는데 자신이 잠들어버린 탓에 뵙지를 못하여 마음이 상하신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물론 그 정도로 옹졸한 분은 절대 아니었으나 생각이 깊어지니 별 게 다 걱정이 되었다.

바쁘신 것이겠지. 그간 정안궁에 매일같이 와 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과분한 대우를 받은 것이었지.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만 정안궁 뜰을 넘어 혹시나 폐하께서 걸어오시지는 않을까 시선이 갔다.

그리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발이 닿는 대로 걸음을 걷던 화운의 앞에 시위들 몇이 멈추어 섰다. 정안궁 순찰을 돌던 시위들과 동선이 겹친 탓이었다.

“연빈마마를 뵈옵니다.”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해오는 시위의 목소리에 상념에 빠져 있던 화운이 문득 정신을 차리곤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의 앞에 있는 시위들을 불현듯 바라본 그 순간.

“서…!”

화운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절로 몸이 빳빳하게 굳고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마…? 괜찮으세요?”

심상치 않은 화운의 반응에 놀란 아진이 말을 붙여왔지만 지금 화운은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지금 화운의 앞에 인사를 하고 있는 시위 중의 한 명이 서천이었기 때문이다.


“…….”

황제는 경사방에서 올린 패를 하염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앞에 선 위 총관은 오늘도 폐하께서 모든 패를 물리실까 초조한 얼굴이다. 아무 의미 없이 패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하던 황제의 손끝이 이윽고 하나의 패 위에 머물러 새겨진 이름을 가만히 매만졌다.

연빈, 연화운.

그의 이름이었다.

태후궁에 다녀온 뒤로 정안궁을 찾지 않았다. 이한이 생각할 때 화운이 위험한 상황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고 더 이상은 매일같이 그를 찾아 몸 상태를 확인할 필요도 더 이상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침을 받는 것도 아닌데 정안궁에 매일같이 드나드는 건 지나친 대우였다. 이한은 자신의 행동이 연빈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두려웠다.

이한의 손끝이 다시 한 번 연화운의 이름을 매만진다. 마치 그것이 정말 연화운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한 이유로 정안궁으로 갈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그가 이해해 주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애틋한 손길을 지켜보고 있는 오 태감의 표정이 더없이 착잡해졌다. 오 태감은 지금 폐하께서 그 패를 차라리 뒤집길 바라야 하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한낱 후궁의 패를 저토록 애가 타 매만지는 황제의 심경을 가늠해 보기가 겁이 났다. 황제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종으로서 그 걸음을 말려야 하는지 아닌지, 요즘 오 태감에게는 어려운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한참이나 말없이 연빈의 패를 만지작거리고만 있던 황제가 이윽고 손을 떼고는 물러가라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물러가라.”

“…예, 폐하.”

“당분간은 찾아오지 말도록.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리 하겠습니다, 폐하.”

평소라면 말이라도 한 번 재고해 달라 청을 하였을 위 총관이지만 지금 황제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어찌나 무겁고 어려운지 감히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결국 위 총관은 오 태감에게 한 번 시선을 주었다가 그대로 물러났고 다시 드리워진 적막 속에서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미 연빈에게는 충분한 대우를 해 주었지.”

“…….”

“더는 안 돼. 더는 안 된다.”

그것이 꼭 그 자신에게 하는 경고처럼 들려와서. 몇 번이나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되뇌는 황제의 앞에 오 태감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마터면 ‘서천!’ 하고 그를 부를 뻔했다. 숨을 멈추는 것이 몇 초만 늦었더라도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을 것이다.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을 알면서도 놀란 표정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정안궁에 있으면서 시위 시절 알고 지냈던 이들을 만난 건 처음이 아니었다. 다가가 알은척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남몰래 쓴웃음을 삼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어느덧 익숙해져 이따금 오다가다 그들과 마주쳐도 담담하게 인사를 받고 지나칠 수 있을 만큼은 되었는데, 지금은 마치 그 모든 시간들이 휘발되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요동쳤다.

서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관사에서 함께 지냈던 시위들 중 하운과 가장 가깝게 지내던 이였다. 가장 오랜 시간을 붙어 다녔고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으며 벗으로 오래오래 서로를 의지하고 함께하자 그리 약속도 하던 친우였다.

물론 화운은 자신이 그를 친밀하게 여겼던 것만큼 그가 자신을 특별히 여기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서천은 화운이 유일하게 ‘벗’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 이를 이렇게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게다가 서천은 본래 주안성의 중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정안궁으로 오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마마, 어찌 그러세요. 아프신 거예요? 그러게 제가 무리하시지 말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아니…. 아니, 괜찮아. 괜찮아.”

외마디 신음과 함께 떨고만 있는 화운의 모습에 기겁한 아진이 화운의 얼굴을 살피며 소란을 떨었다. 그 덕에 겨우 정신을 차린 화운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고는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인 서천을 바라본다.

“수고가… 수고가 많군. 한밤엔 길이 어두우니 늘 조심하도록.”

화운은 떨리는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곧 곁에서 함께 인사를 하고 있던 시위가 ‘예, 마마.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을 해왔으나 서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가 아예 말을 하지 않은 것인지, 목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만 들어가자.”

이제는 다리가 다 떨려와 화운은 곧장 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진은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으로 서둘러 화운을 부축했다. 그들에게서 몸을 돌려 걸으며 화운은 아프게 입술을 깨문다. 어쨌든 서천은 자신이 연빈을 구하고 죽은 것을 알 것이다. 그걸 알고도 정안궁에서 연빈의 모습을 마주한 서천의 속마음이 어떠할지 궁금하면서도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할까. 갑자기 죽어버린 이를 아주 조금은 그리워하였을까. 그런 물음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간 정안궁에서 낯익은 시위들을 마주할 때마다 서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사소한 궁금증에 불과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실력 있고 똑똑한 사람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마는 그래도 달리 힘든 일 없이 보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화운은 아무리 갑작스럽게 마주쳤다고는 하나 서천을 본 것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뒤흔드는 게 의아했다.

느리게 전각을 향해 뜰을 가로질러 걸으며 화운은 오늘도 오지 않은 황제 폐하를 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화운의 밤을 괴롭히는 많은 악몽들을 떠올렸다.

서천의 얼굴을 보는 것은 너무나도 반가웠으나 그것은 동시에 화운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아서. 서천은 이 자리에 거짓으로 존재하는 하운이라는 존재를 끌어내는 그런 사람이라서. 이토록 마음이 불안하여 흔들리는 이유는 그 때문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화운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버거운 감정들은 응당 제가 견뎌내야 할 몫이었다.


술에 취해 잠든 황제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준 오 태감이 조용히 발걸음을 죽이며 침실 밖으로 나왔다. 술잔을 기울이는 내내 황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오 태감은 주군의 마음속에 어린 고뇌가 얼마나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 태감의 황제는 오로지 나라를 위해 사시는 분이었다. 황제의 자리라는 것이 본래 일국을 이끌 책임을 지고 있는 자리이니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오 태감이 생각할 때 지금 자신의 주군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목숨을 바치는 등의 엄청난 희생을 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 같은 태평성대에 황제의 자리에 있는 것이 뭐가 그리 고단한 일이겠느냐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 태감이 볼 때 지금 황제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는 자신의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성이한의 것이 없다. 그가 얻는 모든 기쁨은 오로지 황제로서 나라를 잘 이끈 덕분에 얻게 되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루의 모든 일과 역시 황제로서의 의무로 가득 차 있고, 밤에 시침을 받는 일조차도 개인의 쾌락보다는 마치 업무를 이행하듯 보내는 일이 많았다.

사적으로 풍류를 즐기지도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귀한 무언가를 수집하는 일도 없었다. 사사로운 기쁨을 느끼도록 하여 주는 여인도 없고, 달리 취미로 즐기는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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